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하기 1년 전인 2021년도에 나는 실업자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정착하는 데 실패했고, 본가가 있는 전주로 돌아와 침울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지나치게 많이 잤고, 잠에서 깨어나면 서둘러 집을 빠져나왔다. 직장에서 돌아온 부모님이 나를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쉴까 봐서였다. 일단 집을 나서면 발길은 아늑한 단골 카페로 나를 이끌었다. 가로로 기다란 구조, 따뜻한 색감의 조명과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천변 풍경, 이따금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 그곳이 나의 ‘럭키슈퍼’였다. 그렇다. 이건 나의 등단작인 「럭키슈퍼」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매대의 상품처럼 책들을 테이블에 진열해 놓고 하나씩 펼쳐 읽었다. 그러다가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노트북에 문장으로 옮겨 적었다. 이것이 그해 내가 한 일의 전부다.
실은 아무것도 적지 못하고 귀가하는 날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거의 매일 카페로 출석 도장을 찍었다. 이미 읽은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나는 왜 안 될까, 수도 없이 자문했다. 숨 쉬듯이 자기혐오와 자아비판을 일삼았고 그건 남 탓을 하는 것보다 손쉬웠다. 네가 지금 얼마나 망했는지 봐. 똑똑히 봐, 네가 얼마나 쓸모없는지를. 여기서 나아질 방법은 죽는 것뿐이야. 죽어, 죽어, 하루빨리 죽어. 나는 나를 가스라이팅했고 나에게 언어폭력을 가했다. 아마도 죄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보탬이 되지 않고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나. 존재감이 희미하긴 하나 세상의 불순물이자 이물질 같은 나. 쓸모를 증명할 길 없는 나. 그런 나를 심판할 사람조차 나 자신뿐이었다.
건강하지 못했다. 그래도 열심히 해보겠다고 매주 월요일마다 서울에 가던 때도 있었다. 시 창작 수업을 듣기 위해서였다. 누군가에게 내 시가 읽힐 때만 즐거움을 느꼈다. 그래서 구차할 정도로 시에 매달렸다. 시는 한 번도 나에게 응답해 준 적이 없었지만 나를 거절하지도 않았다. 병원에 간 건 더 좋은 시를 쓰고 싶어서였다(건강을 회복하면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내 죄의식과 열패감과 두려움과 슬픔을 고백했다. 내원하기 이전의 일기에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자주 휩싸이고 거대한 불안과 우울에 짓눌린다. 내 몸에 보이지 않는 구멍이 많아서 그곳으로 자꾸 그런 감정들이 새어 들어오는 것 같다. 감정들이 넘쳐흘러서 나는 출렁거리다가 삶에 멀미를 느낀다. 그 지긋지긋한 멀미 때문에 방문을 닫고 혼자 엉엉 울곤 했었지. 그리고 이제는 울지 않으면서 우는 것을 터득했다’ 적었는데, 병원에 다니고 나는 다시 소리 내어 우는 사람이 되었다.
「럭키슈퍼」는 그 지난한 시간 뒤에 나온 시다. 한겨울 같았던 봄, 불길에 휩싸일 듯했던 여름 지나 가을쯤. 하늘은 푸르렀고 은행잎은 노릇노릇하게 익어 갔다. 그맘때는 차근차근 신춘문예 투고를 준비하는 데 힘썼다. 나를 공격하는 데만 쓰였던 나의 맹렬한 기운은 대부분 휘발되었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그렇게 가장 힘을 빼고 쉽게 쓴 시, 그 시가 「럭키슈퍼」다. 마지막 문장인 “나는 행운을 껍질째 가져다줍니다”는 심사위원들을 향한 나름의 귀여운 어필이었다.
나를 선택해 주세요. 나를 호명해 주세요. 제발 나를 구해 주세요. 너무 간절한 바람은 조금 감추고 싶은 법이어서 다섯 편 중 세 번째 정도에 배치했다. 가장 힘을 빼고 쓴 터라 자신이 없기도 했다. 그해 나는 무려 일곱 군데 신문사에 투고했다. 「럭키슈퍼」는 그중 한 편, 그중에서도 제일 가망 없어 보이는 한 편이었다. 그 시가 당선작으로 뽑힌 뒤에도 나는 어리둥절했다. 솔직히 말해서 시의 제목이며 내용이 너무 올드하지 않나 싶었다. 나를 뽑아 주세요, 절박하게 빌어 놓고 막상 당선된 뒤에는 왜 나예요? 순수하게 묻고 싶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럭키슈퍼」의 화자는 나와 가장 닮아 있었다. 낙오된 자로서 패배감과 무력감에 젖어 있지만 끝내는 용기를 내는 화자. 맷집 있는 화자. 나는 낙과처럼 못났지만, 여느 과일들과 마찬가지로 씨앗에서 시작되었답니다, 말하는 화자.
나의 암흑기를 함께한 그 카페는 폐업했고 나의 행운을 빌어 준 사장님과는 여전히 연락하며 지낸다. 나는 때때로 행운을 의심하지만, 행운은 대체로 내 편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믿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든지 행운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