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현장
수상작리뷰|평론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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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년 겨울호 (통권 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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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부문

 

형용사-문학과 문학의 자연사

서영채 평론집 『우정의 정원』

 

 

서영채의 평론집 『우정의 정원』은, 이 저서에서 복수로 등장하는 표현을 원용하자면 클리나멘적 무정형과 생기로 가득하다. 우선, 이 저서는 대개 동시대의 문학 담론과 최신작들의 작품론들로 구성되는 바로서의 선형적이고 정형적인 비평집의 구성과 궤를 달리한다. 동아시아적 맥락에서의 비교문학적 관점이 여러 대목에서 적극적으로 개진되는가 하면 1990년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한국문학의 흐름을 조망하고 한국 사회의 변동과 더불어 혹은 그 경로와 어긋나면서 교호하는 문학비평의 실존적 지위 자체의 변모 과정을 되짚는 메타적 사유도 이 저서 곳곳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렇게 보자면, 이 비평집의 시계는 광역적인 동시에 메타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비평의 삶이 전경화되기 때문이다. 공시적이며 통시적이기도 한 이 시계에 비평의 삶이 도드라지게 포착된다는 것의 함의는 무엇일까? 초점이 무엇보다도 문학에 집중되어 있다는 말이다. 비평집의 시계가 문학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 지당한 얘기를 새삼?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놓여 있다. 원경과 근경을 자재롭게 오가는 서영채의 언어는 동아시아 근대문학의 삶이 놓여 있던 자리를 되짚어 이를 단단히 결착된 기성의 맥락으로부터 ‘말랑하게’ 구축해내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비판적 사유의 대상이 필요한 이들에게 명분을 제공하는 말로 더욱 자주 사용되는 ‘문학주의’라는 기호를 기꺼이 재맥락화하며 내밀어놓기도 한다. 이 어긋나고 ‘모순된’ 운동은-때로는 혼돈 속에서- 그 자체로 클리나멘의 원에너지를 독자에게 인계해주는데 이를 통해 독자는 새삼 문학에, 명사로서가 아니라 형용사-문학에 접할 기회를 얻게 된다.

형용사-문학이라는 표현은 1990년대 문학장을 돌아보는 글인 「1990년대, 시민의 문학」에 사용된 것인데 저자는 이를 두고 “형용사가 되는 순간, 문학은 주어가 아니라 술어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술어의 역할은 제시된 주어의 내용성을 채우는 것입니다…(중략)…바로 그 술어의 자리가 형용사를 말랑말랑하게, 더 나아가서는 액체로 만든다는 것이지요”(48쪽)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서영채는 이렇게 덧붙인다. “더욱이 형용사-문학은 그 문장을 구사하는 사람을 미적 주체가 아니라 윤리적 주체로 만듭니다…(중략)…문학이 윤리를 곤죽으로 만들어 부드러워진 자리, 문학으로부터 새롭게 조형된 윤리가 스스로의 정체에 대해 성찰하게 되는 자리, 곧 문학적인 것의 윤리, 형용사-문학의 윤리라는 자리야말로 근대문학의 예술적 특성이 살아 움직이는 곳입니다.”(48쪽) 저서의 여러 곳에서 공시적, 통시적으로 확장된 시계의 축이 되는 좌표들이 여기서 드러난다. 근대문학이나 윤리와 같은 ‘어마무시한’ 말들이 그의 저서 안에서 손에 잡히는 “곤죽”이 되는 것은, 키에르케고르의 표현을 원용해 말해보자면, 문학이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를 통해 새로운 보편을 액체상태로부터 형용해나가는 것이라는 믿음에 기인한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저서의 곳곳에서 적극적으로 원호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아도르노적 관점과 맞닿는다. 기성의 보편이 아니라 없는 보편을, 인과관계가 한 손에 그러쥐어지지 않는 다양한 현상들로부터 그려내어 보이려는 것이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사유가 아니겠는가. 형용사-문학이라는 표현은 이런 관점을 두루 아우르고 있다. 물론 이 표현은 1990년대의 문학장을 회고하는 데 소용되고 있지만 이 회고 자체가 2019년에 이루어진 것임을 감안하면 위와 같은 설명이 단지 과거 어느 한 때의 신념을 단속적으로 규정해보는 데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21년에 이루어진, 신진평론가 양순모와의 대담에서 저자가 “이해와 옹호를 위해 제가 기댄 것이 문학의 자연사”(538쪽), “인과와 필연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우연과 도약이 이루어지는, 잃어버린 고리로 가득찬 클리나멘의 공간, 문학과 예술에게 어울리는 시간성의 공간은 바로 그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데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근대문학 초입으로부터 동시대 문학에 이르는 범위에 걸쳐 있으면서, 동아시아적 관점에서의 비교문학적 접근에도 통용되는 것은 선험적이고 선형적 맥락에 의해 역사화한 문학, 명사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아직 없는 보편을 품고 있을 형용사-문학, 그리고 우연과 숨구멍으로 가득한 저류로서의 문학의 자연사라는 방법일 것이다. 우리는 『우정의 정원』에서 그 원경과 근경을 넉넉하게 즐길 수 있다.

조강석
평론가,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69년생
저서 『틀뢴의 기둥』 『한국시의 이미지-사유와 정동의 시학』, 『한국문학과 보편주의』, 『이미지 모티폴로지』, 『경험주의자의 시계』, 『아포리아의 별자리들』, 『비화해적 가상의 두 양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