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일조선인 김시종 시인과의 대화
- 재일조선인 김시종 시인과의 대화
곽형덕
명지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 / 1978년생
저서 『김사량과 일제 말 식민지문학』, 역서 『배면의 지도』 등
김시종
재일조선인 시인 / 1929년생
시집『지평선』 『이카이노 시집』 『광주시편』 『배면의 지도』,
자전 『조선과 일본에 살다』 외 다수
김시종 1929년 부산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 자랐다. 1948년 제주 4·3항쟁 이듬해 일본으로 밀항해 1950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어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재일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오사카 이쿠노에서 생활하며 문화 및 교육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50년대 조선총련의 탄압을 뚫고 오늘날까지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펼치고 있다. 시집을 비롯해 자전과 평론집 대부분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
-김시종 시인의 시 세계는 일본으로 망명한 이후 일본어로 쓴 첫 시집 『지평선』(1955)에서부터 동일본대지진 참사 이후 일본 사회의 모습을 담아낸 『배면의 지도』(2018)에 이르기까지 한민족 디아스포라문학의 정수로 여겨지고 있다. 김시종의 모든 시집과 자전 등이 최근 10여년 사이에 많이 번역돼 나왔지만, 김시종의 문학세계는 아직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히 김시종 시의 전설적인 난해함 때문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분단체제로 인함이 크다. 김시종의 시는 난해하다고 평가받지만 시인과의 대화는 늘 즐겁다. 여전히 현역이자 냉철한 기억과 사유를 보이는 시인은 냉철하면서도 유머러스하다. 이 인터뷰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를 다룬 『배면의 지도』를 번역한 후, 95세를 맞이한 김시종 시인의 자택에서 소소한 출간기념회를 겸해서 지난 6월에 이뤄졌다. 시인은 대수술을 8번 하고 최근에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만, 검은 머리가 다시 나고 있다며 웃으면서 인터뷰에 응했다.
곽형덕(이하 곽) 『배면의 지도』가 출간되면서 선생님이 반세기 넘게 내신 여덟 권 정도의 시집이 한국어로 모두 번역돼 나왔습니다. 산문 번역도 계속되고 있으니 조만간 선생님의 모든 저작이 한국어로 옮겨지게 될 듯합니다.
김시종(이하 김) 생을 마친다는 의미에서 정리한 시집입니다. 심방세동으로 급히 입원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정리한 시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집에 품고 있는 것은 적지 않습니다. 산문은 걱정을 안 했지만 시집이 우리말로 옮겨지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문장은 얽매이며 익힌 일본어로 쓰여 있어서 한국어로 옮기는 것은 특히 어려운 언어표현입니다. 표현도 독특하고, 말뜻을 담아내는 방식도 사전 설명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한국의 여러 번역자들이 제 모든 시를 옮겨주셨습니다. 이해하는 데 다소의 어려움은 있겠으나 본국의 독자들에게 전해질 때 자극을 주리라 기대됩니다. 한국에 흔히 있는 서정시와는 질적으로 다르니까요. 그런 의심을 품어주면 제가 본국에 조금이라도 기여를 한 셈이 되지 않을까요. 제 모든 시집이 한국어로 번역돼 나오니 저 또한 심정적으로는 본국의 한 사람이 된 기분입니다.
곽 시집을 출간하며 많은 인터뷰를 하신 것으로 압니다. 『배면의 지도』는 2018년에 출간됐으니 그 어떤 시집보다도 현재적 의미를 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집은 반핵운동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뿐만이 아니라 제주 4·3의 비극과도 포개지고 겹쳐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광주시편』을 “4·3 체험자로서의 마음의 빚, 트라우마가 역으로 움직여”서 쓰게 된 것이라 하셨는데, 『배면의 지도』 또한 제주 4·3과 겹쳐짐을 느꼈습니다.
김 잘 보셨습니다. 이어지고 겹쳐 있습니다. 아사히신문에 일본 소설가가 쓴 『배면의 지도』 서평이 실렸습니다. 그런데 전혀 그런 부분을 잡아내지 못하고 나카노 시게하루 운운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분이야 마음먹고 쓰신 것이니 전화가 왔을 때 고맙다고는 했지만 서평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시집은 무시당하지만 제 시집은 나올 때마다 주목을 받았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겸연쩍지만요. 후지와라서점에서 제 전집인 ‘김시종 컬렉션’을 10권 넘게 간행 중인데 이제 3권이 남았습니다. 생존하는 시인의 컬렉션이 나오는 것도 희유한 일입니다. 시집도 그렇지만 산문, 강연, 에세이 분량도 꽤 됩니다.
무언가를 숨길 때는 뒤쪽으로 합니다.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숨기고 있는 것이 배면입니다. 한반도는 토끼처럼 생겼다고 흔히 이야기합니다. 일본에서 보자면 식용토끼 같아서 욕을 봅니다만, 일본 열도의 모양을 보면 태평양 쪽이 배면입니다. 미국과는 태평양에 걸쳐서 연결돼 있습니다. 미국과는 등바닥으로 연결된 셈입니다. 뒤쪽에 미국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일본에서 원전이라고 하는 것은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뒤쪽으로 숨겨놓은 것이 많습니다.
