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생각하면, 두 눈에 저절로 눈물이

  • 나의 아버지
  • 2024년 가을호 (통권 93호)
생각하면, 두 눈에 저절로 눈물이

서구문학에서, 예컨대 카프카의 작품에서는, 대개 아버지가 아들에게 적대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이와 반대로, 경북 영천의 몰락한 유가(儒家)에서 자라난 나는 이미 오래전에 이 세상을 떠나신 내 선친을 생각하면, 우선 누선(淚腺)에 불효자로서의 ‘회한의 눈물’부터 고이려 한다.

내 15대조로서 영천 도동(道東) 마을의 입향조(入鄕祖)이신 완귀공(玩龜公, 安嶒)은 원래 경남 밀양 사람으로 중종 때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설서(說書)라는 벼슬을 지내며 세자 시절의 인종을 지근거리에서 모셨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 후 9개월이 채 못 되어 승하하자 인종의 배다른 동생이던 명종이 즉위하고, 그 어머니 문정왕후가 득세하여 바야흐로 을사사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공은 결연히 벼슬을 내려놓고 처가가 있던 영천으로 내려와, 이 동네 이름을 ‘도(道)가 해동으로 왔다’는 의미인 ‘도동’으로 불렀다. 그가 금호강 상류인 호계천(虎溪川)의 자라들을 즐겨 구경하면서 안빈낙도하신 정자 겸 살림집이 바로 완귀정이다.

나의 선친은 이 마을에서 1908년에 태어나시고 거기서 농민으로서 신산한 삶을 사시다가 내가 독일 유학을 떠나기 직전인 1970년에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나셨다. 이 세상이 누구에겐들 한 많지 않으랴만, 운명은 나의 아버지에게는 유달리 가혹했던 듯하다. 일제 강점기에 성장하시다가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당시 대구고보(후일의 경북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시고도 도청 소재지인 대구에의 진학을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시고 장남으로서 부모님을 봉양하고 두 동생을 거두기 위해 향리에 남으셔서 일평생 농부로 사셨다. 하지만, 도동에는 완귀공 때부터 내려오는 문중의 서당이 있었고, 아버지는 그 서당에서 계속 한학을 공부하시고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서당에 도창(道昌) 학교라는 임시 학교를 열어 직접 가르치기도 하셨다.

 

  독특하게도 살림집이 딸린 정자 완귀정.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완귀정 현판

 

그의 학력은 비록 당시의 학제로는 소학교(초등학교) 졸업에 불과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늘 조선 최후의 선비라는 자긍심이 남아 있어서, 일을 하시면서도 밤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해 가면서 문중의 대소사도 함께 떠맡고 계셨다. 그 무렵, 내 아버지는 일제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에 소극적으로 저항하시면서 도동 마을의 일가들과 그 마을이 속한 금호면을 어떻게든 지켜내고자 지성(至誠)으로 애쓰셨기 때문에 도동 마을 안씨 문중의 병(秉)자, 진(珍)자를 쓰는 선비는 인근 향리에서 신망이 두터웠다. 바로 그즈음인 1943년에 내가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조금 살 만해진 이때부터 내 선친에게는 또 다른 혹독한 시련들이 닥쳐왔다. 해방 공간인 1946년 10월 대구에서, 그리고 잇달아 영천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났다가 간신히 진정되자, 그 난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색출·처벌하는 과정에서 근거 없이 경찰 당국의 체포망에 걸려 터무니없는 곡경(曲境)을 치르셨다. 해방 직후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하부조직으로 급조되었지만, 회의 소집조차 한 번못 한 채 사라져야 했던 ‘금호면 인민위원회’의 부위원장이란 직책이 어떤 문서에 기록으로 남아 있었던 탓이었다. 그 구금에서 간신히 풀려나자, 설상가상으로 때마침 창궐하던 장티푸스로 인해 한꺼번에 두 남동생을 잃고 자신은 상처(喪妻)를 당하시는 바람에, 한 지붕 밑에서 세 집 살림을 꾸려나가셔야 했다.

