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① 하이브리드, ‘중간소설’

  • 기획특집
  • 2024년 가을호 (통권 93호)
① 하이브리드, ‘중간소설’

문학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업(業)으로 삼은 이래, 내 생각엔, 화자와 명칭만 바꿔 주기적으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문학 담론이 있는 것 같다. 30년 정도 한국문학판 안팎을 오가면서 관찰한 결과이다. 하나는 ‘문학의 죽음’이며, 다른 하나는 ‘문학의 새로움’이다. 문학 대신에 ‘소설’이나 ‘시’를 넣어도 무방하며, 간혹 ‘비평’이 ‘문학’, ‘소설’, ‘시’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한쪽만 이야기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문학의 죽음’을 말하게 되면 ‘죽은 문학’을 갱생할 새로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게 되어 있었다. 이럴 때 문학은 마치 산송장 같다. 물론 지난 30년 동안의 문학 담론이 좀비 제조 공장이라는 뜻은 아니다. 반복이 있으면 차이도 있게 마련이다. 어떤 담론이든 그것의 현상과 구조를 함께 염두에 두자는 뜻이다.

소설로 좁혀 말해보면, ‘소설의 죽음’이라는 어휘도 문학을 처음 진지하게 생각했던 스무 살 무렵인 1990년대 초반에 마주했고 이후에 다양한 양상으로 반복되었던 것 같다. 그 담론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되었는데, 물론 어디까지나 내가 첫 발을 디디기도 했던 문단문학 편에서 나온 발화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 태초에 소설(문학)의 죽음이 있었고, 그 원인은 소설의 외부나 내부에 있었다. 외부와 내부는 대체로 뫼비우스의 띠마냥 연결되었다. 요인이 외부에 있더라도 그것은 내부적인 갱신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었다. 영화 등을 비롯한 미디어와 매체가 외부의 요인으로 지목되었으며, 그때 소설은 이른바 본격문학, 순문학, 문단문학의 대표격이었다. 그 맞은편에 대중문학, 장르문학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중문학, 장르문학은 미디어(매체) 친화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렇다면 중간문학 또는 중간소설은 본격문학 대 장르문학이라는, 고질적으로 재생산되는 이분법을 완화하거나 둘 사이를 중재하는 어휘일까.

중간소설이라…… 고백하자면, 내게 ‘중간소설’은 직관적으로 다가오지만 장르소설이나 대중소설보다는 아무래도 덜 친숙하고 조금은 심심하게 느껴지는 어휘이다. 옛 신문과 논문, 사전, 비평 등을 조사했더니 나름 족보가 있긴 하지만 다소간 혼란스러운 어휘임은 알겠다. 중간소설은 본격소설과 대중소설의 이분법을 지양한 참신하고도 이상적인 문학적 개념으로 정의되지만, 그보다는 대중소설(장르소설)과 사실상 같은 뜻을 내포한 조어(造語)였다. 요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본격문학과 대중문학 등의 위계와 이분법은 반복되어온 구조였으며, 그 양상은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중간소설은 일본이나 미국의 그것과는 다소 다르게 대체로 일방향적으로 부정적인 어감과 평가를 내포한 대중소설(장르소설)과 별 다를 바 없는 어휘였다.

족보의 첫머리로 거슬러 올라가면, 1962년에 출간된 『문예대사전』(학원사)은 ‘중간소설’(中間小說)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순문학과 대중문학의 중간을 가는 소설”, “순문학자가 쓴 반통속(半通俗)의 읽을거리”. 사전에 따르면, 중간소설은 1930년대부터 나타났고, 전후(戰後)인 1948년 이후 저널리즘의 득세로 유행했으며, 대표작가로는 『돈황』의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가 있다. 일본문학사전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지만 ‘중간소설’은 1958년 전후로 국내에 창간된 《소설계》, 《소설공원》, 《대중문예》 등의 명시적인 창간 의도였으며, 실제로 자주 사용되는 어휘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중간소설은 문학적 교양과 오락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소설이었다. 물론 중간소설은 그 의도와는 달리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으며, 문단문학 비평가 등에게 비판의 타깃이 되었다. 1950년대에 활약한 문학비평가 김우종은 중간소설의 취지는 “이상적”이지만, 실제로 그 결과물은 “본격소설의 독자를 통속소설 독자로 저하시키며, 본격 문학자를 통속문학자로 타락하게 만든다”고 보았다(조선일보, 1959. 1.). 김우종만 하더라도 대중소설의 장처(長處)를 얼마간 인정했지만, 10여년 후에 출간된 또 다른 문학사전은 중간소설에 대해 전보다 훨씬 박절한 평가를 내린다. 비록 “순문학의 대중화”라는 의의를 인정하더라도 중간소설은 “문학의 사회적인 퇴폐현상”이며, ‘순문학’ 작가들이 이러한 작품을 쓸 경우 “본래의 엄격한 작가정신을 왜곡 상실”한다는 것이다(『한국문학대사전』, 문원각, 1973). 그 즈음에 완성,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를 한국현대화의 대표와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던 것만큼이나 문단문학은 중간소설, 대중소설 등 다른 지름길이나 경로를 배제하거나 없는 것인 양 취급하면서 자신을 ‘문학’으로, 문학의 대표로 공고하게 상징화했다.

