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앤 라이드

  • 2024년 겨울호 (통권 94호)
키스 앤 라이드

모자라서 씁니다
도대체 지금까지 모자 몇 개나 잃어버렸어요? 셀 수 없어요. 모자라서 모호합니다. 당신은 잿빛 모자를 쓴 채 몰두합니다. 모자 안에 당신을 감추었군요. 지금까지 잃어버린 모자는 우산 수보다 적을까요? 나중에 만나요.
모자를 잃어버린 나는 모자랍니다.
체크아웃하고 차 타고 가다가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서, 침대 위에 있는 모자를 얼른 챙겼죠. 그 모자를 쓰고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는데, 또다시 사라진 모자.
내가 모자를 잃어버렸다고 말하면, 스카프를, 귀고리를, 책을, 지갑을 잃어버린 적 있다고 말하는 당신들이 있어요.
고마워요. 모자라는 사람들이 모자처럼 포근해서 푹 눌러쓰고 싶어요. 이번 사랑은 오래 가져요.
모자는 사적이며 다정한가요? 모자가 나란히 걸어갑니다.
모자라서 나는 씁니다. 모자라서 초과해요. 내가 다가가지 않아도 숨길 수 없죠.

 

 

키스 앤 라이드


“혼자 갈 수 있지?
여기까지가 내 임무야.”

 

너는 운전대를 잡은 채 무심하게 말하고

 

“네 곁에 남으면 안 되겠지?”
나는 차에서 내린다

 

철도가 있는 산간 마을이다
작은 식당 앞을 지나간다

 

구부정하고 파리한 웨이터와
구부정하고 파리한 데다 좌절한 표정의 사람들이 문밖에 있다

 

저들을 여기 데려다준 이들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영면에 들기 직전에
인사하러 올지도

 

사랑했지만 죽은 강아지가 목방울 소리 내며
저승의 문턱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네가 믿고 있듯이


잠시 만나고 영원히 헤어지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 잠시가 영원이라면

 

혼자 갈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해지지 않아도 된다

 

열차표를 예매하지 못했지만

 

이 저녁
계단은 미끄럽고
부채처럼
사랑은 남아있다

 

국경을 넘게 될

열차를 기다린다

 

 

 

도장 파는 저녁

 

도끼 자국 품고 사는 나무가 있지
벼락 맞고도 성장하는 나무들이 있어

 

상처 입은 영혼들이 깡패떼 되어 돌아다닐 것 같은 골목 모퉁이에서
도장 파는 노인을 찾았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도장은 악귀를 쫓아준다고 하네
이 도장을 지니면 행운이 온대

 

몇 차례 죽었다 깬 나무
어린 시절 문밖에서 울고 있는 나무 그림자
특이한 나무라며 굿을 하는 사람들

 

저녁에는 단비가 왔어
나무가 말라 죽지 않게

 

뇌우 품은 먹구름인 줄 알았지
뭐야

 

젖은 머리칼을 넘기면
예전보다 부드럽고 희미해진 흉터

김이듬
시인
시집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달렘의 노래』
『히스테리아』 『표류하는 흑발』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투명한 것과 없는 것』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