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뿌옇게 밤안개가 서려 있었다. 어디선가 습기를 머금은 쿰쿰한 냄새가 났다. 오른쪽 어깨에 멘 백팩이 자꾸 흘러내리는 바람에 영희는 짐을 내려놓고 잠시 멈춰서서 가방을 양쪽 어깨에 다시 멨다. 손목을 움직였더니 애플워치에 불이 들어왔다가 꺼졌다. 9시 37분. 가방 안에는 노끈과 텀블러, 그리고 조금 아까 주유소 옆 편의점에서 산 육포와 젤리가 들어 있었다.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육포의 포장 비닐 때문인지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게 거슬렸지만, 양손에 1갤런짜리 생수통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른 건 아니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편의점에 들른 일은 영희 입장에서는 큰 의미 없는 일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건 일종의 배려였다. 나중에 영희가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그의 동선이 필요한 사람들이 금방 확인할 수 있도록. 편의점에서 물건을 계산대에 올려놓는 모습은 영희의 마지막 행적으로 기록될 예정이었다. 가게에 들어가서 성의 없이 대충 고른 물건들을 계산대에 올려놓으며 영희는 눈으로 어딘가 있을 카메라를 찾았다. 대각선 천장 구석에서 카메라의 동그란 렌즈와 눈이 마주친 순간 반가운 마음에 브이라도 해 보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미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서였다. 영희는 죽은 사람이 되려는 거지 미친 사람이 되려는 게 아니었으니까. 영희는 육포와 젤리만 계산하고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1갤런짜리 큰 생수통 두 개를 샀다. 정말 필요한 것들은 항상 뒤늦게 떠오르는 법이다.
차는 강 입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웠다. 할부 없이 전액 현금으로 산 지 얼마 안 된 은색 프리우스였고 그래서 조금 아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차 키 두 개 중 하나는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 음료 넣는 공간에 넣어두었고, 나머지 하나는 가방 속에 있었다. 둘 중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새로운 차 주인이 될 거였다. 만약 그게 경찰이라면 어떻게 될까? 영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곧 자신이 할 필요 없는 걱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알아서들 하겠지. 산 사람들이.
2
노 바이시클,
롤러 블레이드,
스케이트보드
온 더 보드워크.
영희는 표지판에 적힌 경고 문구를 읽었다. 요약하면 보드워크 위에서 바퀴 달린 것을 타지 말라는 얘기였다. 여기에서 과연 그런 걸 타는 사람이 있을까? 경고 문구들은 언제나 쓸데없는 것들만을 경고한다고 영희는 생각했다. 동시에 자신이 하려는 일은 경고 문구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노 스모킹 표지판 앞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영희는 강 쪽으로 뻗은 도크 끝에 다다랐다. 걸을 때마다 나무판자로 된 바닥이 위아래로 진동하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밤의 강물은 어둡고 탁했다. 가까이 갈수록 미세한 비린내가 느껴졌다. 깊이가 얼마나 될까? 영희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곧 알게 되겠지. 차 트렁크에서 가지고 온 노끈을 가방에서 꺼내 생수병과 연결하고 다시 두 발에 한쪽씩 감아 매듭으로 세게 묶으며 영희는 생각했다. 몇십 미터쯤 떨어진 상류 쪽 도크 위에서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십 대처럼 보이는 몇몇이 둘러앉아 이야기인지 싸움인지 모를 것들을 나누고 있었다. 뭘 끓이는지 그들 사이로 희미하게 연기가 피어올랐다.
모든 준비가 끝난 다음 영희는 백팩에서 녹색 텀블러를 꺼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길목에 있는 던킨도너츠에서 사 온 커피였다. 영희는 컵으로 쓸 수 있는 뚜껑을 뒤집어 커피를 담아 한 모금 마셨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달콤하면서도 끝이 씁쓸한 액체가 입안을 잠깐 맴돌다 식도로 넘어갔다. 그러자 아주 잠깐이지만 놀랍게도 그때의 시공간, 그 시절의 던킨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추억의 던킨. 공부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친구를 만나고, 연애를 하고, 도넛을 먹고, 엎드려 자고, 멍하니 창밖으로 끝없이 지나가는 차들의 행렬을 바라보던 곳. 엄마와 아빠가 크게 싸웠던 날에는 몰래 911을 부르고 한밤중에 집에서 거기까지 40분을 걸어간 적도 있었다. 시럽을 잔뜩 넣은 던킨 커피와 슈크림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려 있는 보스턴 크림을 먹으며 대체 나는 왜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을까 신세를 한탄하던 밤이 사실은 그나마 행복한 날이었다는 것을 영희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적어도 그때는 아빠가 엄마를 죽이지 않았으니까.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학에 가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영희는 비로소 자신이 해방되었다고 느꼈다. 끔찍한 아빠로부터, 지긋지긋한 엄마로부터, 태어나 평생 살아온 조지아로부터. 하지만 첫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고 비행기를 타고 집에 돌아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감옥에 끌려갔다. 경찰은 아빠가 엄마를 총으로 세 번 쐈다고 알려줬다. 집은 텅 비어 있었고 곳곳에는 다 지우지 못한 혈흔만 남아 있었다. 한때 엄마의 몸을 힘차게 돌고 있었을 검붉은 핏방울들은 누군가 대충 쓰다만 편지 같았다.
