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나른해지자 자꾸만 눈이 감겼다. 선생님 말씀이 한 귀로 들어왔다 한 귀로 줄줄 새어나갔다. 교실을 둘러보니 꾸벅꾸벅 조는 아이도 있고, 대놓고 엎드려 자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깨야겠어!’
교과서 귀퉁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림 그릴 때 정신이 가장 맑아지기 때문이다. 한 장 한 장 정성껏 축구공을 그리다가 마지막 장엔 유난히 퀭한 선생님 얼굴! 책 끝을 잡고 휘리릭 넘겼더니 공이 슈우웅 날아가서 선생님 얼굴에 딱 맞았다.
명중이야. 나도 모르게 큭 웃음이 터졌다.
‘이제 됐어.’
역시 그림을 좀 그렸더니 잠이 홀딱 달아났다. 다시 마음 잡고 공부하려고 칠판을 바라볼 때였다. 선생님이 크게 소리쳤다.
“지연우!”
꾸벅꾸벅 졸던 아이들이 깜짝 놀라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선생님이 내 앞에 서더니 내 책을 집어 들었다.
“책에 낙서한 거야?”
“그게 아니라요. 실은…”
나는 사실대로 말하려고 했다.
“뒤로 가서 손 들고 서 있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생님이 말했다.
무서워서 얼른 손은 들었지만, 내 말은 듣지도 않으려는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나 때문에 잠에서 깬 아이들이 나를 보며 키득거렸다.
그날 저녁, 학원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일기장을 펼쳤다.
10월 19일. 날씨는 맑지만 내 맘은 아주 흐림.
수업 시간에 너무너무 졸려서 하는 수 없이 그림을 그렸는데 그걸 선생님이 보았다. 나는 그림 그리게 된 연유를 말씀드리려 했는데 선생님 표정이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입 꾹 다물고 벌만 섰다.
나 때문에 깬 동희랑 서준이가 날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다. 혼내려면 대놓고 잔 저런 아이들을 혼내야 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열두 살이지만 나도 ‘인권’이라는 게 있는데! 내 말은 안 듣고 벌부터 주는 선생님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물론 책에 그림 그린 건 나도 일정 부분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다음부턴 잠 올 땐 그림 말고 다른 방법을 연구해 봐야겠다.
나는 꾹 눌렀던 마음을 일기에 토해냈다. 역시 다 쓰고 나니 기분이 나아졌다. 나는 일기 쓰는 걸 무척 좋아한다. 어디에서도 말 못 하는 속마음을 일기장에 털어놓으면 속이 시원해지면서 위로받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 반에 일기 쓰는 거 싫어하는 애들도 많지만, 그건 아마 읽는 사람을 의식하고 써서 그런 걸 거다.
‘흠, 선생님이 뭐라고 하려나?’
어쩔 수 없이 이번 일기는 나도 신경이 쓰였다. 일주일에 세 번 일기를 검사하는 선생님이 뭐라고 하지 않을지 걱정됐다. 고칠까말까 망설이다가 엄마에게 물어봤다.
“엄마, 일기는 솔직하게 적어야겠지?”
“그럼! 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을 솔직하게 적는 게 일기지!”
역시 엄마는 명쾌하다. 나는 엄마 말에 확신을 얻고 그대로 제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틀 뒤 일기장을 나눠주는 선생님이 평소와 달랐다. 시무룩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축 처진 것 같기도 했다.
평소와 다를 게 없는 도장이었지만, 잉크가 흐릿한 것이 도장마저 힘없어 보였다. 혹시 내 일기를 읽고 기분이 상하셨을까? 그날 저녁, 일기를 쓰려는데 또다시 고민이 됐다.
‘또 솔직하게 쓰면 안 되겠지?’
이번에도 엄마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엄마에게 가서 선생님에게 혼난 일, 선생님 표정이 아리송했던 일들을 사실대로 말했다.
엄마는 내 머리에 꿀밤을 주며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으이구, 너는 선생님한테 혼나고 그걸 또 밉다고 일기에 써? 눈치가 있어야지. 눈치가!”
“엄마가 일기는 솔직하게 쓰는 거라며!”
내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거야 그렇지만… 어차피 선생님이 보는 거 뻔히 알면서 안 좋게 쓸 게 뭐 있어? 안 되겠다. 오늘 일기는 엄마가 도와줄게!”
엄마는 팔을 걷어붙이고 내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엄마가 불러주는 대로 써봐.”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적었다.
