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④ 이미 존재하는 문학(들)

  • 기획특집
  • 2024년 가을호 (통권 93호)
④ 이미 존재하는 문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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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소설(장르소설)이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크게 두 종류의 구분법을 전제하는 듯 보입니다. 하나는 통속·대중소설과 예술소설의 구분이고, 다른 하나는 장르소설과 (리얼리즘을 주축으로 한) 순소설의 구분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구분은 존재하는 듯 보일지라도 그 세부를 짚어 보면 금방 혼란스러운 점이 드러나고 맙니다.

일단 통속·대중소설과 예술소설의 구분이 흐릿하다는 사실부터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동일한 작가에 의해 집필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욕망의 거리』와 『군함도』가 동일한 종류의 소설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전자는 당시부터 통속·대중소설으로 간주되었지요. 그런데 유현종의 『불만의 도시』는 어떨까요? 이는 《자유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문단에 나온 작가의 작품으로 ‘문학’의 반열에 올랐으나 서사성 짙은 구성은 사실 통속·대중소설의 그것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물어 봅시다. 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과 에밀 졸라의 『돈』, 발자크의 『사업가』, 다카쓰기 료의 『욕망산업』, 이원호의 『황제의 꿈』을 구분하는 선은 정확히 어디에 그어지는 것일까요? 이들 각각은 얼마나 통속적이고 얼마나 예술적인 것일까요? 발자크의 사례가 보여주듯이(혹은 에밀리 브론테와 제인 오스틴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대중성과 상업성이 언제나 예술성의 반대항에 위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범박성과 세속성 자체에 대한 집요한 탐구는 해당 소재를 순수한 예술의 영역에 올려놓곤 합니다. 그러니까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을 구분하는 질적 차이는 소재나 테마, 혹은 구성 유형의 문제라기보다는 특정 기준에서의 완성도 문제거나 권위에 대한 문제라고 보아야 합니다.

지금 주어진 지면 내에서 완성도의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논하기는 어렵거니와, 이는 중간소설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문예론 일반에 대한 논의가 될 공산이 큽니다. 『아메리카의 비극』과 『욕망산업』 사이에 그러한 유형의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 또한 자명하고요. 따라서 이 시점에서 가능한 판단은, “완성도 측면에서의 질적 상이성은 연속적인 형태로 나타나므로, 예술적인 것과 비예술적인 것 사이의 중간적인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다”가 최선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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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권위와 권력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부분이 많습니다. 하나의 장르 혹은 작품은 다양한 문학적 속성의 결합물이며 문학의 계보란 그 결합의 변형을 통해 발전하며 재구성된다는 관점은 현실에 구현되는 순간부터 권력 게임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권력이란 ‘승인과 전복을 통한 계보의 재배치’가 실질적으로 어떻게, 언제 수행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가령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SF소설의 시조이자 문학으로 간주되지만, 당대 지식인들의 평가로는 젊은 여성이 쓴 괴기 통속소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요. 더 과거에는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가 통속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요. 장기적으로는 역사의 흐름이 그들 각각에게 정당한 자리를 찾아 준다는 말조차 권력 게임의 작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실러가 “세계 역사는 세계 심판이다”라고 말했듯이, 역사란 결국 신진 주자들이 기존의 관념을 밀어내며 발생하는 변화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권위의 문제는 장르소설-순소설이라는 허구적 구분, 그리고 장르소설-통속소설의 혼동을 논할 때 특히 중요합니다. 판타지·SF·고딕·호러·추리·미스터리 등 ‘장르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속성들은 ⓐ비교적 뒤늦게 정교화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기존의 권위 바깥으로부터, 대개는 통속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와 ⓑ의 결합은, 권위를 선점한 사람들에게 폭정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장르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속성들을 활용한다는 이유만으로 통속소설가 딱지를 자의적으로 붙여버리거나 떼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언급했던 메리 셸리나 레이먼드 챈들러처럼 ‘지금은 문학으로 간주되지만 당시에는 통속소설 작가로 인식되었던’ 사람들이 있게 됩니다.