아빠는 군인이었다. 톰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그는 미국 원주민과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고 군 생활은 주로 한국에서 했다. 언젠가 아빠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10대 때 일찍 고아가 되는 바람에 자신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했다. 군인이 되었고 남들이 가장 꺼리는 지역 중 하나인 한국에 갔고 거기서 만난 한국 여자와 결혼했다. 아빠는 한국에서 여자를 만나는 대부분의 개새끼(아빠는 자기 동료들을 그렇게 불렀다)들과 달리 자신은 약속을 지켰다고 했다. 그 말을 할 때 아빠의 얼굴은 매번 우쭐대는 것처럼 솟아올랐다.
식어가는 커피를 마시며 영희는 생각했다. 아빠는 엄마에게 뭘 원했던 걸까? 아빠는 그저 자신이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 다른 군인들과 달리 사귀던 여자를 미국으로까지 데려와 책임졌다는 사실 그 자체에만 자부심을 느꼈던 걸까? 실제로 엄마가 어땠는지를 살피는 게 아니라? 엄마는 또 어땠을까? 태어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자신이 어떤 생활을 할 거라고 기대했던 걸까? 미국이라는 나라에 환상이 있었을까? 아니면 그저 아빠를 믿었던 걸까? 혹은 자기 자신을?
알 수 없었다.
대답해 줄 사람들은 감옥에 있거나 세상에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모두 더 이상 영희의 세계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한 건 그들 사이에서 영희가 태어났고, 그의 존재는 둘 사이를 더 어렵고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아빠는 엄마를 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미국에 온 뒤로는 엄마를 방치한 나쁜 사람이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곳에서 혼자 어린 영희를 키우며 엄마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종종 이혼을 요구했지만, 아빠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응하지 않았다. 영희가 학교에 가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엄마는 일을 시작했다. 한국 사람을 상대로 하는 바에 나가서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었다. 엄마한텐 그게 가장 익숙한 일이었고,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차츰 옷과 술에 쓰는 돈이 늘어갔고 그게 어느 순간 아빠를 건드렸다. 마침내 엄마에게 한국인 남자친구가 생겼을 때 아빠는 누적된 분노를 드러냈다. 싸우는 일이 잦아졌고 욕설과 물건과 주먹이 오갔다. 영희가 걸어서 던킨을 오가던 시절이었다. 남부 캘리포니아의 학교 도서관에서 영희가 한창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 아버지 톰은 그날 훈련에서 사용한 권총을 부대에 반납하지 않고 도넛 박스에 숨겨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저녁으로 한국식 김치찌개를 끓이고 있던 엄마를 쐈다. 탕, 탕, 그리고 탕.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아빠는 엄마의 심장에만 세 발을 발사했다. 왜 그랬을까? 군인으로서의 본능일까? 확인 사살? 단 한 발만으로도 엄마를 죽이기엔 충분했을 텐데. 그 말 없는 과잉이 영희에겐 오랫동안 의문으로 남았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야 영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아빠는 실제로 세 명을 쏜 거라고. 한 발은 엄마에게, 한 발은 다른 남자에게, 마지막 한 발은 아빠 자신에게.
3
죽기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다가 뉴저지 남부 해안에서 톰스 리버라는 지명을 찾았을 때 영희는 어떤 짜릿함을 느꼈다. 아빠의 강이라니. 기묘하고 우스꽝스러운 우연의 일치였다. 영희는 전혀 모르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지만 자신의 마지막 장소가 여기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생이 나에게 엿을 먹인다면 나도 인생에 엿을 먹여야지.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을 수 있나.
죽을 만큼 괴롭거나 고통스러운 건 아니었다. 영희가 생각하기에 가장 어두운 터널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왔다. 하지만 왜 꼭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죽어야 하나? 막다른 골목에서는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하다.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살게 된다. 그런 때 내린 결정이 좋은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나? 영희는 자신의 존재와 존엄을 다루는 선택이 상황에 의해 왜곡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니던 IT 회사에서 팀장으로 승진하며 이직에 성공하고, 사이닝 보너스를 받고, 새 차를 출고하고 이층집으로 이사한 뒤 영희는 차분히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고,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이 죽기 가장 적당한 때라는 결론을 내렸다. 죽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를 다 해결해 버린 것이 그 이유였다.