10월 21일. 내 마음처럼 흐렸다가 갬^^
내가 일기에 안 좋은 말을 써서 선생님이 상처받은 건 아닌지 걱정됐다. 선생님이 나를 대표로 혼낸 것은 이유가 있을 텐데. 엄마와 대화를 나누면서 생각해 보니 내가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선생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도록 노력해야겠다. 선생님, 사랑해요♥
그대로 적었지만 찝찝했다.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백 프로 내 마음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일기장을 제출했다. 기분 탓일까? 다시 일기장을 건네주는 선생님 얼굴이 한층 부드럽게 느껴졌다. 자리에 앉자마자 짝꿍이자 글짓기 대회에서 우수상 받았던 상이에게 물었다.
“상이야, 너 일기 잘 쓴다고 칭찬받잖아. 혹시 너도 거짓말로 써?”
“당연하지. 몰래 동영상 본 거 일기에 썼다가 엄마한테 깨진 이후론 무조건 거짓말로 써.”
“정말?”
“그러니까 잔소리도 안 듣고 얼마나 편한지!”
“그럼 일기는 다 거짓말로만 쓰는 거야?”
내 질문에 상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내 귀에 속삭였다.
“대신 나한텐 진짜 일기장이 하나 더 있어. 거짓말로 쓴 일기는 학교에 내고, 진짜 일기는 나만 보는 거야. 괜찮은 방법이지?”
‘아하! 그러면 되겠구나!’
나는 그날 바로 일기장을 하나 더 샀다. 그리고 상이처럼 거짓말 일기랑 진짜 일기를 따로따로 썼다.
<거짓말 일기>
10월 23일. 맑음
노총각 삼촌에게 좋은 소식이 생겼다. 그 어렵다는 고시에 드디어 합격한 것이다. 엄마는 축하한다며 닭백숙을 해줬다. 엄마는 얼굴도 잘생기고, 똑똑한 삼촌이 이 시대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추켜세웠다. 문득 든 생각인데, 우리 선생님이랑 삼촌이랑 만나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에게 삼촌을 소개해 주면 좋아하실까?
<진짜 일기>
10월 23일. 맑음
마흔세 살이나 먹은 삼촌이 공무원 시험에 5년째 떨어졌다. 부엌에서 몰래 닭 뜯는 삼촌을 보고 엄마는 ‘인간아. 언제까지 이따위로 살래’라며 구박했다. 나는 엄마가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삼촌에게 다가가 힘내라고 어깨를 두드려 줬다.
오늘따라 머리카락 몇 개 없는 삼촌 뒤통수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안쓰러워서 삼촌 뒤통수에 뽀뽀를 해줬다가 등짝을 한 대 맞았다. 하지만 본인도 얼마나 괴로워서 그런 걸까. 나는 쿨하게 이해해 주기로 했다. 삼촌, 힘내세요♡
그날 이후 나는 두 개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물론 학교에는 거짓말 일기를 제출했다. 내 거짓말이 그럴듯해질수록 어째 엄마와 선생님은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면서도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고, 하루에 일기를 두 번 쓰는 것도 힘들었다.
‘어떻게 하면 거짓말 일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러다 스트레스 걸려서 죽을 것 같아.’
여느 날처럼 엄마 옆에서 거짓말 일기를 쓸 때였다.
텔레비전 뉴스에 청와대 앞에 홀로 서 있는 형이 나왔다. 머리띠를 둘러맨 형은 뭐라고 빽빽이 써진 피켓을 들고 ‘노예 같은 삶, 인권을 보장하라!’라며 목청껏 소리쳤다.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엄마, 저게 뭐야?”
“시위하는 거잖아.”
“시위가 뭔데?”
“자기가 억울한 게 있다고 대통령이나 높은 사람들한테 알아달라고 주장하는 거.”
“저런 거 하면 효과가 있어?”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니? 방송이나 한번 타보려는 거겠지.”
엄마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차가운 물로 세수하고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거짓말을 일삼다 보니 코도 커진 것도 같고 얼굴도 가식적으로 변한 것 같았다.
“삼촌, 공부해?”
삼촌의 방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응. 왜?”
뒤돌아보는 삼촌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지루하던 찰나에 마침 잘 왔다는 표정이었다. 삼촌은 이마에 하얀 머리띠까지 두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타의에 의해 나 자신을 속이는 상황이 생겼어. 그로 인해 본인은 혼란스러운 상태고 말이야. 삼촌 같으면 계속 자신을 속이고 평화를 유지할 거야? 달걀로 바위를 친다고 해도 한번 부딪혀볼 거야?”
