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 전에 돌아가리라 황새떼 오기 전에 돌아가리라 / 정참판네 하인들 눈 뒤집고 우릴 찾는다 해도 / 두 팔을 들어 어깨를 끼고 열이 아니다 스물이 아니다 / 빼앗긴 땅 되찾으려다 쫓겨난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 찔레꽃이 피기 전에 돌아가리라 새우젖배 오기 전에 돌아가리라 / 그 어느 한 곳 찾아 목숨 걸 건가 / 이 억센 두 주먹 불끈 쥔 채 /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두 팔 들어 어깨를 끼고 /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이 억센 주먹 불끈 쥔 채’
신경림(1935~2024) 시인을 보내는 대한민국 문인장(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024년 5월 24일)에서 고인의 시로 만든 노래 <돌아가리라>가 장내를 숙연하게 했다. 1984년 출범했던 ‘민요연구회’의 왕년 성원들이 초대 회장을 보내는 자리에서 부른 노래였다. 의분에 찬 힘찬 노래가 서럽고 따스하게 영결식장을 휘감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다양한 현장에서 불렸던 곡이다.
이 노래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지고 처음 불렸는지 아는 이는 드물다. 신경림 시인과 민요연구회의 인연을 제대로 기록한 자료들도 찾기 어렵다. 민요연구회는 1984년 신경림 시인을 초대 회장으로 모시고 출범했다. 그해 6월 16일 비가 부드럽게 내리는 날 신촌역 부근에 있는 ‘우리마당’에서 창립총회가 열렸다.
정희성 시인이 사회를 맡아 진행한 이날 대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된 신경림 시인은 “우리가 우리의 참다운 노래, 우리의 삶과 일과 놀이에서 나온 참다운 노래를 찾고 만든다는 일은 결국은 우리가 좀 더 사람답게 사는 길을 찾는 일과 같은 일”이라면서 “우리가 자존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민족이 되는 길을 찾는 일과 같은 일”이라고 역설했다. 그가 남긴 민요연구회 창립총회 인사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불리고 있는 노래의 가장 눈에 띄는 점 하나는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 밖에서 우리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만들어져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매스 미디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좋든 싫든 받아들이게끔 제도화된 것이 오늘의 우리 노래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진 채 밖에서 만들어져 주어지는 노래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창립총회 이후 매월 ‘민요의 날’이라는 행사를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서는 강연과 연행이 함께 이루어졌다. 1984년 7월 25일 흥사단 대강당에서 첫 행사를 치렀다. 「새재」, 「남한강」, 「쇠무지벌」로 하나를 이루는 신경림의 장시 「남한강」 3부작은 민요판굿(창작민요 뮤지컬)으로 1988년 4월, 6월, 8월, 3회에 걸쳐 ‘민요의 날’ 무대에 올렸다. 여기에서 나온 창작곡들 중 하나가 <돌아가리라>다.
민요판굿 <남한강> 3부작은 필자가 1988년 민요연구회 사무국장직을 맡고, 중단됐던 ‘민요의 날’을 되살려 의욕적으로 기획에 동참한 무대였다. 대본은 희곡 작가 엄인희(1955~2001)가 썼다. 1981년 경향신문,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분에 「부유도」와 「저수지」가 각각 당선되며 문단에 나온 이였다. 그가 민요연구회에 합류해 마당극 대본도 썼고, 의기투합해 <남한강> 3부작을 무대에 올렸다. 삽입된 노래들은 시를 토대로 각색했다.
작곡은 민요연구회 회원이었던 연행패 대표 김상철과 크리스천아카데미의 문홍주 선생 등이 담당했다. 이 공연에서 나온 노래 중에는 <돌아가리라> 외에도 <우리 것이다>, <목계장터> 등이 살아남았다.
선생과는 1984년 민요연구회를 매개로 만난 이래 오래 인연을 이어왔다. 그는 낮에는 민요연구회 회장이고, 밤에는 ‘뽕짝분과’ 위원장이라고 농을 하곤 했다. 사실 일본 엔카[演歌]에서 건너온 ‘뽕짝’을 극복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 형식에 담자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대중 속에 스며들어 애환을 같이해온 노래의 형식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다만 알 건 알고 부르자는 취지였고, 나아가 우리의 잃어버린 형식과 내용을 되찾자는 방향성이었다. 선생의 애창곡 중 하나는 남인수의 <추억의 소야곡>이었다. 선생은 노래를 부를 때 흥이 나면 스스로 추임새를 넣었는데 그 내용은 ‘슬프다’였다.