이제 한국이라는 고유한 맥락을 검토할 차례입니다. 지면이 좁은 까닭에 이 자리에서 한국의 정신사를 온전히 분석하기란 불가능하지만, 한국이 유물론과 실용주의에 사로잡힌 나라라는 점은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과거의 순수-참여 논쟁이 방증하듯 장기간의 독재와 문화 통제로 인해 ‘예술 그 자체’, 달리 말하면 ‘지금 여기의 현실이 아닌 것’을 고민할 토양이 희박해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연장선상에서, 한국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성기로부터 다소간 동떨어져 있었다 보니 대중이 버로스나 애나 캐번이나 앨런 긴즈버그 등을 제때 받아 소화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의 현실이 아닌 것’을 통해 지금 여기를 비추는 접근법이 어느 이상으로 정교화되기 어려웠고, 그런 유형의 작품에서조차 (환상적 모티프와 현실지향적 메시지 간의) 주(主)와 종(從)의 구분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더해, 국가 및 학계와 유기적으로 결합한, 문단이라는 제도-형식마저 견고히 자리잡고 있지요.1)

이로 인해 한국 문학에는 그 특유의 리얼리즘 중심주의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 리얼리즘 중심주의란 “한국문학에는 리얼리즘만이 존재한다”는 의미는 아니며, 오히려 호명하는 권력과 결부된 용어입니다. 요컨대 어떤 작품의 속성들을 해체하고 분류할 귄위를 지닌 사람들은, 등단한 이들을 향해서는 ‘장르적인 속성들을 기법과 상징의 차원으로만 환원시킴으로써 그 장르성 자체는 외면하고’, 등단하지 않은 이들을 향해서는 ‘이것은 장르이자 통속이다’라는 배제를 시도해 왔습니다. 더 나아가 받아들여질 만한 장르성과 아닌 장르성을 구분해 왔습니다. 미스터리·고딕의 기법들은 그 세목을 구체적으로 호명하지 않는다면 그냥 ‘플롯’으로만 남듯 말입니다. 과거에, 김영하의 『빛의 제국』이 스릴러·미스터리 기법을 뼈대 삼고 있다는 사실은 아예 말해지지 않거나 체면치레 수준에서만 언급되었지요. 또한 최제훈의 소설들에서는 현대적으로 변주된 고딕 호러의 요소들이 곧잘 발견되지만(그리고 그것이 현대적으로 변주됨으로 인해 SF와 결합하곤 하지만) 그의 장르성 자체에 주목하는 사람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많지 않았습니다.2) 그리고 이러한 경향이 문학 소비자층과 지망생층에 광범위한 영향을 주며 일종의 인지적 갈라파고스화가 일어났다고 봅니다.

