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컬처’ 문화강국 ‘코리아’가 ‘C’이던 시절의 한 장면
‘K컬처’ 문화강국 ‘코리아’가 ‘C’이던 시절의 한 장면
영어 철자 중에서 ‘K’는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예전에는 한국의 영어 이름 첫 글자였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였을 것이나, 최근 들어서는 ‘K’가 앞에 붙는 온갖 어구들이 대한민국의 선진성과 매력을 자랑한다. ‘K팝’과 ‘K드라마’에서 시작된 ‘K’의 활용 범위는 이제 ‘K뷰티’, ‘K푸드’, ‘K방산’ 등으로 쭉쭉 퍼져나가고 있다. 전 정권에서는 코로나19 시기에 ‘K방역’을 자랑한 적도 있다. 오로지 ‘K’만 붙으면 한순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일이나 그 어떤 분야도 즉시 세계인들의 박수를 받는 대상으로 변신한다. 작가 한강 씨가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자, 아니나 다를까, ‘K문학’ 운운하는 헤드라인들이 언론에 우후죽순 등장했다. 세종대왕이 만든 글자는 아니건만, 이토록 한국인들 기를 살려주는 ‘K’는 참으로 놀랍고 고마운 친구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반도에 들어앉아 있던 나라를 지칭하는 서양 언어 이름 첫 글자는 ‘K’가 아니었다. 대략 16세기 중반부터 18세기말까지 대부분의 영어 출판물들을 모아놓은 자료 데이터베이스인 EEBO(Early English Books Online)와 ECCO(Eighteenth Century Collections Online) 검색창에 ‘Korea’를 넣으면, 일단 뭐가 뜨는 경우도 매우 적고, 막상 문서에 가 보면 비슷하지만 다른 단어들이다. 간혹 제대로 찾은 경우에도 나라 이름이 ‘Korea’가 아니라 ‘Corea’다. 위의 두 데이터베이스의 자료 중 연도가 가장 빠른 출간물은 1681년에 나온 『새 지리학, 각 나라들 지도와 위도·경도 표가 수록됨(A New Geography, with Maps to each Country, and Tables of Longitude and Latitude)』이다. 이 책의 제2권 아시아 편 ‘중국 왕국’ 장에 이르면 ‘일본 제국’까지는 거론하지만, 조선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다만 같이 들어간 지도에는 한반도가 표시되어 있다. 설명 안 된 그 반도 이름은 ‘Corea’다. 지도에서만 잠깐 출연하는 이 이름은 위치나 실체가 부정확할 때도 있다. 『대 칭기즈 칸의 역사(The History of Genghizcan the Great)』라는 1722년 출간 번역서에 ‘코리아 섬(Isle of Corea)’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일본 섬’ 옆에 있는 나라다.
‘코리아’의 ‘코’ 소리가 ‘K’가 아니라 ‘C’인 것은 서구인의 동아시아 진출 역사를 기억한다면 이상할 게 없다. 한반도가 위치한 동아시아까지 일찍이 16세기에 배를 몰고 온 유럽인들은 포르투갈 상인들이었다. 이후 17~18세기에 이탈리아나 에스파냐, 프랑스 출신 예수회 신부들이 중국에 장기 체류했다. 이들은 현지 삶을 묘사한 글에서 이따금 조선을 ‘코레아’(포르투갈, 에스파냐, 이탈리아어), ‘코레’(프랑스어) 등으로 불렀다. 그때마다 예외 없이 사용된 철자는 ‘C’다. 이들 라틴어 계열 유럽 언어(로망스어)에서 ‘K’로 시작하는 단어들은 외래어가 아닌 한, 거의 없을뿐더러 ‘코레아/코레’의 ‘코’ 소리는 늘 ‘Co-’로 표기한다.
라틴어 계열과 게르만 계열 어휘들이 뒤섞여 있는 언어인 영어에서도 ‘코리아’를 먼저 거론한 로망스 언어 사용자들 표기법을 한동안 그대로 이어받아서 썼다. 예를 들면 《소년들을 위한 만화 단편소설(The Boy's Comic Novelette)》이라는 영국 청소년 잡지 1894년 9월 8일호에 연재된 「코리아의 잭 또는 신비의 3인(Jack of Corea or the Mysterious Three)」이 그렇다.
주인공 ‘잭’은 거의 평생을 ‘코리아’에서 보낸 영국 청년이다. 영국인 ‘잭’은 코리아에서는 “얼마나 쉽게 사납고 광적인 군중이 들고일어나 생명과 재산을 파괴할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있다. 소설이 시작되자마자 ‘잭’은 ‘코리아 해안’에서 또 다른 영국인 친구 앨프(Alf)와 만난다. 앨프는 ‘코리아 해안’에 정박한 증기선에서 내려온다. 둘은 대화를 나누다 말다툼을 버린다. 급기야 주먹다짐을 벌인다. 이때 세 명의 “코리아 병사”들이 등장해서 앨프를 결박한다. 조선인 대령 ‘미나미(Minami)’와 그의 부하들이다. 삽화를 보면 이 조선인들은 모두 청나라식 변발을 하고 있다. 변발을 길게 늘어뜨린 조선인 대령 ‘미나미’는 잭과 친구다. 잭은 어릴 때 ‘코리아’의 왕이 손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바 있고, 그 은혜의 표시로 붉은 비단 끈을 목에 달고 다닌다. 이러한 사람을 그 누구건 건드린다면 왕을 모독한 것이기에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것이 ‘코리아’의 법이다. ‘미나미’ 대령은 국법에 따라 앨프를 처형하려 한다.
그 순간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난다. 일본인 ‘다이묘[大名, 일본의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번 등의 영지를 소유하였던 영주]’인 ‘하토리(Hatori)’다. 그는 영국에 유학해서 교육받은 신식 엘리트로 “행동거지만 보면 일본인이 아니라 영국인에 가깝다”고 앨프가 소개한 바 있다. 애초에 ‘하토리’를 이렇게 칭찬한 게 빌미가 되어 두 영국인이 서로 싸우게 되었던 터라, ‘하토리’도 이 분쟁에 책임이 있다. ‘하토리’가 등장하자마자 ‘미나미’는 이제 영국 청년은 제쳐두고 민족의 원수 ‘하토리’와 칼싸움을 벌인다. “우리 코리언들은 너희들의 오만을 참을 데까지 참았고,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모든 일본 놈들을 몰아낼 작정이다”라고 외치며, ‘코리아’ 장교 ‘미나미’는 일본 귀족 ‘하토리’에게 달려든다.
한국의 영어 이름이 ‘K’가 아니라 ‘C’로 시작하는 것도 불편한데, 조선인 장교 이름을 일본어로 일본식 성명 강요까지 해놓다니! 그러나 역사는 역사다. 19세기 말 영국 청소년 독자들을 겨냥한 ‘K-컬처 콘텐츠’는 ‘J-컬처 콘텐츠’ 밑에 배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