명작순례
불가능한 바다를 헤엄쳐

- 캐럴 앤 더피 시집 『서 있는 여성의 누드 / 황홀』

  • 명작순례
  • 2024년 가을호 (통권 93호)
불가능한 바다를 헤엄쳐

- 캐럴 앤 더피 시집 『서 있는 여성의 누드 / 황홀』

 

캐럴 앤 더피(Carol Ann Duffy, 1955년­)는 400여 년의 영국 계관시인 역사상 최초의 여성 계관시인이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야 했던 다른 많은 스코틀랜드인처럼 6세 때 가족과 함께 잉글랜드 스탠퍼드로 이주하여 성장하게 된다. 여성, 성 소수자, 스코틀랜드인으로서의 시인 캐럴 앤 더피가 계관시인으로서 갖는 상징성은 그 자체로 고무적이었다.

“우리는 이 장소에 변화의 바람을 원하지 않아요”(『서 있는 여성의 누드 / 황홀』 24쪽 「영어과 주임」 중)라고 말하는 기성의 완고함에 그의 시는 거듭하여 변화의 바람을 이식한다. 1985년 출간된 그의 첫 시집 『서 있는 여성의 누드(Standing Female Nude)』를 시작으로 그의 시는 소외되고 음 소거 당한 목소리들을 가청권 내의 생생한 입체로 회복한다. 그는 쉬운 언어들, 일상적인 대화체로 복잡한 양상들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데 탁월하다. <대산세계문학총서> 『서 있는 여성의 누드 / 황홀』은 낱장의 종이마다 저마다 다른 목소리들의 현장에 어리둥절하게 급작스럽게 놓이게 하는 첫 시집과 52편의 사랑의 목소리를 기록한 일곱 번째 시집을 한 권으로 묶은 책이다. 이십 년의 시차가 놓인 두 시집의 상이한 이질성은 시간의 긴 보폭에서 꺼내 올린 일종의 구조물인 『서 있는 여성의 누드 / 황홀』 읽기를 풍부하게 한다.

첫 시집 『서 있는 여성의 누드』에서 그는 고립과 억압, 정체성, 불평등 등의 문제를 우리 내면에 밀착한 채로 존재하는 혐오와 폭력, 착취와 연결해 통증과 놀이가 섞여 있어 ‘놀이와 통증이 잘 구분되지 않는’ 목소리들의 혼재를 들리게 한다. 그것은 폭력적인 종합 중등학교 같기도, 포르노가 상영되고 있는 시골 파티 같기도, 여섯 살 리찌가 위태롭게 놓여 있는 난간 같기도, 벌거벗고 야윈 여자가 정물처럼 서 있는 예술가의 냉기 서린 작업실 같기도, 날카로운 호각 소리를 따라 낡아버린 물의 리듬을 돌고 있는 돌고래들이 갇힌 수족관 같기도, 집에 있는 생물을 죽이고 더 죽일 것이 남지 않아 문을 밀치고 나아가는 칼을 쥔 소년의 번득이는 거리 같기도, 대공습 후에 기억을 잃고 겉뜨기 안뜨기를 흉내 내는 자신의 손을 낯설게 바라보는 여자가 앉아 있는 지하 공간 같기도 하다. 목소리의 쇄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 하나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 하나의 목소리가 “물의 낡은 리듬의 둘레를 단 하나의 음으로”(『서 있는 여성의 누드 / 황홀』 104쪽 「돌고래들」 중) 돌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 저마다 다른 하나의 목소리들이 파묻힐 듯, 흩어질 듯, 지금 여기로 이곳으로 들려온다는 것에 긴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 목소리들은 우리의 가공된 안락함을 뚫고 우리의 내면으로 도착해 지금 여기를, 지금 우리를 질문하게 한다.

일곱 번째 시집 『황홀』은 사랑을 겪는 사람의 목소리, 사랑의 죽음을 겪는 사람의 목소리를, 뜨거운 손이 식어 차가워질 때까지, 그 순간의 쓸쓸한 서늘함마저 끌로 새긴 간절한 기도처럼 종이 위에 다른 온도의 글자로 옮긴다. 『황홀』은 연인의 목소리를 경험하게 한다. 『황홀』은 관능의 언어로 적힌 저항할 수 없음에 대한, 힘은 어떻게 포기되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황홀』의 시들은 선물 같고, 만질 수 있는 꿈 같다. “이 밤들은 선물, 우리가 가진 것을 보려고 어둠을 끄르는 우리의 손”(『서 있는 여성의 누드 / 황홀』 160쪽 「12월」 중), 사랑의 시간을 경험하며 “모든 어둠을 여는 열쇠”(『서 있는 여성의 누드 / 황홀』 204쪽 「끝 다시」 중)인 사랑을 통해, 우리는 사랑을 상실한 후조차 죽음에서 눈을 뜨듯 다시 한번 시간의 연인으로서 깨어난다. 그것은 설렘만으로도 두려움만으로도 기쁨만으로도 슬픔만으로도 맞이할 수 없는 ‘살아 있음’의 시간이다. 사랑은 시간 속에서 우리가 우리의 살아 있음으로 취하는 시간에 대한 하나의 태도일까. 사랑을 상실한 후조차 우리를 우리의 죽음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사랑의 혁명성을 회복한다.

 

※ 『서 있는 여성의 누드 / 황홀』은 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필자의 번역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 188권으로 출간되었다.

심지아
시인, 번역가, 1978년생
시집 『로라와 로라』 『신발의 눈을 꼭 털어주세요』, 역서 『서 있는 여성의 누드 / 황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