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그건 가끔 기분이 행동을 앞서던 엄마가 우리 집의 가난을 잊고 내게 선사하던 사치품이었다. 『검정 고무신』 속 기영이가 바나나를 먹고 감탄하듯 나도 바나나스플릿 맛 구슬 아이스크림을 먹고 감격했다. 한 입 한 입 먹으며 생각했다. 구슬 아이스크림은 왜 비쌀까. 찾아보니 영하 40도 이하에서만 알알이 살아있어 만들기도, 보관하기도 번거로운 탓이라고 했다. 만드는 법에 특허도 없는데 만드는 이가 드문 아이스크림. 마음만 먹으면 나도 내 이름을 내건 구슬 아이스크림 회사를 차릴 수 있다는 점이 무서웠다. 아무도 모르게 실패한 사람이 많을 테니까.
마감이 코앞인 에세이를 미뤄두고 몰래 소설을 쓸 때마다 구슬 아이스크림 회사를 차리는 기분이다. 작가가 만드는 소설 속 세계는 꼭 색과 맛이 다르기에. 바나나, 초콜릿, 딸기, 정체 모를 하얗고 파란 맛이 섞여 진득하고 또 달콤해야 하는데 배합이 어렵다. 진실한 맛이라도 담아야 할 텐데 내가 겪은 건 초콜릿의 ‘ㅊ’뿐이라 난감하다. 바나나는 친구의 삶으로부터, 딸기는 엄마의 삶으로부터, 심지어 허옇고 퍼런 맛은 지하철 맞은편 초면인 언니로부터 가져오고 싶다. 그래도 될까. 어렴풋이 본 장면, 다 알지 못하는 사실로 애써 알록달록한 구슬을 만들 바에는 아예 연상하지 않는 게 좋다. 함부로 남의 삶을 가져와 한 통에 담아 팔 수는 없다. 책이 참 그렇다. 도서관에 있는 내 책이 나보다 오래 살 수도 있다. 죽고 나서 산 사람처럼 욕먹을 수 있다는 불안은 어떤 책임을 낳는다.
그러고 보면 ‘소설 쓰고 앉아 있네’라는 욕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덜컥 들고 온 남의 것으로 허무맹랑한 세상의 조물주인 척을 하는 건 앉아 있는 짓이다. 작가는 소설을 쓰고도 서 있어야 한다. 차라리 서서 소설을 써야 한다. 떳떳하게 서 있기 위해 우선 내 주변을 겨냥하는 글부터 쓰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고백하건대, 남들이 아프거나 슬플 때 유심히 들었다. 애써 기억해뒀다가 다른 곳에서 그들의 얼굴을 떠올린 적이 나도 많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허락받을 자신이 없어 지웠다. 기꺼이 써도 된다고 해준 사람들만 내 책에 담았다. 그 과정에서 아까워 죽겠는 문장들도 그냥 죽였다. 내 안경으로 남의 세계를 빤히 들여다보는 것, 남의 세계를 침범해 나의 말뚝을 박고 규정짓는 것. 태연히 남의 삶을 빼앗아 놓고 내가 상상한 그늘인 척하는 것. 그런 순간들을 아차 내가 작가여서, 내가 하는 게 예술이어서라고 눙치지 않으려 했다. 모두에게 상처 주지 않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 글은 아예 쓸 수 없는 걸까. 사실 쓸 수 있는데 노력을 덜 한 것만 같았다. 작가라는 타이틀에 자아가 비대해진 것은 아닐까.
나의 말맛을 나의 세계에서만 추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 세계에 옹졸한 단물을 남겨둔 채 남의 세계로 건너가는 건 비겁한 짓이다. 남이 먹어본 맛, 남들이 다 아는 맛, 내 친구, 내 엄마, 내가 모르지만 사랑할 수 있는 누군가의 맛 말고. 내가 먹어봐서 안다고 말할 수 있는 당당한 상황, 타당한 맛이 속 편한 맛이다. 당사자성을 영하 40도 이하까지 담갔다가 빼 반질반질 윤이 나게 굴리는 일. 모니터 앞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쓰고 지우는 일. 그 일이 내 일이 되어 기쁘다. 쓰다가 지우고 싶지 않을 때 또 읊조린다. 대뜸 내 것인 양 섞지 말자. 뻔뻔하게 포장하지 말자. 쓰면 안 되는 것들을 더 오래 생각하고 한두 줄,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