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라서 씁니다
도대체 지금까지 모자 몇 개나 잃어버렸어요? 셀 수 없어요. 모자라서 모호합니다. 당신은 잿빛 모자를 쓴 채 몰두합니다. 모자 안에 당신을 감추었군요. 지금까지 잃어버린 모자는 우산 수보다 적을까요? 나중에 만나요.
모자를 잃어버린 나는 모자랍니다.
체크아웃하고 차 타고 가다가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서, 침대 위에 있는 모자를 얼른 챙겼죠. 그 모자를 쓰고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는데, 또다시 사라진 모자.
내가 모자를 잃어버렸다고 말하면, 스카프를, 귀고리를, 책을, 지갑을 잃어버린 적 있다고 말하는 당신들이 있어요.
고마워요. 모자라는 사람들이 모자처럼 포근해서 푹 눌러쓰고 싶어요. 이번 사랑은 오래 가져요.
모자는 사적이며 다정한가요? 모자가 나란히 걸어갑니다.
모자라서 나는 씁니다. 모자라서 초과해요. 내가 다가가지 않아도 숨길 수 없죠.
키스 앤 라이드
“혼자 갈 수 있지?
여기까지가 내 임무야.”
너는 운전대를 잡은 채 무심하게 말하고
“네 곁에 남으면 안 되겠지?”
나는 차에서 내린다
철도가 있는 산간 마을이다
작은 식당 앞을 지나간다
구부정하고 파리한 웨이터와
구부정하고 파리한 데다 좌절한 표정의 사람들이 문밖에 있다
저들을 여기 데려다준 이들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영면에 들기 직전에
인사하러 올지도
사랑했지만 죽은 강아지가 목방울 소리 내며
저승의 문턱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네가 믿고 있듯이
잠시 만나고 영원히 헤어지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 잠시가 영원이라면
혼자 갈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해지지 않아도 된다
열차표를 예매하지 못했지만
이 저녁
계단은 미끄럽고
부채처럼
사랑은 남아있다
국경을 넘게 될
열차를 기다린다
도장 파는 저녁
도끼 자국 품고 사는 나무가 있지
벼락 맞고도 성장하는 나무들이 있어
상처 입은 영혼들이 깡패떼 되어 돌아다닐 것 같은 골목 모퉁이에서
도장 파는 노인을 찾았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도장은 악귀를 쫓아준다고 하네
이 도장을 지니면 행운이 온대
몇 차례 죽었다 깬 나무
어린 시절 문밖에서 울고 있는 나무 그림자
특이한 나무라며 굿을 하는 사람들
저녁에는 단비가 왔어
나무가 말라 죽지 않게
뇌우 품은 먹구름인 줄 알았지
뭐야
젖은 머리칼을 넘기면
예전보다 부드럽고 희미해진 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