아버지는 엄마 없이 자라나야 하는 막내인 나를 유달리 사랑하셔서 늘 사랑방의 당신 곁에 두시고 당신의 요 위에서 나를 재웠으며, 틈이 날 때마다 『명심보감』이나 『통감』에서 한 구절을 직접 종이에 옮겨 써 놓으시고는 일일이 토를 달아가며 자구(字句)를 강론해 주시곤 하셨다.

6·25 전쟁이 발발하여 소위 영천전투가 벌어지자 도동 마을에 잠시 인민군이 들어오기도 했다. 국군과 미군이 영천읍을 탈환하자 미처 북으로 함께 도망하지 못한 인민군 일개 소대가 도동의 재실(齋室)인 상로재(霜露齋) 근처 야산에 숨어 있다가 밤중에 마을로 내려와 따발총을 겨누며 밥을 해내라고 협박하곤 했으며, 그 이튿날에는 또 어김없이 경찰이 찾아와서 간밤에 인민군에게 밥해준 집의 가장을 잡아가곤 했다.

 

독문과 졸업을 앞둔 내게 아버지가 보내신 1965년 12월 13일 자 엽서. 대학원에서는

전공을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으신다.

이런 식으로 달포 정도가 지나자, 누가 경찰 혹은 인민군에게 고자질해서 자기 집 가장이 경찰서에 갇혔는가, 또는 인민군에 의해 총살당했는가를 묻고 또 거기에 대해 발명(發明)하느라고 온 일가붙이들이 서로 반목하고 다투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일상사로 되어 버렸다. 나의 선친이 일가친척 간의 그런 다툼과 불화를 온전히 다 수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서로 화해시키고 숭조목족(崇祖睦族) 해 오던 문중의 전통을 잇고자 초인적 노력을 기울인 사실을 어린 나는 우리 집 사랑방에서 나누던 일가들의 격렬한 대화와 다툼을 통해 훤히 알게 되었다.

 

후일, 내가 대학 진학을 해야 할 무렵, 아버지는 내가 법과대학에 입학하기를 원하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내가 판·검사가 되어, 남자들이 거의 다 죽고 과부들만 남아 있다시피 된 우리 안문(安門)의 의지할 데 없는 일가 아이들을 좀 거두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셨던 듯하다.

그러나 나는 뜻밖에 독문과를 선택했다. 내 한 몸이 그 복잡한 분쟁과 그로 인한 온 마을의 불화를 어떻게 다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을 뿌리치고 장차 독문학을 공부해서 내가 보고 들은 이 모든 분쟁과 알력의 사단을 소설로 쓰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말문이 막혀 한동안 가만히 생각하시더니, “그래, 우리 혈통에 그런 내림도 있긴 있는 듯하구나!”하고 말씀하시더니, “네 뜻대로 해라!”라며 마지못해 허락해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지성(至誠)을 다 기울여 살아오신 내 아버지의 공동체를 위한 삶에 대한 나의 괘씸한 ‘무시’이며, 아버지의 나에 대한 가없는 사랑에 대한 불효막심한 ‘배신’이었다. 도대체 문학이 뭐라고? 불효자의 회한 때문에 뒤늦게 『도동 사람』이란 소설을 쓰긴 했지만, 그것도 다 아버지의 영전에 바치기 위한 불효자의 회한의 변일 뿐, 그동안 도동 마을은 완전히 몰락한 나머지 지금은 일가들도 거의 다 외지로 떠나가고 완귀정과 서당만 쓸쓸히 남아 있다. 내 선친을 생각하면, 지금도 두 눈에 저절로 회한의 눈물이 고이는 이유다.

안삼환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 1943년생
저서 『괴테, 토마스 만 그리고 이청준』 『한국 교양인을 위한 새 독일문학사』, 장편소설 『도동 사람』 『바이마르에서 무슨 일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