곽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게 됐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게 됐다는 의식이야말로 선생님이 후쿠시마에 주목한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김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가 파탄을 일으켜서 지금도 손을 댈 수 없는 지경입니다. 실제로 각지의 원자력발전소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재가동되고 있으며 과학적으로 안전함이 확인됐다면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그 예시를 찾아볼 수 없는 방사능 오염수를 공공연하게 바다에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시를 쓰며 한계점에 오게 한 것은 노아의 홍수를 연상시키는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한 대재해, 특히 멜트다운을 일으킨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의 파탄에 집착하면 할수록, 그곳에 사는 마을 사람들의 속마음이 들여다보였던 점입니다. 그것은 자민당 정권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일본의 원전은 한촌인 벽지에 발전소를 만들면서 시작됐습니다. 그것은 비단 땅을 사기 쉬웠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곳 마을 사람들이 와달라고 청을 해서 이뤄진 것이기도 합니다. 원전이 들어서면 벽지 마을에는 취직 걱정이 사라집니다. 수백억이 마을에 뿌려지고 면사무소 경비도 원전에서 나옵니다. 알아보면 볼수록 후쿠시마원전은 벽촌의 주민들이 바라고 바란 것이기도 합니다. 원자력 파탄의 밑바탕에는 그 땅에 사는 주민들의 갈망과도 같은 원자력발전소 유치 찬성이, 마을을 부흥시켜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바람이, 저류를 이뤘던 것입니다.
저는 아나키스트였던 오노 도자부로[小野十三郎]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챙긴 것은 제가 유일합니다. 오노 도자부로는 단카적 서정(短歌的抒情)을 부정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단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걸 부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시인이 될 증좌입니다. 오노 선생님은 고향에 보복한다고 했습니다. “고향이란 구마모토[熊本]라든가 신슈[信州]라든가 도호쿠[東北]라고 말하는 놈이 있다. / 나는 언제나 구마모토나 신슈나 도호쿠를 향해 복수(復讐)하고 있을 작정이다”라고 썼습니다. ‘고향’이란 감미로운 서정이 배양되는 곳이지 설마 ‘복수’할 대상이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곽 선생님의 전 시집이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수용되기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 선생님의 시집을 파울 첼란의 시처럼 “전설적인 난해함”이라고 표현하는 연구자도 있으니까요. 최근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다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냉전적 사고방식이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가운데 선생님의 시가 한국에서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까요. 역사를 둘러싼 망각과 기억의 풍화 또한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김 발레리가 시는 능금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능금은 탐스럽습니다. 비타민C가 들어 있다고 사람들이 먹는 것이 아닙니다. 시에서 전하고 싶은 뜻과 심정은 능금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겉으로 나오면 안 됩니다. 발레리가 120년 전에 말한 겁니다. 현대시는 호소문이 아니고 심취하는 겁니다. 저는 하인리히 하이네를 좋아합니다. 하이네는 자기 시를 낭만적이며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라고 했습니다. 제 창작의 원천 또한 그와 같습니다. 시로 호소문을 쓰지 않지만, 읽은 사람에게 서서히 스며들어 갑니다.
그렇게 스며들어 가면 독자들은 공명하고 동조합니다. 저는 조선총련으로부터 듣기 힘든 욕설과 비판을 받았지만, 제 시집 내용을 공격하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으니 시비를 걸 수 없습니다. 그 무렵 한국의 군사정권 또한 제 시집만으로는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적 호소문이 아니라 대단히 높은 수준에서 미학적으로 시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찬미가 될 수 있어서 조심해야 하지만 창작적으로 높은 수준의 글은 표적이 되기 어렵습니다. 시가 평론이나 수필과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과거에 낸 제 시집은 점점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듯합니다. 장편시집 『니이가타』 초판본은 헌책방에서 30만 엔을 넘어가며 그마저도 구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일본 곳곳에 김시종 시집을 읽는 모임이 있습니다. 저는 시의 영양분을 산문에서 받습니다. 시인은 소설을 쉽게 쓰지만 그 반대는 어렵습니다. 시는 쓰이지 않아도 존재합니다. 소설은 쓰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습니다.
