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 흐름이 늘 예측할 수 있는 순서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 길은 에두르고 막히고 휘어지는 가운데 예외 지대를 경유하며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뻗어나간다. 삼촌에게서 조카에게로 건너가는 이 승계 절차에는 체제에 대한 반동이나 풍속과 어긋남에서 촉발된 파란이라는 DNA가 작동한다. 그런 까닭에 예측을 벗어난 의외의 변곡점이 시대와의 불화와 소동을 뚫고 다가온다. 변화를 추동하는 힘은 튕겨짐, 파열과 흩뿌려짐, 고삐 풀린 역동의, 인멸되지 않는 증거다. 이것은 정치적 반동, 체제에의 저항, 풍속 규범의 흐트러뜨림인 한에서 당위성을 얻는다.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소동은 하나의 현실태다.
돌아보니, 1990년 대한민국은 구소련과 수교를 맺고, 그즈음 독일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그해도 전국노래자랑이 인기를 끌고, 로맨틱 판타지 영화 <사랑과 영혼>이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여전히 아이들이 태어나고, 동시에 가수 장덕과 김현식, 문학평론가 김현, 변호사 조영래, 철학자 알튀세르,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사망한다. 서울올림픽 이후 개별자의 눌린 욕망이 주체 바깥으로 불거진다. 그 욕망의 힘에 올라타며 한국 사회는 고도 소비사회로 들어선다. 욕망과 욕망이 상호 작용으로 바글거리는 그즈음 압구정동과 홍대 거리가 젊은이들 해방구로 떠오른다. 도처에 욕망의 가화(假花)들이 마구 피어나고 범죄가 활개를 치자 노태우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이념에 의해 추동되는 ‘불의 연대’가 끝나고 욕망의 시대가 열리는 그즈음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이 나온다. 문학에서 거대이념과 근대 양식이 시효를 다하고, 탈이념과 탈근대의 양식이 요청되던 시기다. 『경마장 가는 길』은 이전에 없던 ‘새것’의 출현이라고 할 만했으나 문학사의 한 순간임을 즉각 알아차린 이는 드물었다. 오히려 이 소설은 작가에게 도덕적 의심을 덧씌우고 스캔들을 낳은 원인을 제공한다. ‘새것’이 품은 낯섦에 대한 생리적 거부와 발작적인 소동을 겪는 가운데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 한 가지가 포스트모던 양식을 이식한 소설인가, 단지 프랑스 문학에서 알랭 로브 그리예 등이 선도하던 ‘누보로망’의 방법론적 모방인가이다. 내 기억에서 『경마장 가는 길』이 만든 소동은 이상의 「날개」, 손창섭의 「신의 희작(戲作)」, 최창학의 「창(槍)」이 나왔던 순간을 환기하게 한다. 이것은 한국소설을 이끌어온 사실주의 양식의 무너짐과, 이제껏 겪지 않은 미지의 장이 펼쳐질 것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경마장 가는 길』이 5년 반 만에 프랑스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는 R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현실 ‘낯설게 바라보기’를 위한 밑그림이다. R의 눈에 비친 현실은 이상하게 낯설다. 여관에서 “주무시고 갈 겁니까, 쉬었다 갈 겁니까?”라고 묻는 것, 생선회 아래 무채는 먹을 수 없는 것, “어서 오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마네킹처럼 서서 동일한 말을 되풀이하는 백화점 엘리베이터 걸은 이상하다.
‘나는 너에게 섹스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너는 회피한다, 이런 것도 나에게는 너무나 재미있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허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알 수 없는 사건들이라고 생각돼. 나는 이따금 내가 날마다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기록해 두면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하나의 소설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어. 그걸 있는 그대로 기록해 두면 대단히 신비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이 되리라고 생각해. 물론 그런 유형의 소설이 나오면 무식한 독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 어느 시대든지 참된 소설의 독자는 언제나 무식하게 마련이지.’
-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민음사, 1990) 중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사정으로 지질하고, 저마다의 사정으로 곤경에 처한다. 『경마장 가는 길』은 주인공 R이 처한 곤경을 미시적으로 재현해 낸다. 그의 욕망은 현실에서 좌절한다. 욕망과 거부의 되풀이에서 강조되는 것은 자아실현의 불가능성이다. 관계 지속이 무의미해진 뒤에도 아내는 R의 이혼 요구를 거부한다. 유학 시절 3년 반 섹스를 나누며 동거하던 J는 “여기는 프랑스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R과의 섹스를 거부한다. R은 두 여자에게 내쳐지고, 교수직 취업에도 실패한다. 성적 결합과 취업은 사회와 한 개체의 관계 맺기의 한 형식이다. R의 실패가 누적될수록 내면을 침식하는 피로의 강도가 세진다. 피로는 근육에 쌓인 과잉의 수고에 따른 신체 반응이 아니다. R은 지질할 뿐만 아니라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모럴 해저드(moral hazard) 상태, 차라리 자기 실패의 원인을 여자 J에게 덮어씌우는 ‘나쁜 놈’이다. 피로는 이 지질함에 대한 신체적·생리적 반응이자 내면 도덕의 부적격에 대한 판결의 결과이다. 그는 자신을 거부하는 한국 사회가 싫다. 그는 프랑스로 도피하고자 마음먹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그의 피로는 진퇴양난 상태가 빚은 위축이자 응고물이다. 장 보드리야르가 말하듯이, 피로는 소통에 실패하며 ‘수동성의 강제’에 놓인 육체에 가능한 ‘유일한 활동 형태’, 즉 “자기 자신에게 향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육체에 ‘깊이 파고드는’ 이의 주장”일 테다.