영희는 엉덩이를 조금씩 앞으로 내밀었다. 강물 쪽으로 상체가 휘청거릴 때마다 몸 깊숙한 곳에서 아드레날린이 솟아올랐다. 안녕. 영희는 엄마가 아침저녁으로 입버릇처럼 말하던 인사를 중얼거렸다. 안녕, 우리 딸. 그때 뒤에서 데크가 울리는 발소리가 났고, 엉덩이를 끝까지 밀어 떨어지려던 영희는 순간적으로 데크 끝을 붙잡았다. 나무의 거칠한 표면이 손바닥을 아프게 찔렀다. 1갤런짜리 생수통도 반쯤은 데크 밖으로 나와 있었다. 영희는 떨어지려는 생수통 손잡이를 거머쥐었다.
“여기 있어도 돼요?”
영희는 뒤를 돌아봤다. 검은 머리, 갈색 눈동자의 남자아이가 두세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열 살이나 되었을까? 영희는 아이들의 나이를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더 뒤에서는 누나처럼 보이는 조금 더 큰 여자아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영희와 남자아이 쪽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한 번 더 물었다.
“그래도 돼요?”
대답을 고민하기도 전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쉬 새드 오케이.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를 쳐다보며 그것 보라는 듯이 말했다. 여자아이는 데크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된대!”
한국말이었다.
4
데크 끝에서 다가오던 그림자가 선명해졌다. 청년이라기엔 성숙해 보이고, 중년이라기엔 앳되어 보이는 얼굴의 아시안 부부였다. 영희의 비슷한 생김새 때문인지 그들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한국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한국분이세요?”
영희는 티 나지 않게 노끈을 풀다가 자기도 모르게 영어로 노, 라고 대답했다. 아차 싶었다. 아니라고 말한다는 건 알아들었다는 뜻이잖아. 그러나 물었던 남자는 그 미묘한 맥락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바로 영어로 전환했다.
“미안합니다. 저희가 아직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괜찮아요.”
마침내 끈을 다 풀어낸 영희가 대답했다. 영희는 앉은 채로 몸을 데크 쪽으로 돌렸다. 옷 속으로 땀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지만, 마음은 한결 홀가분했다.
“게 잡으러 오셨나 봐요?”
게? ‘크랩’이라는 명사와 ‘피시’라는 동사를 듣는 순간 영희는 뭔가 깨달은 사람처럼 아, 하고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여긴 게 낚시를 하는 곳이구나. 자신이 톰스 리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음이 드러난 순간 영희는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처음부터 자살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냥 산책 나왔어요.”
얼마나 그럴듯하게 들릴지는 몰랐지만, 영희는 너무 이상하게 들리지만 않기를 바라며 말했다. 집이 근처라서요, 하고 부연할 때는 거의 애원하는 심정이었다.
“방해해서 미안해요. 원래 저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보시다시피 먼저 온 손님들이 있어서요.”
남자는 위쪽 데크의 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남자 주위에서 소란스럽게 움직이던 남매는 벌써 게 낚시 도구들을 꺼내 손에 하나씩 들고 있었다.
“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영희는 말을 하면서도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오늘은 그냥 틀렸다고 생각하고 포기할까? 자연스럽게 장소를 옮겨볼까? 아니면 이 가족이 갈 때까지 기다려볼까?
애틀랜타에 있는 집에 돌아가려면 다시 13시간을 운전해야 한다. 집에는 짧은 유서가 있고, 다 치우지 못한 짐과 쌓여있는 설거지 같은 일상의 흔적이 있다. 이제 밤 10시였다. 다시 돌아가는 일은 죽는 것보다 더 끔찍했다. 영희는 기다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어린아이들까지 있으니 가족도 오래 머물지는 못할 것이다. 차라리 이들을 도와주는 게 나을지 모른다. 얼른 잡고 떠날 수 있게.
가족들이 본격적으로 낚시 장구들을 풀기 시작했다. 영희도 백팩과 물을 챙겨 데크 끝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열었더니 아까 편의점에서 사 온 물건들이 보였다. 영희는 그중 하나를 꺼내 들고 아이들을 향해 흔들었다.
“젤리 좋아하니?”
5
가족은 마치 훈련받은 군인들처럼 각자 맡은 역할을 해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는 했지만, 게 낚시만큼은 처음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내는 미끼를 끼워 작은 망 여러 개에 나눠 담았고 남편은 그걸 하나씩 강물 속에 던져 넣었다. 아이들은 젤리를 먹으면서 부모 옆에서 랜턴을 비추거나 잠자리채 같은 걸 들고 괜스레 물을 퍼 올렸다.
“뭘 넣은 거죠?”
영희가 묻자 남편은 입구를 벌려 놓은 파란색 이케아 쇼핑백 쪽으로 가서 뭔가를 들어 올렸다.