곽 시는 쓰이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것은 선생님 시론의 핵심 내용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김 제가 시론에도 썼지만 사람은 모두 각자 자신의 시를 껴안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 또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 관계에 있는 것, 예를 들어 동식물이나 무기물 등 인간이 아닌 것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이미 그 마음속에 시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쓴 글에 우리가 깜짝 놀라는 이유는 돌이나 꽃과 벌레, 작은 새들과도 아이들은 말을 나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점차로 상식의 포로가 돼 모처럼 지니고 있던 동심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어릴 적 꿈까지 고갈시켜 죽어갑니다. 인간도 살아 있는 생명체 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것과 마음을 통할 수 있는 감성을 품고 있습니다. 시는 그러한 감성에서 시작됩니다. 요리를 하며 평생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선공으로 생애를 마치는 사람도 있으며, 관리직은 거들떠보지 않으면서 당당하게 아이들을 챙기며 정년에 도달하는 교원이 있음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요컨대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있는 그대로 살아가고 싶지 않다. 놓여 있는 상태 그대로 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거듭하면서 의지 깊게 간직하며 사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반드시 시가 싹트고 있습니다. 무용가는 자신의 무용으로 시를 표현하며, 조각가는 정과 망치로 돌을 조각하고, 나무를 파서 자신의 시를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왜 시를 쓰는 사람에게만 시인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일까요? 앞서 양해를 구하자면, 저는 시를 제 직업으로도 제 장기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시를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시를 살아가는 사람은 허다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쓰이지 않은 소설은 존재하지 않지만 시는 쓰지 않아도 존재합니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마음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해서 어물거리는 경우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대체로 그렇습니다만, 그렇게 목구멍에 막혀서 나오지 않는 말, 정체돼 응어리진 마음을 실을 뽑아내듯이 표현해내는 언어력, 그것이 언어로 쓴 시입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사람,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의 책무는 ‘자신의 생각은 반드시 그 밖의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자각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 요컨대 자신도 대중의 한 사람이므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필연적으로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주위를 보면 자신을 위해서 시를 쓴다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확실히 그렇기는 하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살아가는 것이 아닌 이상, 많은 사람들과 연결돼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불가분하게 타인의 삶을 나누어 가진 존재입니다. 시인의 언어는 그러므로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곽 선생님은 기억에 스며드는 언어를 잣는 것이야말로 시라고 평가하고 계신 듯 합니다. 선생님의 시어에 자주 등장하는 ‘아지랑이’는 그늘지는 것, 떠나가는 것의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류큐대학의 오세종 교수는 선생님의 시집을 평가하며 “잃어버린 역사 전체가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각각을 연결시키는 시 쓰기”라고 하기도 했고요.
김 제게는 운명적으로 겹치는 계절과 날짜가 있습니다. ‘제주 4‧3’에 참가해서 쫓겨 다니며 많은 죽음을 본 것은 초여름이었습니다. 초여름에는 아지랑이가 곳곳에 있습니다. 6월 6일은 제가 일본으로 망명한 날짜입니다. 6월 6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일이기도 합니다. 제 생일인 음력 12월 8일은 진주만 공습일이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생신은 4월 3일입니다. 그렇게 날짜가 운명적으로 겹쳐집니다. 어쩐지 그렇게 됩니다. 하지만 복잡한 사정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성가시게 달라붙었습니다. 82살이 되던 2011년 3월 11일 저는 문학상을 받기 위해 도쿄로 가는 신칸센 안에 있었습니다. 또 다시 겹쳐질 것 같지 않았던 이변이 제게 일어났던 겁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지구적 규모로 시련이 닥쳐온 날, 사람의 지혜가 빚어낸 교만을 벗겨낸 3월 11일에 준엄한 계시를 받고 이와 마주하는 드문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곽 선생님은 재일조선인문학을 대표하는 문학자로 오랜 세월 창작을 해오셨습니다. 남북분단으로 인해 여러 용어가 난립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어떤 작가의 경우는 용어 자체를 거부하고 있기도 합니다. ‘재일조선인문학’이라는 용어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김 그 말 자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최근 젊은이들은 재일코리안이라고 합니다. 재일한국조선인이라는 용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용어는 분단을 공고히 합니다. 분단과 대립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에 전 반대해 왔습니다. 재일조선한국인, 재일한국조선인이라는 용어를 반대합니다. 어느새 젊은 세대는 그걸 능가해서 재일코리안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지혜롭게 말합니다. 그런 틀을 순식간에 벗어납니다. 한국인은 조선인이라는 말을 안 씁니다. 오히려 지혜롭다고 봐야 할까요. 제가 “재일을 살아간다”는 명제를 내걸었을 때는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오사카 이쿠노 코리아타운에 제가 쓴 시비가 세워진 걸 보셨나요? 시비에 제가 쓴 「헌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요즘 세대는 그 시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일기장에 옮겨 적기도 하고 노트에 적어서 다닌다고 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곽 후세대나 한국의 독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김 젊은이들이 역사를 망각한다는 말을 기성세대가 자주 합니다. 그런데 망각이 아니라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이 무언가를 알려면 제대로 알리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알고 싶은 개인은 많습니다. 아무리 알고자 해도 그런 처지가 아닌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처지의 사람들에게도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지 않고서는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역사를 망각한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 중에서 제대로 알려줄 사람이 없다고 봐야 할 겁니다. 역으로 제대로 알려주려는 사람을 가두고 죽이고 했던 역사가 아닐까요. 알아야 할 역사를 알려줄 지식인이 부족했다고 봅니다. 아무리 알고 싶다고 해도 말입니다.
곽 몸이 불편하신 가운데 두 시간 넘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시는 쓰이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선생님의 시론은 ‘제주 4·3’ 이후 망명과 고난에 찬 삶의 여정을 생각할 때 그냥 나온 말씀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선생님의 시와 문학이 더 많은 한국의 독자와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