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간의 속성
중간문학의 ‘중간(middlebrow)’에는 ‘고급(highbrow)’이 아니라는 경멸이 얼룩져 있다. 애초에 ‘눈썹(brow)’ 높이로 대상을 정의하는 표현은 골상학에서 나왔다. 얼굴만 봐도 상대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골상학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 이는 과학에서 금세 퇴출되었으나 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OED)은 ‘middlebrow’를 ‘보통 수준의 지성이나 관심사’를 칭하는 경멸적인 용어로 정의한다.
그런데 보통(moderate)이나 중간(middle)을 어떻게 구획할까? 위와 아래로 ‘급’을 나누는 경우 중간은 위(high)가 아니지만 아래(low)에도 속하지 않는 여집합이다. 그렇다면 중간문학을 확인하려면 위(‘순수소설’)와 아래(‘통속소설’)의 구별을 살필 필요가 있다. 어느 쪽으로도 포섭시키기 어려운 접경지대가 중간의 핵심 영역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위와 아래의 경계를 더듬음으로써 역으로 중간의 속성을 도출하고자 한다.
2. 대중성
영어사전 외에도 일본에서 확립된 ‘중간소설(中間小說)’의 의미를 확인하면, 전후 시기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하는 대중의 수요에 맞추기 위해 순문학 작가가 대중문학을 창작하다 보니 ‘고급스러운 대중문학’이 생겨나 이를 중간소설로 칭했다고 한다.1) 윗물(순문학)과 아랫물(대중문학)이 섞이는 바람에 순문학이 변질했다는 평가도 뒤따른다. ‘대중문학’처럼 대중성을 추구하는 작품은 으레 누구나 읽기 쉽게 만들어진다. 대중성은 익숙한, 쉬운, 감상적인, 오락적인, 관행적인, 상업적인, 지적으로 게으르다는 의미로 자주 확장된다. 대중문학 독자는 자신만의 지적 모험을 떠나길 거부하고, 편안하고 표준적인 작품에 안주한다는 평을 듣는다. 이를 한탄하는 목소리에는 문학 독자가 마땅히 ‘위’를 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러나곤 한다.
“중간문학이 수반하는 한 가지 문제는 저속하거나 수준 낮은 통속소설이 중간소설의 탈을 쓰고 베스트셀러가 되어 부상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 우리의 경우에는 독자들의 분별력이 아직 낮고 비평가들의 책무 의식이 아직 약해서인지, 질 낮은 통속소설이 중간소설 행세를 하고, 아무런 제동 없이 바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가 많다.”2)
통속문학과 달리 “진정한 중간문학은 재미있으면서도 감동적이고, 세계적인 관심사를 다룬 무거운 주제로 독자들에게 깨우침과 깨달음, 그리고 인식의 확장을”3) 준다고 한다. 설령 대중성을 갖추었더라도 ‘문학’답게 독자의 세상을 넓히면 진정한 중간문학이 되는 듯하다. 이렇게 ‘순수문학’과 ‘진정한 중간문학’을 바라보면 둘 사이에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대중성이다. 물론 매우 모호한 구별이다. 중간문학이라는 표현을 비난하며 진정한 예술을 옹호하던 버지니아 울프 등의 문인들 역시 대중적인 지면에 글을 실었다. 이는 당시에도 고급과 중급, 순수와 대중의 기준이 막연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1세기가 지난 근래에도 “그 둘을 구분짓는 잣대가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다.”4) 어차피 우리는 “고급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가 흐려져 우리가 그 둘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하게 되어 버린 시대에 살고”5) 있다. 그럼에도 고급/대중, 순수/통속을 구별하면서 중간문학을 규정한다면, 대중성 및 그에 수반되는 다양한 경멸적 함의가 여전히 주요 속성으로 꼽힐 듯하다.