선생이 당시 다니던 ‘민요기행’에 필자도 가끔 동참했다. 충무항에서 배를 타고 섬으로 민요를 들으러 가던 1980년대 중반 무렵, 배에서 처음으로 ‘충무김밥’이라는 걸 맛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1988년 지리산 자락으로 떠났을 때는 노고단에서 내려올 때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의 남원 지점에 연락해 봉고차를 얻어탄 적도 있다. 그날 남원 지점에서 넉넉하게 한 끼를 대접했는데, 신경림의 민요기행 말미에 남원 지점 사람들이 조용호의 친지(親知)로 기재돼 있어서 즐겁게 웃었다.
‘비록 차로나마 노고단도 올라가 보고 또 남원에서 일하는 조용호의 친지 덕으로 ‘새집’이라는 옥호의 집에서 미꾸리찜과 미꾸리국으로 마지막을 장식한 이번 지리산 산자락 기행은 지금까지의 어떤 기행 못지않게 즐거웠다.’(《월간경향》1988.8)
선생과의 인연은 필자가 일간지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속됐다. 시집 『사진관집 이층』(2014, 창비)이 나오던 해 인사동에서 만나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마지막 인터뷰이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선생이 시집을 내는 터울이 5~6년 정도여서, 당연히 후속 시집이 나오려니 생각했고 실제로 선생에게 물을 때마다 정리하는 중이라는 답이 돌아오곤 했으니 이후 선생 생전에 시집을 만나지 못하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인데, 끝내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가셨다. 유고시집을 준비 중이라고 하니, 이후 작품들을 볼 수 있을 터이지만 선생의 염결(廉潔)한 시선으로 정선한 시집을 보지 못한 것은 내내 아쉽다. ‘마지막 인터뷰’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당시에는 세세하게 쓰지 못했거니와, 다시 그때 녹취록을 들춰보니 새삼 애잔하게 눈에 밟히는 내용이 많다.
그날 선생은 “사람 사는 게 슬픈 거 같다”면서 “뜻대로 사는 사람이 별로 없고, 뜻대로 살아도 별것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시로 일가를 이루신 거 아닌가?) “시를 어느 정도 썼을지는 모르지만 내가 인생에서 즐거움은 맛본 게 하나도 없거든. 내가 한 게 뭐 있어?” (연애 시들도 있는데?)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거지, 실현된 거는 없었어.” (시인으로서 존경받고 사랑받는 건?) “그건 행복할 수 있지만 그 밖에는 행복이라는 건 모르고 살아왔어.” (가장 그리운 대상은?) “어머니지 뭘… 아버지에게는 못되게 굴었어. 고약한 아들이었지.” (일찍이 사별한 아내 얼굴은 기억나시는가?) “그거야 기억하는데 가난하게 살던 거밖에 생각나지 않아.” (다음 시집은 언제?) “그렇게 늦게까지 시를 쓴다는 게 과연 행복할까. 너무 오래 살고 오래 글을 쓴다는 것도 재앙이야. 반드시 좋은 거만은 아닐 거야.”
염무웅 장례위원장의 조사가 선생의 늘 겸손하고 염결했던 품성을 대변한다.
“선생님은 이름난 시인이 되고 난 다음에도 유명인 행세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1970~80년대 군사독재 시절 시달리면서 스스로 민주 인사임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일체의 영웅주의가 없었습니다. 전위에 나서지 못한다고 자신의 비겁함을 스스로 질책했지만, 그러나 결코 뒷전의 방관주의자나 불평분자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은 시에서 자신의 잘난 모습보다 못난 모습을 더 자주 묘사했습니다. 독자들은 선생님의 그런 작품에서 자신의 감추어진 모습을 보고 용기와 위안을 얻었습니다.”
선생을 보내는 자리에서 그가 남기고 간 시편 「낙타」가 두 번이나 소환됐다. 정희성 시인은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홀연히 이 메마른 세상을 떠나가셨다. 먼 길 길동무 하나 없이 홀로이 가셨다”고 조시를 낭독했고, 민요연구회 소리꾼 김애영은 문인장 전날 밤을 새워 작곡한 <낙타>라는 창작민요를 불렀다. 흥겨운 듯 서러웠다.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 별과 달과 해와 /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 손 저어 대답하면서 /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 별과 달과 해와 / 모래만 보고 살다가, /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서 / 길동무 되어서.’ - 「낙타」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