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술과 도덕 사이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에서 바이올린 동아리 활동을 한 적이 있다. 지도를 해주신 선생님은 6학년 담임이었는데, 스스로 학생들을 모집해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으면서 가르쳐주실 정도로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깊었다. 비어 있는 교실에서 혼자서 바이올린 연주에 몰입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런데 그분은 매우 상반되는 행동을 종종 드러냈다. 말을 듣지 않는 학생들을 너무 거칠게 대한 것이다. 그분이 담임을 맡았던 학급에는 보육원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대여섯 명 있었는데, 이런저런 말썽을 피우면서 골치를 썩였다. 선생님은 그 아이들을 혹독한 체벌로 통제했다. 누나가 그 반에 있어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끔찍한 아동 학대 수준이었다.
고등학교 때 어느 선생님이 생각난다. 굴지의 문학 출판사에서 시집을 출간하신 시인이었다. 늘 잔잔한 어조로 말씀하셨고 수업 중에 때때로 시(詩)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문학적 감수성을 일깨워주시기도 했다. 그런데 1년에 몇 번 분노가 폭발하는 날이 있었다. 수업 태도가 불량한 학생을 불러내 체벌을 했는데, 결코 사랑의 매가 아니었다. 명백한 폭행이었다. 솟구치는 화를 욕설로 쏟아내면서 마치 조폭들이 싸우듯이 주먹과 발길질로 학생을 두들겨 팼다. 오랫동안 눌러온 응어리가 갑자기 터져 나오는 듯한 장면이었다. 나의 학창 시절을 통틀어 그분은 가장 잔혹한 교사 가운데 한 분으로 기억된다.
예술은 인성을 정화하고 고귀한 정신세계로 이끈다고 흔히 말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상황들 앞에서는 회의감이 든다. 이따금 들려오는 뉴스들도 예술의 존재 이유를 되묻게 한다. 음악·미술·무용·연극·영화·문학 등 여러 장르에서 교수와 학생, 선배와 후배, 감독과 배우 등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폭행·갑질·성추행 등의 비리 말이다. 예술가들이 대체로 섬세하고 예민한 데다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다 보면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탓도 있으리라. 그리고 예술계의 폐쇄적인 구조와 가부장적 위계서열 문화가 잘못된 관행을 방치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환경에 탓을 돌리면서 그런 행태를 변호할 수는 없다. 난관에 굴하지 않고 인간성을 세우는 내공이 예술가에게는 필요하다.
예술가가 아니면서 예술을 사랑하는 보통 사람들도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보일 때가 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대표작 <시계태엽 오렌지>(1974)에서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즐겨듣는 주인공은 친구들과 어울려 온갖 패륜을 서슴지 않는다. 어느 날 그는 부하들과 함께 어느 작가의 집에 느닷없이 쳐들어가 작가를 구타하고 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의 아내를 윤간한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도 인지 부조화를 느끼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독일군들이 유대인들이 숨어 있는 어느 건물을 습격하여 숨어 있던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있는데, 지휘 장교는 옆방에서 피아노 앞에 앉아 태연하게 바흐를 연주한다. 하인리히 뵐의 소설 「아담,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에서도 아리안족의 완전함과 예술의 위대함을 흠모하는 아우슈비츠의 수용소 소장이 어느 유대인 여성에게 노래를 부르게 한 다음 가차 없이 총살한다.
그러한 상황 묘사는 과장이 아니다. 히틀러가 바그너를 추앙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나치의 핵심 권력자들은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종종 관람했다(당시의 정치 엘리트들 가운데 인문적 교양이 높은 사람들이 많았다. 대중 심리를 조작한 선전 선동의 귀재 괴벨스는 독문학 박사 학위 소지자로서 소설가의 꿈을 키우고 음악도 즐겨 듣던 문학청년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악명이 높았던 학살의 기획자들 가운데서도 슈베르트나 모차르트 애호가가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가스실에 사람들을 집어넣을 때 가볍고 명랑한 음악을 틀도록 했는데, 죄책감을 덮는 자기기만의 도구로 쓰였다고 평가된다.