물론 위의 서술들이 제시하는 논리가 과도하게 거칠 뿐만 아니라 다양한 행위주체들(평단과 출판사, 대중 등)을 구분하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이러한 이행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악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요인의 결합에 따라 자동적으로 결착된 것이므로 책임자를 지목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한국에는 장르적이라고 분류되는 속성들을 온전히 독해할 만한 문화적 토양 혹은 관용이 부족합니다(토양 혹은 관용이라고 말한 이유는, ‘단순히 모르는’ 경우와 ‘그렇게 읽는 법을 알면서도 그러지 않는’ 경우 사이의 스펙트럼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2010년대 중반 이후로 한국문학이 장르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 수용은 ‘서정성 혹은 참여성 짙은 SF를 한정적으로 승인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졌지 장르적 속성 전반에 대한 관점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판타지 전반이 ‘환상성’ 혹은 ‘마술적 리얼리즘’의 틀 안에서만 승인된 것처럼 SF도 그런 구속복을 입고서야 겨우 한국문학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이 미스터리·고딕의 기법들은 ‘플롯’이라는 총칭 뒤에만 가려져 있었습니다. 이처럼 장르적 속성들이 이름을 잃어버리거나 제한적으로 수용되는 상황에서는, 해당 속성들의 결합이 예술 작품을 형성하는 방식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예술적인 것이 온전히 구체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예술적인 것과 비예술적인 것의 중간을 말하기란 어불성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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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국에는 ‘장르적 속성을 활용하는 순소설 작가’와 ‘통속적인 장르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구분이 존재하는 듯 보입니다. 웹소설 시장과 출판 시장이라는 형식적인 차이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출판 시장 내에서마저도 그 구분이 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여기에서 다시 권위의 문제가 대두됩니다―노골적으로 말해 문학과지성사 혹은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했느냐, 교보스토리공모전 혹은 K스토리공모전으로 데뷔했느냐 하는 것은 큰 차이입니다.3) 후자로 데뷔할 경우 권말 평론이 붙을 가능성이 낮아집니다. 장르적 속성들과 사유가 결합한 글에 대하여, 담론과 계보를 읽어내고 권위를 부여해줄 사람이 부족합니다. 만약 평론이 붙더라도, 그것을 간판 삼아 문예지 기반의 단편 순환 시스템에 진입하기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주요 문예지의 청탁을 받아 단편을 발표하고, 이상문학상·젊은작가상·오늘의작가상 후보로 거명되거나 『소설 보다』에 반복적으로 수록되고, 이러한 권위 부여가 충분히 이루어진 후에 단편집을 묶어 출간하는 사이클로부터 배제된다는 것입니다.4) 따라서 그 구조 바깥에서 출발한 사람은 책을 많이 팔아서 어떻게든 평단에 눈도장을 찍거나(보면 알아볼 만한 글을 쓰더라도, 일단 보여야 할 것이 아닙니까?) 해외의 저명한 문학상이라도 받아오는 것이 아니라면 출신성분의 한계를 지고 맙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말하는 것은 우스워 보일 만합니다. 동시에 무례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저는 ‘평단에 눈도장을 찍는 작업’을 그럭저럭 빠르게 해낸 까닭입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제가 쓰는 글을 올바로 읽어주신 분들이 상당하다는 것으로, 함부로 이러한 발언을 할 경우 그분들의 성심을 무시하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강경한 논조를 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저와 동일한 의견을 가진, 아직 평단에 발견되지 않은 동료 작가들이 상당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제게 이 지면이 왔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글의 핵심을 역설적으로 방증하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질문은 정확히 이것입니다.

“중간소설(장르소설)이란 존재하는가? 중간소설 창작자의 입장을 들려 달라.”

거기에 대한 솔직한 생각은 이것입니다.

“제 글쓰기는 다른 누구보다도 포크너, 윌리엄 버로스, J.G. 밸러드, 브렛 이스턴 엘리스, 핀천, (비록 미국인은 아니지만) 루쉰과 이탈로 칼비노 등에게 크게 빚지고 있으며 영미문학의 독자라면 그 흔적을 세세히 발견할 수 있는데…… 한국 출판계는 앞서 나열된 작가들을 중간소설(장르소설) 창작자로 분류하진 않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는 중간소설(장르소설) 작가로 분류되는 것일까요? 종종 저는 한국에서의 장르소설이란 원 드랍 룰이거나 출신성분에 따른 흑오류(黑五類) 판정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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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물론 2010년대 이전부터 SF를 읽어온 사람으로서 <행복한책읽기 SF총서>와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을 가지고 있으며, SF의 속성을 지닌 글을 씁니다. 하지만 다른 글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읽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저는 각각의 작품을 ‘어떠한 목적에 의해 주의깊이 선별된 문학적 속성들이 결합하는 방식과 그에 따른 고유의 표현형’으로 파악하지 장르소설이라거나 순소설이라거나 하는 단선적인 분류로 바라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윌리엄 버로스와 포크너와 코맥 맥카시와 루쉰과 앨프리드 배스터와 돈 드릴로와 핀천과 척 팔라닉과 브렛 이스턴 엘리스와 시어도어 스터전과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와 J.G. 밸러드와 후안 룰포와 파스칼 브뤼크네르와 이탈로 칼비노와 카를로스 푸엔테스와 호르헤 볼피와 이원호를 동등한 반열에서 이해하고, 아무 편견 없이, 그 사람들이 가르친 문학적 속성들을 제 방식대로 재배치합니다.