중간소설에 대한 문학적 논의는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중간문학은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중간적인 위치와 경계에 자리한 엄연한 문학적 실체라기보다는 부정적으로 가치폄훼된 대중문학(장르문학)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중간소설에 대한 논의의 일부는 대중문학의 창작과 비평이 활발한 외국의 사례를 성급하게 들이민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지만, 문학의 상업주의적 타락이나 질적 저하 등 일방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아무래도 ‘중간소설’이 출현하게 된 사정과 맥락에는 대중문학의 가능성을 긍정하고 옹호하는 문화적 토양이 얼마간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일본만 하더라도 대중문학에 대한 비평과 논의는 이미 1930년대에 출현했다. 『나오키의 대중문학 강의』(북스피어, 2011)의 저자인 일본의 소설가 나오키 산주고(1891~1934)는 순문학(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독단적인 득세, 책을 읽을 수 있는 대중의 성장 등을 두루 염두에 두고 대중문학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알다시피 나오키 상은 나오키 산주고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일본의 주요한 문학상으로, 상을 수상한 작가와 작품의 목록은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이러한 문화적 맥락의 연장에서 1950년대에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미시마 유키오 등 본격문학 작가가 대중잡지에 ‘중간소설’을 연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미국에서 중간소설에 대한 논의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레슬리 피들러의 비평(「경계를 넘어서고 간극을 메우며」)은 1960년대에 출현했다. 그는 대학 강의실에서나 읽는 고급 모더니즘 문학인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대신에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중간문학(middlebrow literature)을 더욱 의미 있는 것으로 취급하자고 주장했다. 우리에게는 생소해 보이지만, 《플레이보이》를 비롯한 대중잡지에 발표된 피들러 글의 반향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물론 그것은 시와 비극과는 다른 소설 장르 특유의 하이브리드(잡종성, hybrid)을 강조한 논의였다. 생각해보면 본격문학의 고전으로 알려진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50세에 이르도록 기사도 소설의 스토리와 무훈(武勳)을 머리에 잔뜩 집어넣은 한 망상적 늙은이의 우스꽝스러운 세상 분투기이지만, 무엇보다도 동시대 스페인 기사도 소설들과 기사도적 가치에 대한 하이브리드적인 패러디물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나폴레옹적 이상주의를 지닌 범죄자 청년이 대지에 입을 맞추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기에 이르는 벅찬 감동의 서사시이지만, 동시대 범죄소설의 기법에 대한 상세한 참조와 다성적인 전유로 태어난 형이상학적인 소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설의 하이브리드를 강조하는 것만으로 본격문학과 중간문학(또는 장르문학)을 분할하는 고질적인 빗금(/)을 지우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다행히도 글을 쓰는 2020년대의 문학장은 본격문학과 중간문학(또는 장르문학)에 대한 가치평가에서 위계를 만들고 분할을 작동시키려는 움직임이 전보다 많이 완화된 분위기이다. 여전히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이분법은 작동하지만, 그저 반복되는 구조로만 환원되지 않는 차이도 도드라져 보인다. 적어도 문학평론가가 스티븐 킹의 소설을 ‘고급중간문학’(?)으로 괴상하게 명명하는 일이 문학 독자에게는 우스꽝스러운 누습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2020년대는 무엇보다도 유래없는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의 전성기여서 국내외 독자들은 정보라 작가의 과학소설이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기도 했다. 전에는 과학소설을 공상과학소설로 지칭하는 것에 반발했지만 지금은 사이언스 픽션을 공상과학소설로 불러도 소리 높여 반박하지는 않거나 슬쩍 미소 지으면서 교정해주는 정도이다. 이미 과학소설의 가치와 의미가 한국문학의 중추에 얼마간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이 중간소설이라는 어휘가 활발하게 사용될 수 있는 타이밍이라면 그것은 과학소설과 같은 ‘장르소설’의 활발한 생산과 성취 덕분이기도 하다.