인간은 본래 모순으로 가득 찬 존재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마음이 인류에 대한 폭력과 공존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오스카 와일드의 말대로 ‘예술은 본질적으로 부도덕한 것’인가? 심미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예술을 사랑하는 감성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2. 심미적 감성과 인권 감수성
예술은 삶을 토대로 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허구적 성격을 갖는다. 일상의 다양한 경험을 의외의 방식으로 표현하면서 멋진 신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의 제약을 넘어서는 다른 가능성을 여러 갈래로 암시한다.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고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신념을 뒤흔든다. 엉뚱한 짓으로 금기를 깨부수고, 욕망의 솔직한 표출로 도덕주의적인 위선을 고발한다. 그러므로 예술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자유다. 고루한 통념과 구태의연한 관행, 그리고 억압적인 권력에서 탈출할 수 있는 틈이 거기에서 열린다. 인간 해방의 다양한 경로를 개척하는 것이 예술이다.
하지만 맹점도 있다. 예술에서 추구하는 감동은 우선 개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내밀한 반응이다.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도 저마다의 잣대로 가늠된다. 그래서 심미적 탄복은 지고의 행복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자칫 감정 자체에 매몰되고 자기도취로 흐를 수가 있다. 현실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거기에 파묻혀버리는 행태로 나타날 수 있다. 상상력이 오작동하면 망상에 이르고, 제어되지 않은 광기는 퇴폐와 파멸로 치닫기 일쑤다. <시계태엽 오렌지>나 나치 엘리트들에서 확인되듯이, 그러한 충동은 집단 속에서 더욱 증폭된다. 구성원들 사이에 강력한 정서적 유대가 형성되면서 부조리와 비인간화를 외면하거나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탐미주의가 지나치면 아름다움이 곧 절대 진리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윤리적인 감각을 견지해야 한다. 예술성과 도덕성은 본질적으로 다른 영역이다. 예술의 핵심인 심미적 감성은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반면, 선악을 분별하는 윤리적 판단은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과정을 요구한다. 그 두 가지 정신이 작동하는 심리적인 메커니즘이 상이한데, 신경과학적 연구에서도 사람들이 미적 감상을 할 때와 도덕적 추론을 할 때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공감 능력과 관련하여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심미안이 뛰어나고 섬세하다 해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둔감할 수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성은 인권 감수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예술적 경험이 사람의 도리를 거스르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성찰하는 지성이 필요하다. 삶이 영위되는 사회적 맥락을 인식하는 안목,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감지하는 촉수가 자라나야 한다. 물론 예술이 그 촉매제가 될 수 있고, 바로 그것이 예술의 경이로움이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액트 오브 킬링>(2012)이라는 다큐멘터리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1965년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그 주동자들은 저항 세력들을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어 100만 명 이상 암살하거나 공개적으로 처형했다. 만행을 주도한 안와르 콩고라는 인물은 이후에 국민적 영웅의 대접을 받으면서 호화로운 삶을 영위해왔다. 자신의 행적에 죄책감은커녕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그에게 영화감독은 그 ‘영예로운’ 행적을 영상으로 담아보자고 제안한다. 이에 안와르는 학살을 함께 저지른 친구들을 초대하여 기억을 더듬어가며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도 해나간다. ‘액트 오브 킬링’은 ‘살인 행위’와 ‘살인 연기’를 뜻하는 중의적 표현이다.
영화의 대부분은 그들이 스스로 작품을 제작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건물 옥상에서 사람을 묶어놓고 철사로 목을 졸라서 죽이는 것을 자랑스럽게 재현하는 등 역겨운 장면이 길게 이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살해당한 희생자들이 자기를 천국으로 보내주어 안와르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뮤지컬 장면도 간간이 삽입된다. 그런데 영화의 끝부분에 이르러 반전이 일어난다. 안와르가 고문을 당하는 피해자를 연기하다가 당사자의 고통에 잠시 빙의하여 정신이 혼미해지고, 나중에 그 영상을 틀어서 보다가 ‘멘붕’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학살을 재연했던 옥상에 다시 올라가 기억을 더듬어가다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알아차리면서 구토를 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예술의 미덕은 무엇인가. 다시 볼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힘이다. 세계를, 경험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새롭게 관찰하고 통찰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미망에 사로잡힌 마음과 행동을 객관화하고 상황을 직시하는 눈 말이다. 그 시선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낯설게 바라보면서 동시에 타인의 처지와 고통에 다가갈 수 있다. 예술의 창조와 수용이 인간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거기에서 체험되는 아름다움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감각의 즐거움은 행복의 중요한 요소지만, 자칫 무분별한 탐닉으로 기울 수 있다. 심미적 충동은 생명에 대한 사랑과 어우러져야 한다.
3. 공통 감각을 위하여
“음악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겠죠. 하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는 있을 것입니다.”
