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냉동 블루베리와 말보로 한 다스에 담은 청춘과 연대, 사랑

박상영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과 이언희 감독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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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년 겨울호 (통권 94호)
냉동 블루베리와 말보로 한 다스에 담은 청춘과 연대, 사랑

박상영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과 이언희 감독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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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어느 클럽 앞 주차장. 기둥 너머로 장흥수(노상현)가 누군가와 열렬한 키스를 하는 중이다. 그때 불문과 동기 구재희(김고은)가 그의 등짝을 툭 친다. 키스를 나눈 불문과 원어민 남자 교수는 화들짝 놀라서 도망친다. 재희는 흥수에게 그날 밤의 비밀을 지키기로 한다. 둘은 그날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절친이 된다. 그러다 재희가 사는 집에 치한이 침입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재희는 여성이 혼자 살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에서, 흥수는 아웃팅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거를 결심한다. 둘은 어떤 힘든 일을 마주해도 “네가 너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될 수 있어”라는 말로 서로 다독이면서 힘겨운 청춘을 버텨 나간다. 어느덧 사회인이 된 재희가 변호사 김지석(오동민)과 약혼하면서 둘의 관계에 긴장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중 「재희」를 원작으로 한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내용이다. 한국 문학 독자라면 『대도시의 사랑법』을 쓴 박상영의 이름을 모르기 어렵다. 그는 2018년에 젊은작가상 우수상을 탄 데에 이어서 이듬해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으로 젊은작가상 대상을 거머쥐며 한국 퀴어 문학의 기수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재희」,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대도시의 사랑법」, 「늦은 우기의 바캉스」로 구성된 연작 소설인 『대도시의 사랑법』이 2022년에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후보에 올랐다. 곧장 영상화 판권도 팔렸다. 『대도시의 사랑법』 중 「재희」는 이언희 감독 주도로 영화화되었다. 티빙(Tving)에서는 작가가 직접 쓴 각본으로 만든 동명 드라마가 10월 21일에 공개되었다. 이만큼 빠른 속도로 평단과 대중을 사로잡은 작가는 드물다.

박상영 작가의 매력은 무엇일까. 일단 음악·영화·SNS 등 대중문화로 한 시대의 생생한 공기를 포착하는 리얼리스트의 감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대도시의 사랑법』만 보아도 이를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에는 2000년대 후반 대학 시절을 보낸 인물이 향유했을 법한 대중문화 코드가 가득하다. 화자 ‘영’은 카일리 미노그 팬이며 “브라운아이드걸스 〈아브라카다브라〉가 전 국토를 강타했을 무렵” (『대도시의 사랑법』 p.18)에 입대한다.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영’과 20대 때 어울렸던 친구 무리의 이름은 티아라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에서는 95학번 띠동갑 연상의 NL(민족해방파) 출신 남성을 만나면서 세대 차이를 느낀다. 대중문화 코드는 단순히 시대를 환기하는 소품에 그치지 않는다. 카일리 미노그는 ‘영’이 감염된 HIV(사람면역결핍바이러스, 후천면역결핍증후군(에이즈)의 원인 바이러스)의 애칭이 되고 「재희」에서 ‘영’이 축가로 부르는 핑클 〈영원한 사랑〉은 재희와 찬란한 우정을 나눴던 시절이 끝나간다는 장치로 쓰인다. 

박상영 작가는 시대의 관찰자로 남지 않는다. 퀴어의 일상생활 속 미시적 폭력을 그려내기까지 한다. 「재희」 속 ‘영’에겐 언제 아웃팅을 당할지 모른다는 위험과 “똥꼬충”이라는 멸칭이 따라다닌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에서 그는 고등학생 시절 동창생과 키스하다 기독교 신자 어머니에게 들켜 폐쇄 병동에 강제로 입원한다. 그리고 각각 진보(NL의 민족해방 담론)와 보수(기독교)라는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서 게이라는 성적 정체성을 부인하는 애인과 어머니의 모습을 마주한다. 「대도시의 사랑법」에서는 언제든 검역 대상이 될 수 있는 에이즈 환자가 된다. 이처럼 작가는 영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퀴어가 어떤 사회적·육체적 고통에 노출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영은 자신의 고통을 소설로 고백하는 작가로 성장하지만 동시에 그 고통이 세상에 제대로 드러날 수 있는가?라는 윤리적인 의문을 품기도 한다.

박상영이 그리는 퀴어가 비극적이라 생각할 수 있다. 아니다. 오히려 인간적이다. 영은 언제나 사랑에 미쳐 있으며 매번 연인에게 지고 사는 호구다. 호구를 자처하는 것도 한때다. 영은 연인과 오해하고 싸우며 권태에 빠진다. 그러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시절, 즉 청춘이 돌아올 수 없음을 느끼면서 지독한 허무와 슬픔, 환멸에 던져진다. 「재희」의 마지막, “내 연애사의 외장하드”이자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명명되는 시절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재희는 이제 그곳에 없다”(『대도시의 사랑법』 p.68)라는 ‘영’의 토로는 청춘이 결코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고 영원히 텅 빈 구멍으로 남아 있다는 멜랑콜리를 그려낸다. 자칫 우울한 소설로 들리지만 펼치는 순간 페이지가 술술 잘 넘어가는 것이 박상영 소설의 힘이다.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말했듯 “소설을 읽으며 남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주는 에세이적인 서술 기법과 심사위원에게 자기객관화에 충실하다는 평을 듣는 ‘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조 어린 유머가 무거움을 던 덕분이다.

