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투르게네프 장편소설 『연기』
-이반 투르게네프 장편소설 『연기』
이반 투르게네프(I.S.Turgenev, 1818~1883)는 도스토옙스키·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작가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끊임없이 탐구하여 복잡다단한 내면 심리, 특히 인간의 모순된 심리와 무의식을 집요하게 파헤친 심리학자 같은 작가라면,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사회·정치적 문제들을 지진계처럼 정확하게 기록한 ‘연대기 작가’다. 투르게네프의 6대 장편소설인『루딘』·『귀족의 보금자리』·『전날 밤』·『아버지와 아들』·『연기』·『처녀지』에는 당대 중요한 사회 문제들, 즉 잉여 인간 논쟁, 서구파와 슬라브파의 논쟁, 니힐리즘, 인민주의 운동 등이 찌꺼기 없이 예술로 승화되어 있고, 저널리즘적인 요소가 눈에 띄지 않는다.
투르게네프의 다섯 번째 장편 『연기』(1867)는 러시아 농노제 폐지(1861년 2월) 이후 러시아 사회의 향후 발전 노선을 두고 벌어진 좌우 진영의 논쟁에 대한 ‘예술적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의 플롯은 투르게네프의 다른 장편과는 달리 다소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사건은 독일의 온천 휴양도시 바덴바덴을 배경으로 일주일 동안 집중적으로 일어난다. 농민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진보적인 구바료프 진영과 러시아의 모든 것을 농노 해방 이전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적인 라트미로프 진영이 대비된다. 두 진영의 모습은 구바료프의 집에서 소위 진보적인 인사들의 대화와 논쟁, 라트미로프 일행의 바덴바덴 고성(古城) 피크닉 장면과 라트미로프 장군의 아내 이리나가 주최한 야회를 통해 그려진다.
희미한 불빛 아래 자욱한 연기 속에서 벌어지는 구바료프 추종자들인 밤바예프·수한치코바·보로실로프 등의 밑도 끝도 없는 대화와 논쟁은 공허하고 ‘연기’처럼 흐릿하다. 그들 리더인 구바료프의 사회·정치적 입장도 모호하다. 이들의 말과 행동은 독일과 영국에서 농학과 공학을 공부한 젊은 리트비노프와 열렬한 서구주의자 포투긴의 눈을 통해 희화되고 풍자된다. 이름이 아닌 뚱뚱한 장군, 신경질적인 장군, 말벌들의 여왕, 보닛을 쓴 메두사 등 희화된 별명으로 불리는 라트미로프 진영 장군들과 귀부인들을 향한 비판과 풍자의 화살은 더 신랄하고 날카롭다. 농노제 폐지의 최소한의 성과조차 부정하고 대학과 민중교육기관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내며 카드와 최면, 수다에만 열중하는 장군들과 귀부인들의 위선, 이중성과 반동성은 이리나와 리트비노프의 시선을 통해 안과 밖에서 고발된다.
리트비노프와 그의 첫사랑 이리나의 10년 만의 재회와 열정, 갈등과 이별의 비극적 서사도 『연기』의 사회·정치적 주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약혼녀 타티야나와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이리나 사이에서 갈등하는 리트비노프, 순수한 리트비노프를 향한 열정과 사교계의 안락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리나의 모습을 통해 젊은 지식인의 주저와 연약함, 사교계 여왕의 위선과 탐욕이 드러난다. 결국 사교계를 선택한 이리나를 뒤로 한 채, 바덴바덴에서 하이델베르크를 거쳐 러시아로 가는 기차에 홀로 몸을 싣고 리트비노프는 깊은 사색에 잠긴다.
“연기다, 연기. 나의 삶, 러시아의 삶, 인간의 모든 것, 특히 러시아의 모든 것이 연기다. 최근에 일어난 모든 것이 연기고 수증기다.”
주변의 현실과 찰나의 사랑에 절망한 리트비노프에게 구바료프와 라트미로프 진영의 공리공담, 포투긴의 장광설, 자신의 열망과 감정, 시도와 꿈, 이 모든 것은 ‘연기’처럼 형체가 모호하고 희미한 것이다. 이 ‘연기’의 정치학과 심리학, 의미론 속에는 투르게네프 특유의 페시미즘과 사상(事象)과 인간을 바라보는 그의 양가감정적 시선이 어른거린다.
※『연기』는 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필자의 번역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 189권으로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