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

  • 2024년 겨울호 (통권 94호)
이런 시

시를 쓰느라 따로 시작노트를 쓰지 못했습니다. 저는 네이버 메모장을 주로 사용합니다. 방금 메모장에서 ‘시인’을 검색해보았습니다. 2018년 8월 21일 오전 10시 41분에 저는 이런 메모를 했습니다.
“정적 속의 광기를 정적 밖으로 꺼낼 수 있는 시인, 미친 사람의 절규 속에서 리듬을 찾아내는 시인”

 

 

이런 시

 

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 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시는 그만 찢어 버리고 싶더라.1)

 

여름 청계천을 따라 산책할 때의 일이다. 능소화가 피어있는 산책로를 따라 신설동 즈음 오면, 소망의 벽 앞 산책자들이 건널 수 있는 낮은 다리가 하나 있다. 다리 바로 아래 팔뚝만 한 잉어 수십 마리가 떼 지어 몰려있었다. 종종 먹이를 주는 사람이 있는 듯 수면을 향해 입을 모아 뻐끔거리고 있었다.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아 한참 내려다보다 걸음을 옮기려는데, 저기서부터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가 자기 머리통만 한 바위를 들고 뒤뚱뒤뚱 걸어오고 있었다. 결국 나를 지나쳐 다리 아래 잉어들에게 던져버리는 것이 아닌가(아이가 나보다 먼저 잉어를 보고 있었나 보다. 한참 바위를 찾았나 보다.)

 

큰 파문이 일었다. 아이 아빠로 보이는 이가 나를 지나쳐 다급히 아이에게로 갔다. 그는 아이의 옆에 함께 쭈그리고 앉아 아이에게 무어라 이야기하는 듯했다. 파문이 다 잦아들고 나서도 두 사람은 개천의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하며, 한참을 더 앉아 있었다. 나는 되도록 천천히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내 안의 파문이 잦아들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후, 그 다리를 지날 때, 혹은 별안간, 한참, 그 장면을 다시 그려보곤 했다. 그때 보고 듣지 못한 것을 기억의 검은 공간에 채워 넣어보며. 그 남자는 아이에게 어떤 말씨로 무슨 말을 전하고 있었을까? 아이는 어떤 마음으로 대답을 했을까? 돌에 맞은 잉어는 없었을까? 이런 질문들에 어떤 답을 채워 넣느냐에 따라, 이 장면은 아주 달라지곤 했다

 

그러나 이 장면을 글로 쓰는 건 되도록 미루고 싶었다. 시로 쓰는 건 더더욱. 이 장면을 시로 쓴다면, 이 장면에 어렵게 찾아온 고요 위로 다시 바위를 던져넣는 일이 될 것 같아 두려웠다. 아이는 아이가 아니게 될 테고, 잉어는 잉어가 아니고 그 남자는 그 남자가 아니게 될 거라고

 

그런 중 찾아온 ‘고요는 사라짐이 아닐 것’이라는 문장에 기대어 쓴다. 시간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먼저, 바위를 던져 넣는 아이가 되어 본다, 바위에 맞은 잉어가, 간발의 차이로 바위를 빗겨낸 잉어가 되어본다, 아이를 타이르는 보호자가, 천천히 멀어지는 목격자가 되어본다, 들을 수 없던 대화의 증언자가 되고, 기억 속 피어나는 흑점들의 연구원이 되어본다. 나는 붉은 반점을 가진 비단 잉어가 되어 나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커다란 바위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노란 멜빵바지를 입은 일곱 살 소년이 되어 다리 아래, 만질 수 없는 잉어 떼를 바라본다. 만질 수 없는 잉어의, 만질 수 없는, 물빛 쌓인 눈동자를 바라본다. 장면의 어딘가에 있었을 쇠오리나 왜가리가 되어 이 모든 것과 무관한 일을 생각하거나, 바위가 되어 바위의 시간이 할 수 있는 일과, 바위의 시간이 할 수 없는 일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들을 지켜보는 나를 지켜본다. 나를 지켜보는 내게 말을 건다. 뭐 하고 있어? 뭐가 보여?

이 시간을 시로 쓰지 않는다면, 나는 이 시간의 반향을, 반향의 반향을 거듭 살아갈 수도 있겠지. 물그림자 위로 쌓이는 물그림자처럼. 여러 번 덧칠한 강바닥의 어둠처럼. 기억 대신 쌓이고, 시간 대신 흐르며, 그러나 고요는 사라짐이 아닐 것. 그러므로 나는 나로서 몇 문장을 더 쓸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백지 위, 고요한 기억 속으로 고요히, 바위가 떨어진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바위를 고요히, 다시 올려다본다

 

더 고요한 무너짐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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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상 「이런 시」 중(《가톨릭 청년》 1933. 10.)

 

 

<{김수영2) 문학관 주차장 옆 뜰, 보호색의 보호를 마저 받으며 갈색 사마귀(객관적상관없음물) 한 마리가 가을 풀밭 속에 죽어있다. 보호색의 보호를 뚫고 이 수풀에 틈입한 나(의 시선)는 이 사마귀를 수풀 속에서 꺼내고 싶지 않고 시에도 쓰고 싶지 않고 그래서 제목에 쓴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3)

 

내 안에 풀 없어도 풀의 메아리 있고
바람 없어도 바람의 메아리 있어

 

바람이 풀에 엉키던 작고 바지런한 소리
의 메아리 바지런히
다시 듣곤 해

 

내 안에
풀의 메아리 눕는다
나도 내 안에
눕는다

 

풀과 풀의 메아리
그 사이에 누워서
바람과 바람의 메아리
그 사이에 누워서
누워서…
뭐할까?
여기에 숨을까?

 

없는 숲에서 없는 꽃나무를 찾아
없는 꽃나무에서 없는 꽃을 찾아
없는 꽃의 없는 향기를 찾아
없는 너에게 줘야지

 

그러나,
없는 꽃은 없는 바람에 떨어지고
없는 향기는 없는 바람에 날려 사라지고

 

사랑으로 사랑을 뒤집을 수 있어요? (뒤집개 필요?)
사랑으로 사랑 아닐 수 있나요? (유체이탈 필요?)

 

없는 빛이 흔들리면 없는 꽃 그림자도 함께 흔들리나요? (꽃의 피 냄새 필요?)
나를 돌보는 빛은 누가 돌보나요? {=이 풀의 그림자를 돌보는 빛의 그림자는 누가 돌보나요? = 이 풀의 그림자의 메아리를 돌보는 빛의 그림자의 메아리는 누가 돌보나요? = 이 풀의 그림자의 메아리와 빛의 그림자의 메아리 사이에 누운 나(=사마귀)는?}

 

풀의 그림자 누울 때
풀 끝에 매달린 달팽이의 그림자가
비명 지르는 소리 (혹시… 내 소리? 아니면… 내 그림자의… 메아리의…향기의…사랑의…)

 

하… 그렇다…

 

하… 그렇지…

 

아암 그렇구말구… 그렇지 그래…

 

응응… 응… 뭐?

 

내 안에 풀의 메아리 있지만 풀은 없고
하…그림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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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육호수(1991~????) 2024 김수영 문학관 상주작가.
3) 김수영 「풀」 중(《현대문학》 1968. 8.)

육호수
시인, 1991년생.
시집 『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