3. 문학성
대중적이지 않은데도 순수문학에서 제외되었던 작품군을 고려하면, 작품 자체의 성격 역시 대중성만큼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했다. 이를 문학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문학성에 따른 위계는 통속문학이나 대중문학이 장르문학으로 대체되는 중에도 꾸준히 유지되었다. 통속·대중·장르는 각기 다른 개념이지만 “도식적으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존의 용어들을 대체하는 용어로 유용”6)되었다. 장르문학을 명확히 규명하지 않고 대중문학의 유의어로 뭉뚱그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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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장르문학의 대표 주자라 할 만한 SF는 ‘문학 바깥의 문학’일 뿐만 아니라 “소수 마니아만 읽는 주변부 문학”7)이었다. 현세대 한국 SF의 고전으로 꼽히는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에는 드물게도 본문 앞에 작가의 머리글과 문학과지성 편집 동인의 평가가 들어갔다. 두 글은 ‘대체 역사’의 개념을 설명하고 이 소설이 어떻게 ‘문학’일 수 있는지 변론하는 역할을 했다. 혹은 2022년에 정보라의 『저주토끼』가 부커상 번역부문 최종후보로 선정되었을 때는 한국에서 장르문학이 그동안 “장르적 특징을 살리려는 클리셰 남발, 통속적인 이야기란 선입견으로 작품성이 저평가됐다”8)는 술회가 나왔다. 『저주토끼』에 쏟아진 관심과 호평은 분명 어색한 구석이 있다. 2017년에 출간된 이 단편집의 표제작 「저주토끼」는 2016년에 발표되었으며, 수록작인 「머리」의 경우 1998년에 나왔다. 아무리 작품이 출간 후 알려지기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20년이 넘도록 꾸준히 작품을 발표한 작가를 마치 어제 발견한 것처럼 환영하는 모습을 보면 ‘선입견’을 곱씹게 된다.
장르문학을 ‘순수문학’보다 저평가하는 데에는 리얼리티를 문학적 수준의 척도로 삼는 근대의 문학관이 작용했다. 미메시스 중심으로 소설(novel)을 판단하는 관점은 현실을 충실히 모방하는 문학일수록 더 발달한, 더 가치 있는 예술이라고 보았다. 반대급부로 “비현실적인 요소들로 가득 찬 과거의 서사물들은 리얼리티를 지닌 근대 소설에 ‘미달’하는” 것으로 규정되고, “미메시스적인 요구를 외면”하는 소위 장르문학은 “리얼리즘적인 소설에 비해 덜 중요하거나 주변적인 장르로9)” 평가되었다. 멜로드라마나 신파 역시 현실을 충실히 모방하기보다 드라마틱한 전개를 이용해 감정을 과잉 자극한다는 점 등으로 저속하다는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문학의 리얼리티를 가늠하는 잣대는 어쩔 수 없이 편협하고 주관적이다. 독자의 현실관과 일치하느냐로 리얼리티의 점수가 매겨지기 때문이다. 독자가 인식하는 리얼리티는 “리얼리티의 환영(illusion)”이며,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느끼는”10) 것이다. “달리 말하면 리얼리티란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상식이나 여론과의 일치 여부에 근거하는 것”11)에 불과하며, 이는 특정 시대와 장소에서만 한시적으로 성립하는 표준이다. 그러니 과장해서 표현하면, 리얼리즘 문학은 주류 현실 규범에 부합하는, 쉽고 관행적이며 지적으로 게으른 문학이다. 반면 SF의 미학 중 하나는 숭고함, “상상력이 확장되는 충격, 갑자기 너무나 거대해서 불가해하다고 인식되는 현상에 대해 대처하는 자의식의 복잡한 반동과 회복”12)을 야기하는 데 있으며, 다르코 수빈의 개념을 빌리자면 ‘인지적 소외’를 일으키는 점이야말로 SF의 핵심이다. 마침 어슐러 K. 르 귄은 리얼리즘에 비해 SF를 경시하는 관점을 비틀어 농한 적이 있다. “리얼리즘(Realism)이란 상상력이 위축되어 가장 폭 좁고 관습적인 주제밖에 즐기지 못하는, (…) 낡은 클리셰와 뻔하디뻔한 상황이 가득한 믿을 수 없이 편협한 장르라는 걸 알죠. (…) 구식 방법론과 제한된 주제의 리얼리즘은 현대 경험의 복잡성을 그려 낼 수가 없어요.”13)
‘중간문학’이라는 용어는 위와 같은 반박을 향한 재반박으로도 읽힌다. 현실감을 비껴가면서도 문학의 기능을 하는 별도의 중간 영역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모순을 저지르지 않고 리얼리즘의 환영을 계속 문학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중간문학은 원래의 어원(중산층과 중간문화)보다 마술적 리얼리즘, 초현실주의, 포스트모던, 메타픽션, 아방가르드, 실험 소설처럼 기존의 문학관에 불일치하는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도 있다.
