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현장
수상작리뷰|시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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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년 겨울호 (통권 94호)
수상작리뷰|시 부문

시 부문

 

교감의 황녀가 살아온 나날

강은교 시집 『미래슈퍼 옆 환상가게』

 

 

강은교의 『미래슈퍼 옆 환상가게』는 시인의 시적 생애의 결산서이다. 그 시적 생애의 성격을 이 글의 제목이 암시하고 있다. 왜 ‘황녀’인가? 태생적으로 교감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다. 황제가 모종의 노력을 통해 교감의 제국을 세웠다면 황녀는 교감의 권능을 모태 세례로 받은 것이다. 

요컨대 시인에게 교감은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내가 팔을 뻗치면, 기다렸다는 듯 너는 끌려오고

   네가 팔을 뻗치면, 기다렸다는 듯 나는 끌려가고
   눈부신 암흑
   우리의 두 팔은 허공에 서로의 손바닥을 대고
   대지에 심겨진다 (「내가 팔을 뻗치면」)

 

그런데 이 교감의 시인은 권능을 발휘하는 순간부터 근본적인 결락을 느낀다. 왜냐하면 교감이 의지의 작용이라면 그것이 곧바로 몸의 경험으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근본적으로 의지와 경험 사이는 결코 일치할 수 없는 간극을 갖게 된다. 의지하면 할수록 경험은 충족되지 않으며, 경험하면 할수록 의지는 무기력하게 보인다.

강은교의 첫 시집, 『풀잎』(1974)에 김병익이 쓴 해설, 「허무의 선험과 체험」은 그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평론가는 말한다. 강은교는 “우리 모두가 종국에는 허무에 봉착할 뿐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허무의 심연이 우리의 존재 바닥에 깔려 있음을 지적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허무의 인식의 결과는 “유일자로 ‘남아 있음’”이다.

날카로운 통찰이다. 그런데 “그의 발언의 중량은 다분히 사변적이며 선험을 통해 직관 또는 예감하는 것”이라는 평론가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렇게 판단하면 허무의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탄생은 ‘유’의 절정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어떻게 ‘허무’, 즉 ‘무’의 밑바닥으로 가라앉는가? 이를 용인한다면 허무는 삶과 무관한 것이 된다.

오히려 이 선험 자체가 생의 최초의 경험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교감을 본능처럼 가진(이는 탄생의 결과로서 소수의 천재들에게 유전자의 기적으로 삼투된다) 존재가 그의 생리와 체험 사이의 간극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 간극을 운명처럼 받아들인 게 강은교 시의 생애 그 자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독자는 느끼게 된다. 아주 멀리 온 이 지점에서 그의 허무는 어떻게 진화했을까?

우선은 허무가 ‘환상과의 마주침’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교감은 삶의 기대를 북돋고 기대는 존재의 미래를 향해 뻗어간다. 그러나 그건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어떤 시인의 시를 목각한 것
  시가 자랑스럽게 벽에 걸렸다고 환호했네
  벽에 걸린 시를 읊조리며, 읊조리며

  시를 잃어버렸네
  아야아 (「어떤 전시장에서」)

 

그렇다면 결국 잘못 살아왔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다. 환상이 교감의지의 결과인 한, 그것을 적극 받아들이는 것은 시의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변화가 창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너는 참 아프구나
  네가 아프니 내가 아프고
  내가 아프니 네가 아프고 (「선물」)

 

서로의 아픔을 앓는 이 경험은 저주가 아니라, ‘선물’이라고. 그리고 이로부터 환상과 실제 사이의 밀당이 태어난다. 환상은 현실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미세한 요동이 된다. 즉 현실을 더 생생해 느끼게 하는 약간의 차이가 되는 것이다.

 

  당고마기고모는 살짝
  절름거리네
  당고마기고모의 왼다리는
  조금 짧아
  당고마기고모의 오른다리는
  조금 길어 (「당고마기고모는 살짝 절름거리네」)

 

이 미세한 요동은 환상을 알게 하고 현실을 느끼게 한다. 그러니 그 결과는 ‘꿈의 삭제’이다.

 

  그렇게 꿈이 삭제될 줄이야
  그렇게 얼른얼른
  삭제될 줄이야

한 모로 두 모로 네레 모로 가고 보니  
한 모로 두 모로 네레 모로 가고 보니(같은 시)  

 

그러나 꿈의 삭제는 현실의 획득이다. 거기에 강은교 시 생애의 승리가 있는 것이다.

정명교
평론가, 1958년생
저서 『문학, 존재의 변증법』 『존재의 변증법 2』 『스밈과 짜임』 『문명의 배꼽』 『무덤 속의 마젤란』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 『문신공방 하나』 『네안데르탈인의 귀환-소설의 문법』 『네안데르탈인의 귀향-내가 사랑한 시인들·처음』 『글숨의 광합성-한국 소설의 내밀한 충동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