“닭 다리예요. 게들이 좋아하죠.”
“이제 뭘 해야 해요?”
“아무것도요.”
남자는 낫씽, 이라고 말한 다음 덧붙였다.
“기다리기만 하면 돼요.”
잠시 빈칸 같은 침묵이 흐르는 동안 영희는 자기 인생에 있었던 빈칸을 떠올렸다. 가족이 함께하는 밤낚시라니. 낯선 풍경이었다. 나는 왜 이런 걸 하지 않았을까. 게 낚시만 그런 건 아니었다. 사과나 딸기 따기, 말타기, 놀이동산 가기, 캠핑, 바닷가 놀러 가기, 운동 경기나 공연 보기, 국내 혹은 해외여행… 어린 시절 영희의 삶은 텅 비어 있었다. 주말은 텔레비전의 동의어였고 집에는 늘 혼자였다. 또래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같은 유년 시절을 보낸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어릴 때는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조차 몰랐지만, 자라면서 영희는 알게 됐다. 모든 가정이 자신의 집 같지는 않다는 걸. 영희에게 집은 비어 있는 곳, 혹은 시끄럽게 싸우는 곳이었다. 어느 쪽이든 머물고 싶지 않은 공간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떠내려온대요.”
어느새 눈앞의 남자아이가 말을 하고 있었다. 영희는 되물었다.
“미안해. 못 들었어. 뭐라고 했니?”
“게들이요. 밤이 되면 강물 위에 게 수십 마리가 둥둥 떠내려온대요. 진짜 대박이죠!”
아이는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팩트 체크 안 된 거예요. 믿지 마세요.” 여자아이가 영희 쪽으로 와서 속삭였다. 남자아이는 인상을 쓰더니 뜰채를 들어 자기 누나에게 물을 튀겼다. 그 물방울이 영희에게도 조금 닿았는데, 생각보다 차가웠다. 영희는 잠깐 눈앞의 검은 강물 위로 수십, 수백 마리의 게들이 떠내려오는 장면을 그려보았다. 달빛을 반사하며 빛나는 수면 위의 게들은 자신의 가까운 미래이기도 했다. 하얗고, 빛나고, 퉁퉁 불은.
6
“와우.”
남자가 줄을 당겨 아까 물속에 담갔던 통들을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 올라온 통 안에는 게가 서너 마리 들어있었다.
“자로 재봐, 얼른.”
남자는 아들에게 말했다. 남자아이는 이케아 쇼핑백 안에서 게 모양의 자를 들고 왔다.
“이건 너무 작지? 적어도 5인치는 넘어야 해. 다시 보내줘.”
남자는 그중 가장 작은 게를 여자아이에게 건넸다. 여자아이는 입으로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파닥거리는 게를 잘 들고 데크 끝으로 가서 멀리 던졌다. 게는 잠깐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곧 아래로 추락해서 강물에 작은 구멍을 만들었다. 이후 통마다 비슷한 과정을 거쳐 일정한 크기를 넘는 게들만 남겨졌다. 남자와 아이들은 통(그들은 이걸 ‘트랩’이라고 불렀다)에서 게들을 꺼내 파란색 플라스틱 바스켓으로 옮겼다.
“준비됐어?”
여자는 휴대용 버너 위에 꽤 커다란 솥을 올리고 물을 끓이고 있었다. 낮게 올라온 파란 불꽃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우리 엄마가 쓰던 거군요.”
영희의 말에 여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걸요?”
잠깐 망설이다가 영희는 답했다.
“네, 한국 사람이었거든요.”
그 말에 아내뿐 아니라 온 가족이 오,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시안들이 가족적이고 온정적이라는 편견이 생긴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 한국말도 할 줄 알아요?”
여자아이가 물었다.
“응, 아주 조금.”
영희는 뜸을 들였다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안녕, 우리 딸.”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부모도 소리 내 웃었다. 영희도 덩달아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럼 혹시 이것도 아세요?”
아내가 배낭에서 빨간색 라면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죠.”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라면. 아빠는 가장 혐오했던 라면. 이름은 잊어버렸다. 영희에게 그건 그냥 라면이 아니라 말하자면 엄마 냄새 같은 거였다. 여자는 바로 라면 봉지를 뜯어 면을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검붉은 가루가 들어가자 자극적인 냄새가 연기처럼 데크 위로 피어올랐다. 영희는 자신의 몸 한쪽이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다. 엄마가 서 있던 주방에서 나던 냄새였다. 여자는 라면 네 봉지를 넣은 뒤 파란 바스켓 속에서 게 몇 마리를 꺼내 물에 씻은 다음 솥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맛이 끝내줄 거예요.”
여자가 말했다.
* 계간 <대산문화> 2024 가을호(통권 93호)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