4. 이상함
‘순수문학’이 통속·대중·장르문학과 겹치며 ‘중간문학’이 나왔다면, SF에서는 20세기 후반에 ‘슬립스트림(slipstream)’이 제시되었다. SF 아닌 ‘문학(mainstream)’ 작가가 SF 기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증가하며 장르의 순수성이 변질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브루스 스털링은 “낯선 것” 혹은 “이상한 느낌”을 선사하는 작품을 총칭하는 약어로 슬립스트림을 제안했다. 그는 20세기를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느낌을 알고 자신의 목록을 댈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슬립스트림이 하나의 장르로 존재한다는 근거라고 역설했으며14), 주로 프란츠 카프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토머스 핀천 등이 슬립스트림의 초기 사례로 호출되었다.
물론 독자의 느낌 혹은 미적 감수성에 의존하는 정의는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무의미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적용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슬립스트림이 주목받은 이유는, 문학을 논하는 이들이 리얼리즘과 사변소설, 주류와 장르의 경계를 넘어 서로 다른 영역을 교잡하고 순수성을 오염시키는 하이브리드를 자꾸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슬립스트림은 어쨌거나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그것’을 가리키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지금 중간문학을 새삼 곱씹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기존의 이분법을 어그러뜨리는 혼종성을 감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이보그가 인간-기계의 잡종으로서 하이픈 양쪽을 모두 변질시키듯이 ‘중간’은 위와 아래가 첨예하게 갈리는 지점이면서 경계를 무화시키는 소용돌이의 중심부였다. 그렇다면 중간문학의 내재적 구조는 불명이며, 이 개념은 우리가 혼란스럽게 엉킨 타래를 마주하고 그 갈래를 하나하나 만져볼 준비를 해야 한다는 점을 촉구한다.
1) “중간소설”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네이버 백과사전으로 확인.
2) 김성곤, 「문학과 정치의 경계를 넘어서」, 『경계를 넘어서는 문학』, 민음사, 2013.
3) 김성곤, 위의 글.
4) 김성곤, 위의 글.
5) 김성곤, 위의 글.
6) 텍스트릿, 『비주류 선언』, 요다, 2019.
7) “코로나 시대…날개 단 ‘한국 SF문학’”, 〈이데일리〉, 2022. 1. 19.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220166632199360
8) “정보라 ‘부커상’ 선전…“장르 다양성 확보·외연 확장” 기대감”, 〈연합뉴스〉, 2022. 5. 27. https://www.yna.co.kr/view/AKR20220526138900005
9) 박진, 김행숙, 『문학의 새로운 이해』, 민음사, 2013.
10) 박진, 김행숙, 위의 글.
11) 박진, 김행숙, 위의 글.
12) Istvan Csicsery-Ronay Jr., The Seven Beauties of Science Fiction, Wesleyan University Press (2011), 146p.
1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황금가지, 2021, 38-39쪽.
14) Bruce Sterling, “Slipstream”, #5 July 1989. https://www.journalscape.com/jlundberg/pag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