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피로 얼룩진 진보의 역사를 되짚다

- 류츠신의 소설 『삼체』와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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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년 가을호 (통권 93호)
피로 얼룩진 진보의 역사를 되짚다

- 류츠신의 소설 『삼체』와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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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하지 마라! 대답하지 마라! 대답하지 마라!”

천체물리학자 예원제는 외계 문명 탐사를 전담하는 중국 홍안 기지에서 일한다. 그녀는 외계 문명에 공산당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다. 다만 기지 레이더로 쏘아 올린 신호는 우주에서 차츰 약해지기에 외계 문명에 전달되지 않는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 셈이다. 오래 생각한 끝에 그녀는 태양을 전파 증폭 장치로 삼는 독창적인 가설을 설계한다. 한때 촉망받았던 물리학자 부부로 활동한 부모의 천재적인 재능을 물려받은 덕이다. 이 가설이 입증된다면 태양이 신호를 증폭시키기에 쏘아 올린 신호가 무사히 외계 문명에 전달될 수 있다. 가설을 입증하려는 찰나 기지 내부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실험을 거부한다.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태양에 전파를 쏘아 올린다.

그로부터 8년 뒤, 오밤중에 미지의 외계 문명으로부터 “대답하지 마라!”로 시작하는 회신이 도착한다. 거기엔 메시지에 응답하는 순간 지구를 침공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경고가 새겨져 있다. 홀로 깨어 있던 예원제는 흥분감에 사로잡힌다. 이윽고 누구한테도 보고하지 않은 채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외계 문명에 응답한다.

 

“이곳에 오십시오. 나는 당신들이 이 세계를 얻는 것을 돕겠습니다. 우리의 문명은 이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잃었습니다. 당신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 류츠신의 『삼체』 311쪽

그녀는 왜 외계 문명의 침공을 반기며 인류를 배신했을까. 『삼체』는 파멸에 이르는 인류를 구원할 재능이 있음에도 인류애를 상실하고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가는 과학자 예원제의 비극적 삶을 파고든다. 작가는 그녀의 행보를 통해서 “도덕이 있는 인류 문명은 이 우주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려 한다.

2024년 4월에 공개된 넷플릭스 8부작 드라마 〈삼체〉는 류츠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의 명성이 자자한 덕에 공개되기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2008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류츠신의 『삼체』는 중국에서 3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다. 2013년에는 『종이동물원』을 쓴 SF 작가인 켄 리우의 번역으로 영미권에 출간된다. 출간되자마자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등 유명 인사의 극찬에 힘입어 영미권에서만 100만 부, 세계적으로는 900만 부가 팔렸다. 2015년에는 아시아권 작가 최초로 SF 장르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휴고상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화제작을 프로듀서가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다. 2018년에 아마존에서 큰 금액인 1억 달러(한화 약 1,362억 원)로 판권을 제안했지만 깜깜무소식이었다. 2년이 흐른 뒤에야 넷플릭스에서 판권을 구해서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HBO에서 〈왕좌의 게임〉을 제작한 D&D(데이비드 베니오프와 D.B. 와이스)가 제작자로 참여해 또 화제를 모았다. 지금은 시즌 1의 인기에 힘입어서 시즌 2와 3의 제작이 확정되었다. 이처럼 2010년대 『삼체』만큼 대중과 평단에서 고루 스포트라이트를 한꺼번에 받은 SF는 드물 것이다. 30만 명을 동원한 인간 컴퓨터라든지 나노 섬유로 심판일 호를 자르는 작전 등 독창적인 이미지와 중국 현대사와 SF를 오가는 비판적인 상상력, 코즈믹 호러 풍 서사는 그 어느 SF와도 견주기 힘든 장점이다. 물론 『삼체』가 단점이 없는 작품은 아니다. SF 팬 사이에서는 물리학 이론을 편의적으로 왜곡했고 그 탓에 오류가 잦아서 하드 SF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작품으로 되돌아오자. 드라마 <삼체> 시즌 1은 6화까지 『삼체』 1권을 바탕으로 한다. 7, 8화에는 계단 프로젝트 등 2권과 3권에 전개될 내용이 소개된다. 1권이 작품의 핵심인 셈이다. 『삼체』 1권은 나노 소재를 개발하는 과학자인 왕먀오를 중심으로 세 갈래의 사건이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하나는 ‘과학의 경계’라는 학술 단체와 관련된 물리학자가 연달아서 자살하고 왕먀오의 눈앞에 의문의 카운트다운이 어른거리기 시작하는 사건이다. 다른 하나는 자살한 물리학자가 접속했던 삼체라는 가상 게임이다. 마지막은 비밀스러운 예원제의 과거다. 다소 산만하게 교차하던 이야기는 예원제의 과거사가 전면에 드러나면서 하나로 모인다.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 예원제임이 드러난다.