「재희」가 영화화된다고 했을 때 걱정이 앞섰다. 일인칭화자 시점일 때 드러나는 박상영 작가의 자조와 멜랑콜리를 상업 영화에 담기가 어려울뿐더러 각 에피소드 사이의 행간이 크게 비어 있어서다. 예고편을 본 다음에는 걱정이 한층 깊어졌다. 헤테로섹슈얼의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듯해서다. 이에 대한 비판도 거셌다. 우려가 무색하게 영화는 제법 괜찮았다. 일단은 소설 속 ‘영’의 내레이션 가운데 재치 있는 내레이션만 남기고, 밝은 톤 조명과 음악으로 원작의 우울함을 중화했다. 장흥수가 퀴어 작가라는 설정을 최소화하고 매번 상대와 금방 사랑에 빠지고 마는 구재희와 연애를 꺼리고 원나잇만 즐기는 장흥수 캐릭터와의 명확한 인물 대비를 통해 청춘 영화로 톤을 명확히 잡았다. 둘의 대학 생활과 동거 생활 등 여러 일상적인 에피소드나 디테일을 더한 점도 산뜻함을 더한다. 원작과 시간이 달라지며 흥수가 축가로 부른 노래가 miss A의 〈Bad girl Good girl〉로 각색된 점도 재치 있다. 다만 흥수의 캐릭터를 두고 할리우드 영화 속의 게이 친구 판타지를 되풀이한다는 일각의 비판도 있긴 하다.

원작의 정치적 맥락을 확장한 것이 특히 흥미롭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의 원작 「재희」는 퀴어와 여성 간 연대를 그린다. 둘은 계급도, 성향도 다르지만 서로의 아픔을 헤아리려고 한다. 산부인과 에피소드가 이를 잘 드러낸다. 소설 안에서 시대착오적인 여성관을 지닌 산부인과 의사에게 꼰대질을 당하는 재희의 상황과 “똥꼬충”이라는 멸칭을 듣는 ‘영’의 상황이 교차한다. 재희와 ‘영’은 산부인과에서 자궁 모형을 들고 도망친다(물론 나중에 돌려준다). 「재희」는 이처럼 재기발랄한 에피소드로 퀴어와 여성이 경험하는 혐오의 교집합을 발견한다. 물론 ‘영’은 소설 결말에서 결혼을 중심으로 하는 정상 가족 담론의 핵심이 부의 대물림, 즉 자본임을 느끼며 재희와의 계급 차이를 실감한다. 반면 영화는 재희의 비중을 한껏 확대했다. 이와 함께 치안, 데이트 폭력, 약물 강간, “걸레” 등 여성혐오 표현 등 여성의 일상 속 미시적 폭력과 아웃팅과 혐오 범죄 등 퀴어의 일상 속 미시적 폭력이 나란히 그려진다. 영화는 퀴어와 여성의 합집합을 그리려고 한 셈이다. 고통의 공통점을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고통을 그대로 봐주는 느낌으로.

이를 잘 그려낸 영화의 오리지널 에피소드가 있다. 재희는 남자친구라 생각한 동기를 만나러 본교의 대학 축제로, 흥수는 섹스 파트너로 만난 수호(정휘)의 대학교에서 열린 축제로 간다. 재희는 동기에게 “걸레”라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다. 그녀는 홀로 클럽에 갔다가 남자가 준 약물을 먹고 쓰러진다. 한편 흥수는 수호가 소속된 성소수자 인권 동아리에 가해진 혐오 범죄에 휘말린다. 재희는 밤새도록 묵묵부답이었던 그에게 분노하지만 결국 서로의 사정을 헤아리며 서로의 상처에 연고를 바를 뿐이다. “네가 너인 것은 약점이 아니”라는 위로와 함께.

영화의 가장 과감한 각색은 약혼자를 두 캐릭터로 나눈 설정이다. 원작 속 재희의 약혼자는 재희와 동거하는 룸메이트가 여성 ‘지은’이 아니라 ‘영’이라는 사실에 분노한다. 충분히 헤어질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는 결국 재희에게 청혼한다. 영화는 약혼자를 현실 속에 있을 법한 인물로 만든다. 한 명은 둘의 동거를 들은 뒤 질투에 사로잡혀 데이트 폭력을 저지르는 변호사 김지석(오동민)이다. 그는 재희를 소유물로 보고 흥수를 편견 어린 시선으로 보는 등 젠더 감수성이 결핍된 남성으로 보인다. 재희는 (원작에서 전통적인 여성상의 상징이었던) 자궁 모형으로 김지석에게 저항하고 주체로 성장한다. 다른 한 명은 직장 상사에게 당당히 저항하는 재희를 동경하는 직장 동료 민준(이상이)이다. 그는 재희를 인간 대 인간으로 존중할 줄 아는 예의가 있는 사람으로 결국 그녀와 결혼한다. 원작에 없는 두 남성 캐릭터는 소유와 지배에 기반하는 유해한 남성성을 비판하고 대안적 남성성의 모델을 제안하는 역할까지 한다. 이처럼 파격적인 각색으로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원작만큼 풍성한 콘텍스트를 가지게 된 셈이다.

김경수
영화평론가, 《씨네21》 객원기자, 1995년생
저서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