- 다니엘 바렌보임
고립의 시대, 외로움이 만연하는 세상이다. 첨단 미디어 덕분에 엄청난 정보가 유통되지만, 소통은 점점 어려워진다. 접속은 과잉인데, 만남은 줄어들고 대화가 메말라가는 것이다. 언어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도구라기보다는 혐오와 적대의 무기가 될 때가 많은 듯하다. 관계의 회복 또는 형성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연결의 고리가 다양해지고, 공유하는 세계가 넓어져야 한다. 기억과 경험을 나누고 희망과 비전에 힘을 모으면서 유대는 돈독해진다. 그 상호작용이 활성화되려면 정서적 회로를 통해 마음이 열려야 한다. 예술은 그 과정을 매개할 수 있다.
강의실에서 만난 중학교 국어교사 문경미 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생각난다. 서울에 있는 문성중학교에서 근무하던 시절 선생님은 교사들이 섬처럼 단절되어 지내는 모습이 안타까워 독서 모임을 꾸렸다. 함께 책을 읽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교사로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학교 문화를 풍요롭게 가꾸고 싶은 열망도 생겨났다. 이에 교사들은 학교 축제에서 학생들 앞에서 합창 공연을 하기로 15명이 의기투합했다. 두 달 동안 분주한 일과에 틈을 내어 각자 그리고 함께 연습해서 무대에 섰다. 청바지에 흰 상의를 맞춰 입고 <도나 노비스 파쳄(Dona Nobis Pacem)>과 <버터플라이(Butterfly)>를 불렀는데, 들으면서 눈물을 흘린 아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경기도의 이우학교에서도 입학식 때마다 교사들이 춤과 노래로 축하해주는 전통이 있는데, 똑같은 음악이라 해도 누가 어디에서 그리고 누구를 위해 연주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문성중학교 축제에서도 그러했다. 수업과 훈육만 해온 교사들이 학생들 앞에서 펼치는 공연이 남다른 감동을 자아냈다. 축제 이후에 학생들과 친밀감이 높아진 것은 물론이다. 그뿐만 아니라 교사들 사이의 유대가 한층 두터워졌다고 문경미 교사는 회고한다. 무력감과 타성에서 벗어나 교무실의 분위기를 바꾸어가는 힘을 북돋을 수 있게 되었고, 독서 모임에도 탄력이 붙어 참가 인원도 늘어났다고 한다. 많은 학교가 갈수록 냉랭하고 삭막해지고 있는데, 문예 공동체를 통해 기풍을 전환해내는 사례들이 다채롭게 나오길 기대한다.
예술은 공통 감각(common sense)을 일깨워준다. 특히 음악은 신체성이 짙은 장르라서 생리적인 공명을 자아낸다. 목소리를 모아 화음을 만들고 그 퍼포먼스를 향유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말길을 넓혀갈 수 있다.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세계를 넘나들면서 상징과 의미의 부피를 늘여갈 수 있다. 훌륭한 예술은 관계를 리모델링하는 동기를 북돋는다. 상투적인 관념에 얽매여 외면하거나 적대시해온 타자들과의 매혹적인 만남을 주선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이 1999년 팔레스타인 출신의 영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와 함께 창설한 ‘서동시집(West-Eastern Divan) 오케스트라’는 예술과 사회의 접점을 탐구하게 하는 사례다. 오랜 분쟁을 거듭해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및 여러 아랍 국가들 출신의 청년 연주자들로 구성된 그 악단은 음악을 통해 공존과 평화를 도모하는 목적으로 꾸려졌다. 2005년 팔레스타인의 작은 도시 라말라에서 베토벤 5번 교향곡을 연주했는데,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천신만고 끝에 성사된 이벤트였다. 그 과정은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2012, 원제는 ‘Knowing Is Beginning’)이라는 다큐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리고
<크레센도>(2021)라는 영화는 단원들이 하모니를 이루는 과정에서 생겨난 좌충우돌과 우여곡절을 재현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에 나오는 말이다. 어떻게 가능할까. 아름다움 그 자체만으로 삶이 온전해질 수 있을까. 심미적 탁월함이 사회적 공의를 촉진할 수 있을까. 예술은 존재의 근원, 그 신비를 탐구하고 표현한다.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내면의 치유를 병행한다면, 예술은 몰상식과 패륜을 직시하는 렌즈가 될 수 있다. 밀실에서 솟구치는 영감이 허망한 유희의 조각들로 흩어지지 않으려면 광장의 호연지기에 접속해야 한다. 아름다움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드러나고 그려지는 무늬다. 무한으로 뻗어 나가며 경쾌하게 고양되는 영혼의 울림이다. 연민과 우애로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 속에서 진선미(眞善美)는 맞물리고 순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