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숲속에 위치한 리조트에 가기로 했다. 넷이 모여, 집에 가야 할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함께 노는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우리가 대학 내 답사 동아리에서 만나 어울려 지내던 시절에는 같이 여행을 다니는 것도 아주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모두 40대 후반을 향하고 있었고, 1년에 한 번 만나는 것조차 어려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앙금이 쌓였거나 다퉈 사이가 틀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대부분의 이 나이대 사람들이 그러하듯 각자의 인생을 사는 데 바빴을 뿐. 우선 오랫동안 독일에서 유학했던 주미는 이제 캐나다에서 아르헨티나 출신 남자와 살고 있었다. 외국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며 사는 주미를 보기가 힘든 건 당연했지만 같은 한국 하늘 아래 살더라도 결혼해 신도시에서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소희와 결혼을 안 한 나나 다혜 사이엔 예전만큼 접점이 많지 않았다. 정규직 회사원인 다혜와 프리랜서 통역가인 나의 일상이 겹치기도 힘들었고. 넷이서 마지막으로 다 같이 시간을 보낸 게 언제더라? 어쩌면 11년 전, 그 사고 이후 주미가 한국을 방문한 걸 계기로 새로 분양받은 소희네 집에 집들이 겸 갔을 때가 마지막이었을지도 몰랐다. 2년 전 다혜 아버지의 장례식이 주미를 뺀 나머지 셋이라도 함께 했던 마지막 기억이 되었을 수도 있으나안타깝게도 그 자리엔 내가 참석하지 못했다. 당시 나는 갑작스러운 염증 반응으로 온몸이 퉁퉁 붓고 고열에 시달려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온갖 검사를 하고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의사는 스트레스와 긴장 탓일 것 같다며 일을 줄이라고 권했지만, 나는 끝내 줄이지 못했다.
주미가 방학을 맞아 귀국했을 즈음 나는 몇 달째 알 수 없는 무기력증에 시달리며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었다. 아침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들어 몇 시간 동안 천장을 보며 누워 있는 날들이 계속되었는데, 그건 그때까지 내 인생에는 없던 일이었다. 나는 그 누구도 강제한 적 없지만 언제나 새벽 5시에 알람을 맞추고 일어났다. 깨자마자 공복에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마신 후 조깅을 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샤워를 한 다음 한국어로 된 신문을 정독하거나 영어로 된 뉴스를 보며 언제고 일거리가 주어졌을 때를 대비해 어휘와 표현을 공부했다. 젊은 나이에 경제적 자유를 얻었다고 말하는 유튜버의 동영상을 우연히 본 이후에는 짜투리 시간에 경제 관련 책을 읽었고,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인생의 동력을 잊지 않기 위해 노트에 목표와 나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적었다. 나는 끊임없이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건 미래가 불안정한 프리랜서 통역사의 삶을 선택한 이상 기꺼이 감내해야 하는 일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어느 날, 스스로를 다그치는 것이 직업과 무관하게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지니고 있는 삶의 태도라는 깨달음이 느닷없이 나를 찾아왔다. 내 상태를 걱정하기 시작한 애인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상담자는 안경을 손끝으로 올리며 그것이 나의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 생각해보면 그건 일정 부분 맞는 말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정주부였던 엄마를 잃은 이후, 나는 내가 엄마의 삶이 유의미했음을 세상에 알려줄 유일한 증거라고 믿었고 ― 나와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존재만으로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아 왔으나, 삼수를 하고서도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지도 못했고, 지금껏 변변한 직업조차 갖지 못한 채 오십 대가 되어버린 오빠가 아니라 내가 ―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썼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서 무기력증에 시달리며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하지 않게 느껴지거나, 인생의 활기를 마법처럼 되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혜가 단체 채팅창에 주미가 모처럼 아이도 없이 혼자 한국에 와 머무는데 1박 2일 호캉스를 하러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을 때 나는 썩 내키지 않았다. 주미가 3년 만에 귀국한 것인데도. 그만큼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귀찮기만 했고, 어디를 가기는커녕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애인은 무기력할수록 다녀와야 한다고 나를 독려했다. “기분 전환이 될 거야.” 그러려나. 마음이 조금 동하긴 했지만 내가 마침내 좋다고 메시지를 보낸 건 애인의 독려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다혜 아버지의 장례식이 이맘때였다는 것을 다행히 기억해냈고 가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을 이런 식으로나마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묵기로 한 숙소는 겨울엔 스키객으로, 한여름엔 워터파크 이용객으로 붐비는 리조트였다. 다혜가 회사를 통해 꽤 좋은 객실을 매우 합리적인 가격으로 예약할 수 있는데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을 때, 어차피 만나서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 게 목적인 호캉스 계획이었으므로 누구도 반대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우리는 계획대로 6월의 어느 주말, 차량 두 대에 나눠 타고 리조트로 떠났다. 여행을 떠나기 전엔 오랜만에 다 같이 붙어 지내는 게 어색하지 않을까 우려가 됐는데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그런 걱정을 한 게 무색해졌다. 한강이 반짝이고 녹음이 우거진 풍경을 차 안에서 내다보다 보니 오래전 함께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고 떠났던 여행의 기억이, 그때의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