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기’는 특정인이나 물건·상황·숫자 등 얼른 생각 안 나거나 숨길 필요가 있을 때 사용하는 만능 대명사이다. 어떤 정황에도 다 쓸 수 있다. 심지어 이런 대화 충분히 가능하다.
“거시기하다 보니께 거시기 하기가 좀 거시기 하지?”
“아닌 게 아니라 상당히 거시기 하구만.”
다 알아듣는다는 소리. 영화 <황산벌>에서 신라군 지휘부가 이 단어 때문에 골치 아파하는 장면이 나온다. 백제군의 군사 작전용 단어라고 여겨서. 그래서 그러겠지만 흔히 전라도 방언으로 알려졌는데 이거 표준어란다.
언어에 표준이 있을 수 없다는 나의 신념은 미뤄두고 잠시 좀 멀리 가자.
낮 12시쯤, 프랑스 파리 한복판 시테 섬을 나는 걷고 있었다. 한여름 휴가철이라 관광객들이 많았다. 여차하면 동양인 서양인 연달아 어깨를 부딪칠 정도였으니까.
들리는 말도 전 세계 언어들이었다. 불어·독어·스페인어·영어에 일본어·중국어 그 외 또, 또.
왜 이 별에 사는 종족들은 모두 언어가 다를까, 어떤 커다란 의도가 숨어있는 건 아닐까, 싶기까지 했다.
생각해 보자. 어느 날 외계인 두 명이 하루 차이로 각각 우리를 방문한다. 둘의 외모가 똑같아서 확인해 보니 지구에서 200광년 떨어진, 같은 행성에서 온 자들이다. 그런데도 서로 쓰는 말이 다른 것 아닌가(심지어 서로 꼬나보고 있다면?). 같은 별에서 왔는데 언어가 다르다면 우리는 참으로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러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나는 지구 언어들을 귀담아듣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명령만 내리는 황제나 제후의 언어습관을 따라 하다 보니 저런 발음이 만들어진 게 아닐까, 프랑스인들은 언제라도 입 맞출 준비를 하고 있는 거 아닐까, 독일 사람들은 내가 지금 화가 났다고 분명하게 알려주기 위한 마음이 언어로 옮겨온 게 분명해…
일본어는 최대한 변명하거나 달래고 있는 것 같고, 스페인어는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말을 하려다가 저렇게 되는 것 같고… 혼자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있던 그때, 중년 여성의, 고함에 가까운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뒤통수 쪽에서 강력하게 울려 퍼졌다.
“거시기 즈가부지, 루부루가 그 짝이 아닌갑소!”
파리 한복판에서 날카롭게 울려 퍼진 한국어, 중에서도 전라도 말. 목소리가 워낙 커서 전 세계 사람들이 중년 여성을 바라보았는데 무슨 뜻일까, 저렇게 크게 말한 이유는 뭘까, 궁금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중요한 것은 그 많은 종류의 지구인 중에서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던 것.
나는 웃으면서 제자리에 섰다. 저 앞에서 걸어가던 거시기 즈가부지는 되돌아서서 대꾸했다.
“이짝이 아니믄 워딘디?”
나는 다가오는 전라도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루부루는 쩌어짝이요!”
아주머니는 반색했다.
“오메, 전라도 사람이요?”
내 평생 가장 먼 곳에서 들어본 전라도 언어였다. 아주머니는 “고맙소이” 인사하고서 남편과 왼편으로 꺾어서 ‘루부루박물관’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한동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어는 자기 것이고 자기 동네 것이다. 그러니 외국에 가서 길을 모르면 힘차게 외치자. 한국말로. 그것도 자기 지역 언어로, 거침없이. 어디선가 알아듣는 사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