『경마장 가는 길』의 출간 직후 작가의 윤리성에 대한 시비가 불거진다. 이것은 스캔들이자 추문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배반에 대한 야비한 ‘복수극’으로 씌어졌다는 소문은 가설이다. 『경마장 가는 길』은 허구의 창작물이다. R은 작가 하일지가 아니다. 작가가 빚은 허구의 인물이란, 밀란 쿤데라에 따르면 “현실화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고, 아울러 작가 자신이 시대와 삶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즉 작가의 현실 이해, 감정과 의혹, 이념과 세계관 등을 전달하는 진실의 담지자일 뿐이다. 따라서 소문과 의심에 근거 한 도덕적 단죄는 우스꽝스러운 작태에 다름없다. 문학 텍스트는 작가가 처한 현실과는 다른 층위에서 다룰 영역이다. 사실적 층위와 허구적 층위는 엄연히 분리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소설의 몸을 입은 이상 이미 ‘해석된’ 것, 창조된 것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려운 까닭이다. 『경마장 가는 길』의 인물과 서사가 현실 정황과 동일하다면, 과연 문학 텍스트가 창작 주체의 한풀이나 복수의 수단일 수 있냐는 물음을 낳고, 이것이 지핀 논쟁은 샛길로 빠져서 작가와 비평가 사이의 인신공격으로 변질되면서 흐지부지 끝나고 만 것은 아쉬운 일이다.
『경마장 가는 길』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가 겪는 욕망의 좌절과 실패에 대한 서사다. 실패는 결핍을 낳는다. 벌거벗은 삶이야말로 결핍의 적나라한 실상이다. R은 실패의 누적 속에서 모멸감과 고통에 직면한다. 다시 말해, 사회와 매개가 되는 노동과 성에서 내쳐짐으로써 이중의 고통에 빠지는 것이다. 벌거벗음의 고통은 존재의 보람과 기쁨이 배제된 공회전에서 비롯한다. 노동과 성은 주체가 사회와 매개되는 주요 방식이다. 사회 내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주체는 ‘실재가 없는 텅 빈’ 상태로 떠돈다. 사회 안에 떠도는 것은 자아실현 기회의 박탈과 벌거벗음의 유력한 징후일 테다. 카프카의 장편 『성』에서 주인공 K는 ‘성’에 초대를 받지만 들어가지 못한다. K는 ‘성’ 주변을 맴돌며 성으로의 진입을 시도한다. 하일지의 주인공이 좌절과 실패를 겪는다는 점에서 카프카가 창조한 K와 판박이처럼 닮았다. K란 우리 안에서 내쳐진 자, 시련을 겪는 자, 소외된 주변인을 표상한다. ‘성’이란 무엇인가. ‘성’이란 실재하지 않는 그 무엇, 불가능성의 표상일 수도 있다. 하일지의 ‘경마장’은 카프카의 ‘성’을 방법적으로 변주한다.
하일지는 『경마장 가는 길』(1990)에 이어 ‘경마장’ 5부작인 『경마장은 네거리에서···』(1991), 『경마장을 위하여』(1991), 『경마장의 오리나무』(1992), 『경마장에서 생긴 일』(1993) 등을 잇달아 내놓는다. 3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돌아보면, 이 소설들은 1980년대 한국문학이 좇던 이념을 버리고, 탈중심화하는 사회 변동에 주목하며 일상의 미시 정치학을 채워 넣으려는 유의미한 시도라고 할 만하다. 그 미시 정치학이 욕망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새로움의 기미를 선취한 사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계몽과 이성의 열정이 사라진 자리,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욕망이다. 이 욕망의 궤적을 좇은 『경마장 가는 길』은 “전체가 개체를 억압하던 시대”인 1980년대 문학과 방법론적 의미론적 차이를 드러내며, 한국문학은 새로운 층위로 끌고 나간다. 한국문학의 자력(磁力)이 미치지 않는 진공을 뚫고 나온 『경마장 가는 길』은 1980년대의 소설들이 누락시킨 ‘일상 안에서 욕망의 운동’만이 아니라 탈현대의 위기 징후, 탈이념과 탈 역사주의, 중심의 무너짐, 경계의 소멸, 불확정성의 흩뿌려짐, 현실의 허구화, 소통의 단절, 병적으로 일그러진 자아, 피로의 누적, 익명화하는 주체를 그려낸다. 하일지의 소설적 전략은 일상성 속에 미세하게 분산된 미시 권력들의 꼼꼼한 재현이며, 의미 있는 체계를 좌절시키는 현실을 허구화함으로써 현실을 부정하고, 미약하게나마 ‘현실 전복 의지’를 내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