평론가인 내게 중간소설(중간문학)이라는 용어는 아직까지는 임시방편적이다. ‘중간소설’이 장르 간의 위계와 분할을 만들면서 없애버리거나 무시한 하이브리드적인 요소들을 복원하고 창출하는 잠재력을 내포하는 어휘로 사용할 수 있다면 좋겠다. 여기서 하이브리드란 소설 장르의 잡식성이나 혼종성을 뜻하기보다는, 예를 들면, 자연과 문화를 분할하고 자연을 과학에 위임함으로써 문화와는 무관한 영역에 두는 습속을 철폐하는 사유와 감각 그리고 그것들의 재발명을 뜻한다. 하이브리드는 『프랑켄슈타인』(1818)과 같은 과학소설이, 그와 동시대 작품으로, 결혼 문화와 풍습을 그린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1813)과 같은 본격소설에 비해 부당한 취급을 받았는지를 설명해준다. 지금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상상력을 촉발한 탐보라화산 폭발(1815)의 ‘기후’가 『오만과 편견』의 배경인 롱본의 ‘날씨’보다도 더 중요해진 시대를 살고 있다. 또한 하이브리드는 비인간이나 사물이 인간 주인공을 위한 한낱 배경이나 부수적 사건으로 머무는 서사적 관행에 변화를 불러올 것을 요청한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화두이자 실상인 팬데믹, 기후변화, 인공지능의 발달이 초래한 인간과 비인간의 초연결망을 재현하는 소설(서사)은 어떠한 형태일까.

글을 준비하면서 다시 읽은 소설들로, 2021년에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고 국내외에서도 적잖은 독자를 확보 중인

 

 

네덜란드 출신의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의 연작소설집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2022)와 『매니악』(2024)은 앞서 말한 하이브리드적인 감각으로 쓰여진 매혹적인 중간소설로 기꺼이 소개할 만하다. 놀라울 정도로 흡입력 있는 스토리텔링, 천재 과학자들의 전기적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중첩시키는 감각, 인간과 그 발명품인 AI의 위태로운 주종 관계를 묘파하는 동시대적인 문제의식, 블랙홀과 인공지능을 발명한 인간 이성의 경이와 그것이 초래한 광기에 대한 사변 등이 라바투트의 작품에 담겨 있다. 특히 『매니악』 덕분에 나와 같은 한국의 독자는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세기적인 바둑 시합(2016. 3.)에 담긴 심오한 과학적, 문화적 의미를 체감하는 행운을 얻었다.

인간과 비인간의 존재론적 평등이라 할 만한 감각도 라바투트의 두 소설집에서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그 감각은 담론적인 강조보다는 서술적인 효과에 힘입고 있어서 뜻깊다. 예를 들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의 첫 번째 작품 「프러시안블루」의 ‘프러시안블루’는 매혹적인 푸른색을 내뿜는 합성안료이자 독극물이다. 이 단편은 인류에게 치명적인 독극물과 인류를 먹여 살릴 인공 질소를 함께 발명한 유대계 독일인 천재 과학자의 아이러니한 일대기로 읽힌다(인간적 독법). 그렇지만 프러시안블루가 주(主)가 되고 그것을 발명하거나 프러시안블루에 중독된 인물들(나폴레옹 장군을 포함해)이 종속되는 서술적 전도가 확연한 작품으로도 읽을 수 있다(비인간적 독법). 『매니악』도 천재 중의 천재라고 할 만한 과학자 존 폰 노이만(1903~1957)의 생애, 과학적 아이디어와 발명에 얼핏 주력하는 듯 보이는 소설이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인간과 비인간의 전도에 대한 흥미로운 발상 또한 작품에 담겨 있다. 『매니악』의 한 대목을 직접 인용하면 자연적 생명이든 디지털 생명이든 “생명을 발원하는 진화의 과정에서” 인류의 역할은, 폰 노이만과 같은 천재의 노력을 포함하더라도, “부차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도적인 자기비하가 아니다. 그것은 인공지능이든, 생명의 우주든 자기조직화하는 존재의 창발적인 현실(reality)의 일부이다. 『매니악』이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의 서사가 빚어내는 아찔하게도 매혹적인 혼돈의 난류(亂流)를 실감하면 절로 수긍가는 현실이자 표현이다.

중간소설의 ‘중간’은 처음에는 아무래도 밋밋하고 평평하게만 느껴지는 용어였다. 하지만 중간이 실제로는 요동치고 변화무쌍하며 혼돈에 가까운 하이브리드적인 난류임을 실감할 수 있다면, 또 그런 실감을 주는 작품이 쓰여진다면, 만일 그럴 수 있다면, ‘중간소설’은 그만의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복도훈
평론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73년생
평론집 『눈먼 자의 초상』 『SF는 공상하지 않는다』 『유머의 비평』 『키워드로 읽는 SF』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