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현장
수상작리뷰|번역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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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년 겨울호 (통권 94호)
수상작리뷰|번역 부문

번역부문

 

21세기 한국적 환상의 전이

알바로 트리고 말도나도 스페인어역

『Conejo maldito(저주토끼)』(정보라 作)

 

 

2024년 대산문학상 번역 부문 수상작으로 최근 몇 년간 꾸준히 한국문학 작품을 스페인어로 번역해온 살라망카대학의 알바로 트리고 말도나도(Álvaro Trigo Maldonado) 교수의 스페인어역 정보라 소설 『Conejo maldito(저주토끼)』가 선정되었다. 이번 심사에는 총 40편(아동 1편, 우화집 1편, 고전 4편, 시 3편, 소설 31편)의 번역서가 대상에 올랐다. 4년 전스페인어 번역 심사에 비해 양적, 질적으로 주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사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은 번역 수준이 전반적으로 크게 향상되었으며 원어민 번역자가 다수 포함되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고, 번역된 작품들을 통해 해외 문학장에서 한국문학의 위상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0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원작 『저주토끼』는 환상과 공포, SF, 민담, 동화 등이 뒤섞인 단편집이다. 하나의 장르가 혹은 혼합된 장르가 한 편의 단편을 위해 봉사한다. 책을 덮을 때 독자는 여러 유형의 동굴을 드나들었다는 감각을 가지게 되는 작품이다. 장르가 다르면 문체도 달라지고 어울리는 단어도 달라지는데 이것이 번역의 관건이다. 심사위원들은 번역자인 알바로 트리고 말도나도가 가능한 범위 안에서 그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수상자로 선정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공포 서사 틀 안에서 사회적 메시지와 인간 탐구를 전하고 있다. 각 단편마다 전개되는 섬뜩하면서도 독특한 환상과 공포가 현대인의 감각에 설득력 있게 다가와 많은 흥미를 자아내며, 번역자는 이러한 부분을 잘 파악해 강약조절을 잘한 느낌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공포 신화와 미신, 금기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잘 버무린 독특한 소설이며, 번역가 또한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적절하게 잘 살려 번역해서 한국 문화와 정서가 낯선 해외 독자들도 선입견 없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번역작품이다.

『Conejo maldito(저주토끼)』는 번역자의 또 다른 후보작으로 오른 김훈 원작의『남한산성』의 번역본에 비해 번역의 난이도가 아주 높지는 않지만, 형태적 정합성과 의미적 정합성에서 흠결을 찾기 어렵고 원작의 문체와 한국 고유의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원작의 문학적 완성도와 번역의 질적 수준 외에도 환상과 현실이 뒤섞이는 『저주토끼』의 이야기 형식이 스페인어권 작가들이 즐겨 사용해온 소설 기법인 환상문학과 마술적 사실주의와 맞닿아 있어 스페인어권 독자 및 문학 전문가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는 점도 선정에 고려되었다. 가령 스페인 작가 라몬 바예 인클란의 소설에서 보이는 전율주의와 우루과이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의 단편소설들에서 보이는 환상문학의 기법이 『저주토끼』의 단편들에게서 나타난다. 오라시오 키로가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자연과 인간과의 문제와 당시 논란이 되었던 우생학에 관련된 테마가 문명 안에 내재되어 있는 야만의 현시로 드러났다면, 정보라의 「저주토끼」에서 보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에 있는 어두운 현실과 「머리」에서 보이는 배설물로 축적되어 만들어진 성체가 자신을 없애려 하는 어머니에 대한 복수로 나타나는 자연과 인간과의 문제에 대한 알레고리 등 현대문명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환상과 공포의 분위기 속에서 복수를 통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플롯은 스페인어권 문학의 전통에 매우 친숙한 테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어권 독자들의 리뷰에서 호평을 받은 이유는 세심한 번역작업을 통해 한국사회의 특이한 문화적 맥락을 잘 전사해서 스페인어권 독자들에게 익숙한 소설문법 속에서도 신선한 흥미와 감동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취를 통해 대산문학상 번역 부문을 수상한 알바로 트리고 말도나도 교수에게 축하를 전하며, 이외에도 훌륭한 번역으로 예심을 통과했던 모든 번역자 분들의 노고와 성취에도 심사위원들을 대표해서 격려를 전하고자 한다.

송상기
고려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교수, 1966년생.
저서 『멕시코의 바로크와 근대성』 『스페인 문학사』(공저), 역서 『아우라』 『대통령 각하』 『조난일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