나름 진지하게 물어봤다.
“나라면 당연히 평화를 유지하지.”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나온 답변이었다.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네 나이로 돌아간다면…”
삼촌이 많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괜히 한 번 쓸어 넘겼다.
“무조건 맞서 싸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 거야.”
삼촌은 독립투사라도 되는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장한 얼굴로 본인이 두르고 있던 머리띠를 내 이마에 둘러주었다.
‘역시 삼촌은 나를 이해해 줄 줄 알았어.’
삼촌이 할 말 끝났으면 나가라는 듯이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삼촌 말에 용기를 얻고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제일 큰 스케치북이랑 매직을 꺼냈다. 그러고는 교육청에 하고 싶은 말을 하나하나 적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은 몰라줘도 교육감 아저씨만큼은 내 마음을 알아줄 것 같았다. 솔직하게 쓰는 거라 막힘없이 술술 써졌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마음 초등학교 5학년 2반 ‘지연우’입니다.
제가 시위를 하는 이유는 ‘일기 검사 방식 변경’을 위해서입니다.
사실 우리 반에 솔직하게 일기 쓰는 애는 거의 한 명도 없을 거예요.
교육청에 제가 바라는 건요. 우리 교장 선생님께 말해서 일기 검사를
아예 없애든가, 그게 안 되면 일기 검사의 방식을 변경하게 해주세요.
<지연우가 제안하는 일기 검사 방법>
① 비밀로 하고 싶은 부분은 앞장에 별표를 하거나 포스트잇을 붙이기.
(비밀을 지켜줄 수 있으므로 따로 비밀 일기를 안 써도 된다.)
② 때로는 일기 대신 편지나 동시, 만화, 제안서 등의 형식으로 쓰기.
(똑같은 일기 형식에서 벗어나 재밌게 글을 쓸 수 있음)
③ 담임 선생님이 도장이 아닌 댓글을 달아주기.
(오해가 쌓이지 않고 일 대 일 소통이 가능하게 됨)
나는 별표 위에 형광펜을 몇 번이나 덧칠했다. 다 쓰고 나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안 자고 뭐 해?”
엄마가 덜컥 문을 열었다. 순간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혼날 게 분명했다. 평소 거짓말을 싫어하는 나였지만, 오늘만큼은 어쩔 수 없이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숙제해.”
“미리 안 하고 뭐 했니? 얼른 하고 자.”
엄마가 문을 쾅 닫고 나갔다.
‘휴,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음날, 어렵게 찾은 교육청 앞이 생각보다 썰렁했다. 시위하는 사람도 없고, 북적북적 활기 넘치는 다른 거리에 비해 한적했다.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정문 앞에 슬쩍 자리 잡았다. 텔레비전에서 본 형처럼 스케치북을 펼치고 번쩍 들었다.
“꼬마야, 여기서 장난하면 안 된다.”
교육청을 지키는 아저씨가 다가왔다.
“장난 아닌데요. 시위하는 건데요.”
“시위? 네가?”
아저씨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시위하려면 절차가 필요하지만, 나에게는 필요 없을 것 같다면서 적당히 놀다가 들어가라고 했다. 어리다고 무시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 두 눈을 부릅뜨고 더 높게 하늘 위로 번쩍 스케치북을 쳐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땀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진종일 땡볕에 앉아 있으니, 오줌도 마렵고 엉덩이도 아프고 배도 고팠다. 그냥 집에 가서 밥 먹고 게임이나 할까, 수십 번 고민에 빠졌다.
‘엄마 말대로 괜한 짓 하는 걸까?’
나도 모르게 어깨가 축 내려앉았다. 그때 저 멀리서 검은 양복을 입은 아저씨들 대여섯 명이 우르르 걸어왔다. 뉴스에서 본 적이 있는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교육감 아저씨인가?’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스케치북이 잘 보이게 활짝 펼쳐 들었다. 하지만 아저씨들은 자기들끼리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나를 보지도 않고 정문으로 그냥 들어갔다.
‘에이, 뭐야. 봐주지도 않잖아…’
실망스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괜히 스케치북을 바닥에 툭툭 내려치며 눈물을 꾹 삼켰다.
그때였다. 저 앞에 걸어가던 안경을 낀 아저씨가 자리에서 멈추며 나를 돌아봤다. 주변 사람들에게 뭐라고 얘기하니 모두가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 그들은 천천히 내 쪽으로 다시 걸어왔다. 저분이 교육감 아저씨인가? 정말 내 얘기를 들어주려고 오는 걸까?
나는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