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양철학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 교양철학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오늘날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너무 많은 업무, 쉴 새 없이 울리는 SNS, 실업에 대한 공포 등을 마주하면서 불현듯 떠오르는 질문이다. ‘난 왜 사나?’라고 묻지 않는다면 정신질환을 앓을 것이다. 오늘날을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멜랑콜리한 시대’라고 말한 철학자도 있다. 그러니까 근원을 알 수 없는 우울감이 이 시대를 지배한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이 느낌을 포착했다.
그는 1818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출간한 뒤 해설서로 1851년 『소품과 부록』을 내고 일약 지성계의 스타가 된다. 이 책은 시중에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으로 나와 있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해설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오랜 시간 인간 행복의 조건에 관심을 가져온 철학자다. ‘마음의 위기를 다스리는 철학 수업’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잠언을 통해 고통과 행복의 의미를 되새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57장 첫 단락에는 인간이 처한 냉혹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무한한 공간과 시간에서 인간 개체는 자신이 유한하다는 것을, 따라서 저 무한한 공간과 시간에 비해 미미한 크기로 그 속에 내던져진 것임을 알게 되고, 시공의 무제한성으로 인해 인간 개체의 현존에는 단지 상대적인 언제와 어디만 있을 뿐, 절대적인 언제와 어디는 없다.’
인간은 유한하고, 미미하고, 제한적이며 상대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인간은 결국 죽음을 향해 간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에게 인간의 본질은 맹목적인 삶에 대한 의지이다. 그런데 삶에 대한 의지는 죽음으로 꺾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고통스럽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우리는 모두 고통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서양 전통에서 행복은 선한 것, 고통은 악한 것으로 간주한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을 가리키는 말로 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는 ‘선한=eu’과 ‘신=daimon’이 합쳐진 말이다. 행복은 신적인 것이 잘 갖춰진 상태로, 인간이 훌륭한 기질과 일상의 습관을 다듬어 나갈 때 성취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타인과도 적절히 어울릴 줄 아는, 나아가 가정경제(오이코스)를 잘 지키는 남성 시민이야말로 행복을 성취한 존재이다.
오늘날 왜 우리가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에 흥미를 갖게 되는가를 짐작해 본다. 우선 경제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이 많다. 가정을 원만히 돌볼 만큼의 경제력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다. 많은 자료가 이른바 ‘인 서울 7대 대학’이나 의약학 계열, 교육대학 등 주요 대학을 나온 청년과 그렇지 못한 청년 간에 경제적 격차가 어떻게 벌어지는지 보여준다. 20대 초반에 받을 수 있는 대출 금액과 인맥에 큰 차이가 나는 이들 두 그룹은 40대에 이르면 두 배 가까운 월급 차이와 그 이상의 자산 격차를 경험한다.
외로운 사람들이 늘고 있다. 젊을수록, 가난할수록, 혼자 살수록 외로움을 더 크게 느낀다. 19세기 말부터 유럽 사람들은 집단으로 외로움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으로 도시 인구가 급증하면서 실업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실업 상태가 되면 자리를 잃고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외로움을 겪는다. 다음으로 업무능력과 사회성을 두루 갖추면서 자기돌봄에도 소홀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효율적으로 업무처리를 하면서 다른 사람과도 원만히 지내라고? 업무처리에도, 사람과의 관계 맺기에도 시간과 기술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언제 돌보나? 내가 원하는 것은 어디에서 찾지? 현대인에게 삶에 대한 의지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고대의 극히 일부 시민들만 누리던 행복을 누구나 누릴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이 고통에 관해 이야기한다. “하나의 고통은 열의 쾌락에 맞먹는 힘을 가졌다.” 저자는 쾌락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보다 고통과 결핍을 잘 피하는 것이 ‘쇼펜하우어식 행복’이라고 말한다. 행복은 결핍을 충족한 것이기에 근본적으로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행복의 최대치는 결핍을 피한 상태다. 반대로 물건이나 건강을 잃고 나면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현자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에는 늘 쾌락이 동반된다. 그러나 그것은 신적인 것, 평범한 인간이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고통을 직시하고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민하는 편이 평범한 인간의 삶에 맞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덜 불행하게 살 수 있는 용기가 있고, 고통을 그럭저럭 견뎌내면서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 재난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질환이 있는 가족을 돌보는 사람들, 전 재산을 사기당한 사람들, 억울한 누명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말 못 할 사정으로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과연 고통을 견디며 묵묵히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허무주의에 불과한 것인가? 저자는 이 질문 앞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