포크너는 자신의 방식으로 추리소설을 써서 『나이츠 갬빗』을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그가 쓴 『성역』은 죄에 대한 사유인 동시에 범죄소설입니다. 그래서 저는 포크너가 보여준 길을 조금이나마 따라가기 위하여 『개와 소금의 왕국』을 썼습니다. 저는 J.G. 밸러드와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세계를 결합시킨 후, 브렛 이스턴 엘리스가 보여준 현대인의 내면을 끼워넣는 방식으로 『개의 설계사』를 썼습니다. 그것은 현대인의 근본적 불안과 실존을 다루는 심리주의·상징주의 관념소설이고, SF라는 속성은 그 총체성을 이루는 일부입니다. 돈 드릴로가 『제로 K』를 통해 현대를 이야기한 방식과 비슷하지요. 마찬가지로 『케이크 손』은 장르소설로 분류되긴 하지만 거기에서 나타난 환상성은 종래의 한국 문학이 보여준 마술적 리얼리즘을 넘지 않는 수준이며, 그 본질은 상징주의 관념소설입니다. 『인버스』는 금융소설이라는 니치한 장르로 분류되었지만, 거기에는 신학적 상징과, 현대적으로 변주된 고딕 테마와, 금융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연결이라는 주제의식 또한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돈 드릴로의 『코스모폴리스』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 요소들은 ‘알아볼 만한 지식이 있고 그럴 관용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곧바로 보이는 것이지만(실제로 그 뿌리를 알아볼 사람들은 정확히 알아본다는 사실은, 제가 잘못 쓴 것이 아니라는 근거가 됩니다), 반대로 관용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씨앗 스스로가 자신이 씨앗임을 알더라도 농부가 그것을 돌인 줄 알고 내버려둔다면, 또한 다른 씨앗들에 대해서도 그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농사가 망하고 맙니다. 그 점에서 저는 ‘중간소설의 미래, 문학의 미래’라는 주제가 실질 문학의 미래는 물론이고 현재마저 옭아매는 중이라고 봅니다. 중간소설을 자의적으로 호명하거나 규명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태도가 이미 존재하는 문학의 반경을 좁힌다는 말입니다. 가령 ‘통속소설’로 취급받는 웹소설 시장에도 후로스트의 『변방의 외노자』나 까다롭스키의 『고종, 군밤의 왕』, 검미성의 『21세기 반로환동전』, 위래의 『슬기로운 문명생활』, A사과의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처럼 탁월한 사유와 사변을 지닌 글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통속소설이나 중간문학이라는 구분선에 가둘 필요가 없다고, 작품 자체로 바라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즉 유수의 문예지 신인상을 통해 등단하지 않고 장르를 쓴다는 이유로 ‘너는 중간소설 작가다’, 유수의 문예지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다음 장르를 발표하면 ‘문단의 일원이다’ 하는 접근과 철저히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전자 및 후자의 사례를 2010년대 중반 이전의 것으로 몇 가지 댈 수도 있지만, 그들 각각에게는 큰 실례일 수 있으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단순한 SF가 아닌 문학이다”와 같은 수사가 칭찬일 수 있다는 관념을 배격해야 합니다. 순소설과 통속소설, 장르소설, 중간소설, 웹소설 등을 구분할 것 없이 개별 작품을 작품 자체로만 보아야 합니다. 작품의 가치는 작품 자체로만이 아니라 그것을 발견하여 명명하는 사람에 의해서도 생겨나며, 그 발견이 다시 장 전체의 풍요로움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윗글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래서 그 권력을 부여하고 승인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그 장은 무엇을 중심으로 삼아 어디까지 뻗어나가는가? 그것의 실체는 정확히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명은 굉장히 간략하게 얼버무려지고만 있지요. 그것은 지금의 형세가 ‘권위와 반권위의 이원적인 대립’보다는, ‘문화적 핵심·준주변부·주변부 사이에서 발생하는 권력 작용과 각종 불문율의 총체’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미시적으로는 ‘장르적 속성들을 의미 및 기능 수준으로만 환원시키는 대신 그 자체로, 적극적으로 호명해온 평론가’와 ‘경계를 나누지 않고 작품을 판단하는 편집위원·편집자·독자’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이들은 분명히 존재하며, 저는 그들에게 깊이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 사람들도 있으며, 그러지 않는 정도와 방식 또한 상이합니다. 이에 더해 기존 권위와 관행, 국가의 제도적 승인 절차, 마케팅이 작품에 부여하는 이미지 등은 개인적 신념과 다른 궤에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복잡성을 일관적인 이론틀 안에 정렬시킴으로써 핵심·준주변부·주변부의 작용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훨씬 긴 글이 필요할 것입니다.

