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규, 장마의 시

  • 2024년 가을호 (통권 93호)
권진규, 장마의 시

34년 전 권진규를 소재로 쓴 시로 문단에 등단을 했다. 어떤 식으로든 끝까지 가 보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명 끝까지 간 예술가였다. 최근 오랜만에 권진규의 작품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결국 본질만을 남긴 그의 작품들 앞에서 20대 청년 시절의 내가 생각이 났다.

나는 여전히 시를 쓰고 시를 통해 끝까지 가려고 한다. 시는 기쁨도 슬픔도 아니며 밥도 명예도 아니고, 주장이나 연민은 더더욱 아니다. 시는 감염된 자들로 하여금 끝을 보게 해주는 ‘귀신’이다.

 

 

권진규

 

생은 자주 금이 가는데

그 사이로

죽어가는 청년이 눈에 들어온다

 

착한 사람들은

어깨에 힘이 없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충분하다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쁜 일이 생길 거 같아서

서로 자꾸 묻는다

“살아 있니?”

 

이곳엔

강처럼 흐르는

아름다운 가엾음이 있다

 

그날처럼

죄 많은 언덕에

재활용 예수가 매달려 있다

 

 

장마의 시

 

작고 푸른 열매들을 떨어뜨렸다

죽음이었다

 

우리는 어른들에게서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다

 

그래도

채 하루가 가기도 전에

열매들은

잠시 비가 그친 사이

보도블럭 틈새에서

포자로 피어났다

 

 

힘은 없지만

난생처음 뭔가가 된 것이다

 

장마철.

이 계절엔 모든 게 쉽다고

나는 사람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마도

이 계절에 나는

 

 

다시 한번

축복이 아닌 것으로 하루하루를 견딜 것이다

 

내가 뭐가 되거나 되지 않거나

 

빵 칼을 들고 세상에 덤비는 심정으로

살아갈 것이다

 

옛 애인들이

장맛비 속을 지나간다

실업수당을 신청하러 간다

허 연
시인, 1966년생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오십 미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