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위에 글을 쓴다. 이때 백지를 자연이라고 한다면 글은 인위이다. 자연 위에 인간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글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때에도 백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인공이 백지가 아니라 글로 보일 따름이다. 백지는 말없이 글의 토대를 지킨다. 허공이 없이는 꽃이 필 수 없는 것처럼, 백지가 없이는 글은 생성될 수 없다. 그러나 로고스 중심주의에서 백지란 없음이다. 이성적인 합리 속에 지각되지 않는 비존재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 장르에서 백지, 즉 텅 빈 여백의 미의식은 각별히 중요하다. 시에서 여백은 ‘없음’이 아니라 ‘있음의 없음’이다. 시적 여백은 인위에 의해 호명되고 깨어난 자연이 들고 나며 활동하는 산 공간이다. 여백이란 하이데거의 예술 작품에서 진리의-작품-속으로의 정립을 위한 ‘열린 중심’에 상응한다. 하이데거에게 ‘열린 중심’은 뭇 존재자들의 우주적 존재성을 세계의 가운데로 불러들여 현존할 수 있도록 주관하는 신전이다. 여백은 있음의 없음, 즉 만상의 구성을 주관하는 ‘활동하는 무(無)’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말의 자발적 가난을 추구한다. 말의 자발적 가난을 통해 여백의 무한을 얻고자 한다. 일찍이 노자는 『도덕경』에서 “多言數窮 不如守中”(다언수궁 불여수중), 즉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차라리 그 비어 있음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비어 있음을 가리키는 중(中)은 도(道)와 다름이 없다. 말의 풍요는 오히려 그 풍요로움으로 인해 길(道)을 잃게 되고 도(道)의 소통을 막게 된다. 반면에 풀무의 내부와 같은 비움은 생성의 무한으로 열려 있다(虚而不屈动而愈出). 허(虛), 즉 여백은 삶의 바깥이면서 안에 해당하는 자연이며 우주다.
생명 사상의 시인 김지하는 이렇게 노래한다, “짧은 침묵이 / 가장 긴 시간 // 이 시간 속을 / 고양이 울음이 지나고 / 바람 소리도 지나고 / 내 마음 나들이도 지나고”(「침묵」). 시의 행간을 이루는 “침묵”에는 우주 삼라만상이 중중무진(重重無盡) 살고 있다. 그래서 “가장 긴 시간”이다. 말은 유한하지만 “침묵”은 우주적 무한을 호흡한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시편을 쓰기도 한다. “말의 풍요는 범죄 / 행갈이조차 하지 않는 / 현저한 유한을 보라 // … // 말의 / 자발적 가난은 / 이제 / 시 이상이다 // 그것은 개벽”(「가난」) “말의 자발적 가난”이 새로운 세상을 향한 “개벽”의 틈새라는 일갈이다. “말의 자발적 가난”은 여백을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는 행간의 여백을 통해, 숨은 근원의 질서, 즉 우주 생명의 신성이 드러난 질서와 교감하면서 새로운 차원 변화를 이루어나가는 가능성을 직시하고 있다. 이처럼 시적 여백은 “개벽”을 열어나가는 ‘활동하는 무’이다.
물론 이것은 비단 시 장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근대 산업문명의 일상성 속에 자연 혹은 우주 생명이 소통할 수 있는 ‘여백’을 열어가는 작업이 요구된다. 17~18세기 이래 진보 신화를 내세우며 질주해 온 근대산업 문명은 물질적 이기와 발전을 거듭하였으나, 한편으로 인간 소외, 생태계 파괴, 생명 가치 상실이라는 치명적 위기를 초래시키고 있다. 기후 재앙을 비롯하여 식량 위기, 핵전쟁 공포, AI의 불투명한 미래 등이 동시적으로 지구 행성과 인류사회 멸절의 임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제 근대 기계 주의적 패러다임의 주체 중심주의를 넘어서 인간, 자연, 우주를 연속성, 순환성, 관계성 속에서 재인식하고 사유하는 우주 생명 공동체적 세계관과 실천 의지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렇다면 그 출발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로고스 중심주의의 의미 사슬을 성글게 하여 틈을 내는 작업, 그리하여 여백이 주인으로 부상되는 지점이 그 출발점이 아닐까? “말의 자발적 가난은 이제 / 시 이상이다 // 그것은 개벽”이라는 김지하의 노래를 새삼 되새겨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