예원제는 문제적 인물이다. 물리학자로의 신념을 지키려 했던 아버지 예저타이가 문화 대혁명 당시 홍위병에게 구타당해서 죽는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한 뒤 악인으로 변해가서다. 물론 그녀의 삶은 비참하다. 아버지가 홍위병에게 죽은 것으로 모자라서 반동분자로 낙인찍혀서 정부의 감시 대상이 된다. 물리학자라는 꿈은 좌절당했고 벌목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인류가 저지르는 환경파괴에 절망한다. 감시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간 홍안 기지에서는 아버지가 죽을 때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사상으로 과학을 재단하는 상부에 환멸을 느낀다. 예저타이를 죽인 가해자는 자신도 문화 대혁명의 희생양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사죄하지 않는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그녀는 인류애를 상실하고 인간 본성이 악하다는 원념(怨念)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외계 문명에 응답하고 400년 후 지구에 도착할 외계 문명 삼체를 숭배하는 종교 집단의 교주가 되어서 인류에게 복수를 감행한다. 예원제의 감정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품었을 법한 감정이다. 나날이 심해지는 기후위기,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 범죄, 걷잡을 수 없이 발전하는 테크놀로지와 그 폐해를 마주할 때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한가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작가는 성악설이라는 관성을 벗어나려 애쓴다. 이야기의 후반부에 이르러 예원제도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진실이 드러난다. 그녀는 모든 생명체가 동등해야 한다는 “종의 공산주의”를 외치는 극단적인 환경운동가 마이클 에번스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일찍이 차단함으로 400년 뒤 지구를 차지하려는 삼체 문명의 큰 그림 중 일부에 불과했다. 『삼체』엔 예원제와 닮은꼴이 수두룩하다. 문화 대혁명의 열기가 꺼진 이후 자신이 틀렸음에 절망하는 청년, 삼체 문명이 파견한 양자컴퓨터 ‘지자’의 방해로 과학적인 사실이 틀렸음에 절망해서 자살하는 과학자 등 그들은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삶의 이유를 상실하고 이를 수긍하는 거대 담론의 희생양이다. 마찬가지로 삼체 문명이 “너희들은 벌레다!”라고 겁박할 때도 그들은 기어이 고개를 조아릴 것이다. 다만 소설 속 인물과 작가는 이에 절망하지 않으려 한다. 소설이 끝날 무렵 인류가 아무리 발전해도 벌레가 멸종되지 않듯 삼체 문명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류는 저항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태도를 매미 떼의 이미지로 드러낸다.

드라마 〈삼체〉 시즌 1은 여러모로 원작의 한계를 상쇄하려고 노력한다. 잘 된 소설 각색이라기보다는 재밌게 만든 각색에 가깝다. 우선 전 세계에 스트리밍되는 넷플릭스 플랫폼에 맞추어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야기를 영국을 배경으로 각색했다. 이에 따라 왕먀오 등 여럿 캐릭터의 이름이 영국식으로 전환되었다. 서구 중심적 각색이라 비판을 당해도 반박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노골적이다. 다만 존재감이 희박했던 왕먀오의 원맨쇼에 가까웠던 소설과 달리 드라마에서는 다섯 캐릭터가 등장한다. 각 캐릭터의 설명이 부족한 데다가 대사가 날것이라는 인상이 들기는 해도 무겁고도 암울하기 짝이 없는 소설의 톤에 유머를 더한 점은 괜찮다. 다섯 과학자가 연기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최악까진 아니어서 아무런 무리 없이 볼 만하다. 소설과 드라마 모두 권할 만한 이유다.

드라마가 더 훌륭한 지점은 산만한 전개를 정리한 스토리다. 카운트다운을 추적하는 왕먀오의 여정을 최대한 축소한 다음 예저타이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해 예원제의 과거를 이야기의 중심에 과감히 배치해서 이야기의 뼈대가 생긴다. 과학적 서술이 이어지는 하드 SF의 개성을 줄이고 이를 비주얼로 그려내려는 점도 인상적이다. 특히 큰 눈동자를 연상케 하는 ‘지자’의 비주얼화는 원작 속 ‘지자’의 전지전능함을 더욱 강력하게 그려내는 데에 일조한다. ‘지자’의 힘은 비주얼화가 아니었더라면 잘 와닿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칭찬할 만한 것은 작품의 스펙터클이다. 소설 속 게임에 등장하는 30만 명이 동원된 인간 컴퓨터는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5화에 등장하는 나노 섬유로 심판일 호를 자르는 작전이 원작에 비하더라도 손색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특히 인간을 서슴없이 죽이던 〈왕좌의 게임〉 제작진답게 피칠갑된 비주얼은 원작 소설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기괴한 쾌감을 선사한다.

김경수
영화평론가, 《씨네21》 객원기자, 1995년생
저서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