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포비아 happyphobia, 왕자 문구점이 있는 골목

  • 2024년 가을호 (통권 93호)
해피포비아 happyphobia, 왕자 문구점이 있는 골목

<이미 죽은 나에게. 거긴 좀 어때? 여긴 덥고 습해. 네가 시가 된 지 팔 년이 됐어. 이제 약 없이도 잘 산다. 술 담배도 안 해. 잠도 잘 잔다. 저녁엔 복싱을 좀 하지. 종종 학생들에게 귀여운 편지도 받는다. 여전히 꿈은 매일 꿔. 미래를 미리 당겨보기도 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은 멋진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있어. 하지만 다들 안 믿더라. 나는 멍청한 척을 해. 그냥 좀 웃으면 어때. 지면 어때. 도시 사람들은 너무 딱딱해. 거긴 괜찮아? 여긴 곱슬곱슬한 구름이 떠다녀. 우박이 뺨을 때려. 아까부터 죽은 시인이 구석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어. 몸에 갇힌 기분이야. 나 좀 꺼내줘. 시의 표면은 먼지도 곰팡이도 없이 깨끗했다. 어린 나는 울면서 죽었다가 웃으면서 깨어났다. 시는 나를 맛있게 뜯어먹는 거다. 파먹고 좀먹고 씹어 먹고 핥아먹고 녹여먹고 데쳐먹고 끓여먹고 지져먹고 튀겨먹고 구워먹고 삶아먹고 쌈 싸먹고 무한히 자가 증식하는 나를 먹는 거다. 어느 날에는 싱겁고 어느 날에는 떫고 어느 날에는 바삭바삭한 나들. 파랗게 눈 뜨고 살아있었다. 동결 건조된 슬픔처럼. 무슨 이야기를 더 해야 할까? 나는 꾸준히 나를 먹는 쇼를 할 테니 당신들은 즐거운 관람되세요.

 

 

해피포비아 happyphobia

 

하루에 세 번 슬프다고 말해봐요

숲, 파편, 피날레

 

티셔츠 속으로 깨진 병을 숨겨봐요

치즈, 위스키, 알프라졸람

 

그리고 히죽

웃어요

 

우리 집에 왜 왔어요?

다리도 없이

 

매일 새로운 귀신들이 배달되는데

우는 얼굴만 현관 앞에 두고 가세요

 

3시에는 팽팽하고 15시에는 찡그리는

예민한 머리들과 함께입니다

 

우리는 축축한 이불을 널고

알몸으로 수박도 먹어요

시체 놀이는 너무 쉬워요

가벼운 뽀뽀라도 할까요?

 

꺼진 티브이에 누군가 비치는군요

늪, 편파, 풀피리

 

여름의 가장자리엔 누울 수 없어요

너무 더우면 울 수도 있고

 

슬쩍,

비켜서야만 보이는 것들

 

그림자를 지운 불안이 잠깐

켜졌다가 사라지고

채널 조정이 시작됩니다

걸음마다 발목을 잡는 찬 손

 

빨갛게 벗겨지는 천장을 위해 날씨를 익혀봐요

부채, 방울, 에스시탈로프람

 

화분에 모르는 코가 돋아난다면

아, 외롭다

말하고 잊어버려요

 

본격적으로 다리 찢기를 연습해요

거울 속의 소녀와 눈싸움을 해요

세상에서 가장 맑은 휘파람 소리를 연습해요

피눈물을 흘리면 지는 거예요

 

당신이 나를 이기면

오늘의 수명을 선물할게요

 

길을 잃어버린 싱싱한 귀신이 현관으로 쳐들어온다면 좋겠어요

 

나를 홀려줘요

붕 뜨게 해줘요

숨 막히게 해줘요

당신에게 닿게 해줘요

 

나 오늘 너무 슬퍼요

폭풍, 핑퐁, 팡팡!

 

 

 

왕자 문구점이 있는 골목

초심자 추천 매물: 밤이면 길어지고 낮에는 짧아지는 곳

 

왼쪽 골목

내 친구 천지는 끊어진 전깃줄로 줄넘기하는 걸 좋아했다 천지의 여동생 천마가 네발자전거를 타고 눈 없는 또순이를 질질 끌고 다녔다 천지와 천마는 얼굴에 담뱃재를 묻히고 깔깔댔다 그곳에 다녀오려면 버리는 옷을 입어야 했다 천지와 천마는 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아홉 살 다섯 살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가운데 골목

저녁이면 손 두부 아저씨가 땡땡 종을 울리고 다녔는데 아무도 밖으로 안 나왔다 초승달 아래 세 들어 사는 미주는 밤마다 아빠를 그렇게 찾았다 아빠 아빠 제발 아빠 그 애의 찢어진 눈매가 더 찢어질 정도로 비명이 이집 저집 창문을 두들겼는데 아무도 밖으로 안 나왔다 나는 베란다에 숨어 그 집을 훔쳐보곤 했는데 다 자란 나무 같은 그림자가 어른 어른거렸다 미주가 천장에 매달린 모양이었다

 

오른쪽 골목

빨간 머리 화연이와 연화의 집은 지하 9층에 있었다 계단 입구에서 조롱박을 머리로 깨거나 온몸에 팥을 뿌려야 문이 열리는 곳 아줌마는 화장실에서 밥을 먹다 말고 얼른 이 동네를 뜨라며 검은 부적을 엄마의 귓속에 찔러 넣었다 나는 화연이와 연화의 빨간 머리카락을 세 갈래로 땋아줬는데 끝을 묶을 고무줄이 없었다 그래도 화연이와 연화는 촛농처럼 표정 없이 예뻤다 아줌마는 무당이 되지 않으려고 아이들을 장롱에 숨기고 날마다 집을 아래로 파 내려갔다 착한 아이들을 위한 선택: 겨울이면 가팔라지고 여름에는 헐렁해지는 곳

 

시작하는 골목

월요일. 멀쩡한 방문을 내다 버리다 보일러 집 개에게 다리를 깨물렸다 화요일. 말아먹은 비디오 가게 앞을 기웃거리는데 비가 와서 길을 잃었다 수요일. 오래된 아빠를 묻어드렸다 목요일. 짝꿍의 엉덩이를 그린 다음 잘게 찢어 변기에 버렸는데 학교 수돗가에서 발견되었다 금요일. 남의 집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토요일. 교회에 가자며 팔을 잡아끄는 친구를 개장수에게 팔아넘겼다 일요일. 학교 앞을 지나가는 엄마를 모른 체했다가 월요일. 끝나는 골목으로 돌아와 미안하다고 말했다

 

강혜빈
시인, 사진작가, 타로마스터, 1993년생
시집 『미래는 허밍을 한다』 『밤의 팔레트』, 산문집 『어느 날 갑자기 다정하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