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단상
내게는 자라나는 정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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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년 겨울호 (통권 94호)
내게는 자라나는 정원이 있다

정원을 좋아한다. 좋아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떤 정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정원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 드는 정원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어떤 정원이 마음에 들지?’ 나에게 물었다. 다양한 식물이 있는 정원? 잘 정돈된 정원? 자연스러운 정원? 질문이 꼬리를 이었다.

매화가 피면 매화를 좋아하고, 목련이 피면 목련을 좋아했다. ‘그렇다면 나는 정원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꽃이 피어 있는 식물을 좋아하는구나.’ 그런데 어떤 풀이나 나무도 꽃이 피어 있을 때보다는 꽃 없이 지내는 때가 더 많다. 그럴 때도 정원 쪽으로 눈이 갔다. ‘꽃을 좋아한다는 것은 꽃의 잎, 꽃의 줄기, 꽃의 뿌리까지 좋아하는 것이야.’ 이런 생각도 들었다.

가지와 뿌리가 앙상하게 드러난 겨울 정원도 좋았다. 눈이라도 내린 날이면, 눈과 풀, 눈과 나무들 사이에 생긴 흑백의 무늬가 좋았다. 무늬는 예측 불가능한 모양이었지만, 어떤 놀라운 규칙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상형문자 같았는데, 눈이 녹은 자리에 새겨진 그 글씨를 해독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수메르의 쐐기문자가 이렇게 해독되기 시작했을 거야.’ 거기에는 어떤 반복도 있었고, 균형도 있었다. ‘어쩌면 지난밤에 먼 우주에서 어떤 에너지가 다녀가며 남긴 편지일지도 몰라.’ 까막눈으로 편지를 읽다가, 내 멋대로, ‘잘 놀다 간다’라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모양을 갖춘 정원을 만들지 못하고, 빈 땅이 있으면, 나무를 심고 꽃을 얻어다 심었다. 어떨 때는 꺾꽂이를 하기도 하고, 씨앗을 구해서 뿌리기도 했다. 땅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도 자라나고, 예기치 못했던 것들도 싹을 틔웠다. 어느 해, 나의 작은 정원에 물망초 꽃이 활짝 피었을 때, 집에 온 사람들이 감탄했다.

“어머. 이게 물망초에요?”

“너무 예쁘다. 얻어갈 수 있어요?”

나는 물망초를 나누어주며 한껏 들떴다. 그러나 정원의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한 해가 지난 뒤 물망초며, 국화며, 내가 심었던 것들은 다른 풀들에 밀려 영역이 쪼그라들었다. 채소 몇 종류를 심었던 밭뙈기에도 잡초가 무성했다.

시끄러운 풀밭을 볼 때마다 마음이 심란했지만, 그것을 정리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바빴다. 일이 밀렸다는 핑계가 좋았다. 그래도 눈살이 찌푸려졌다. 몇 달째 머리를 감지 않았을 때처럼 헝클어진 풀밭은 새와 쥐와 굼벵이들의 터가 되었지만, 외면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멀리서 온 손님이 물었다.

“이게 무슨 꽃이에요?”

“씀바귀요.”

“정말 예쁘다. 나는 이렇게 작고 앙증맞은 꽃이 좋아요.”

그러고 보니, 풀밭에는 쬐깐하고 해린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다시 풀밭을 살폈다. 씀바귀·노랑선씀바귀·고들빼기·조뱅이·보리뺑이 꽃이 피어 있었다. 내 머릿속 풀밭이 꽃밭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산비장이·조뱅이·지칭개·큰방가지똥들이 저마다 꽃을 주고 갔다. 식물의 꽃이 없는 날에는 눈꽃이 피고, 비꽃이 맺히고, 그도 저도 없는 날에도 하늘에는 별이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자라나는 정원을 가지게 되었다.

 

 

이대흠
시인, 1968년생
시집 『코끼리가 쏟아진다』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귀가 서럽다』 『물 속의 불』,
『상처가 나를 살린다』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연구서 『시문학파의 문학세계 연구』, 『시톡 1』 『시톡 2』 『시톡 3』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