 

1)  이 문장은 『한국문학과 그 적들』(조영일, 도서출판 b, 2009)을 비롯한 조영일의 『한국문학비판 3부작』의 전반적인 논지와 연결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2)  저는 이따금 『위험한 비유』(2019)와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2024)의 보도자료 논조를 비교하면서, 5~7년 사이에 발생한 한국문학의 상업적 전회에 대해 생각합니다. 최제훈은 항상 최제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를 소개하는 말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 변화에는 당연히도 상업적 결정에 따른 한국문학의 장르 수용 기조(속된 말로, 김초엽·천선란 등이 이끌어낸 상업적 성공 및 평단의 승인이 SF를 부끄럽지 않을 라벨로 탈바꿈시켰다는 겁니다)가 숨어 있겠지요. 이 전회는 사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2008)가 사실상 통속소설의 구조를 채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엿한 문학으로 극찬받았던 데에서부터, 더 과거로 가자면 ‘책을 많이 파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일이 되었을 때부터 감지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대중과 소통하는 것, 장르를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통속이고 저것은 아니다 하는 형식적 구분을 허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연의 확장 혹은 수용이 결국 승인과 폄훼의 논리를 따름으로써 ‘승인된 이에게는 상징을, 바깥의 존재에게는 폄훼를 부여하며, 기존의 권력 관계를 연장시키는 동시에 시장성을 예외조항 삼는 식으로, 미학·문학적 기준보다는 어떠한 형식적이고 외재적인 기준을 의식하는 상태로’ 작동하게 된다면, 저는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3)  장편 공모 당선자에 대한 대우는 이 둘 사이의 어느 지점에 위치합니다. 이때 장편 공모 당선자가 문예지 기반 단편 순환 시스템에 진입함에 있어서는, 주최사가 언론사인지(수림·세계·한겨레 등), 지자체를 비롯한 각종 비문예단체인지(무예소설문학상 등), 출판사지만 자체 문예지 브랜드를 보유하지 않았거나 그 등용문으로서의 상징자본이 비교적 약한 곳인지(넥서스경장편작가상, 황산벌청년문학상­(주관사인 은행나무출판사의 문예지인 Axt는 신인문학상을 운영하고 있지 않음) 등), 자체 문예지의 상징자본이 강력한 출판사인지(문학동네·창비­(2020년을 마지막으로 폐지)·자음과모음 등) 하는 문제가 가장 큰 관건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다시 권력과 권위의 문제를 드러냅니다. 이는 근 15년간의 ‘문예지 신인상 수상자’와 ‘장편 공모 당선자(언론사 및 비문예단체 기반·문예지 보유 출판사 기반·문예지 비보유 출판사 기반)’들의 활동 내역을 유형별로 분류함으로써 비교적 쉽게 증명될 수 있습니다만, 여기에서는 지면의 문제로 생략하겠습니다.

4)  문예지 기반 단편 순환 시스템의 존재는 여러 평론가들이 지적했을 뿐만 아니라 천명관이나 손아람 등의 장편 위주 작가들도 불만을 표한 바 있으니 추가적으로 논증하진 않겠습니다.

단요
소설가
장편소설 『다이브』 『인버스』 『마녀가 되는 주문』 『개의 설계사』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케이크 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