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작가가 마침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중견작가 한강에게 월계관이 씌워졌다. 필자는 한강의 문학 세계에 대해 이미 간단히 기술한 바 있다(매일경제 2024년 10월 12일자). 오늘은 ‘세계문학으로 가는 한국문학의 여정’에서 이 소식이 갖는 의미를 짚어보기로 한다.
1. 세계문학으로 가는 문이 열린 계기
1968년 일본의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수상 이후, 한국인은 줄기차게 ‘한국인의 노벨상’이라는 조갈증에 시달렸다. 1994년 일본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오에 겐자부로가 수상하고, 2000년에는 중국 쪽에서도 가오싱젠이 망명 작가로서 수상하였다. 그리고 12년 후, 오에 겐자부로가 수상을 예견했던 아시아 3인 작가 중 중국의 모옌이 수상자에 오르자(또한 3인 중 또 하나의 작가인 터키의 오르한 파묵도 2006년에 수상한 터이니), 한국인에게 내정한 마지막 한 작가에 대한 기대도 바짝 달아올랐었다. 시 쪽에서는 시인대회를 통해 자신을 알린 시인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영국의 도박 사이트에 올랐다. 어느 해에 수상 오보 소동까지 터진 시인의 집에는, 2006년부터 해마다 10월 초에 기자들이 아예 근처에 진을 치고 취재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필자는 2008년 이후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대해 깊은 회의에 시달리고 있었다. 왜냐면 유럽의 미디어에서 한국문학에 관한 관심이 급격히 식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한국문학에 관한 관심은 1990년 이문열의 『금시조』와 이청준의 『예언자』가 최윤과 파트릭 모뤼스에 의해 번역이 되고, ≪르 몽드(Le Monde)≫지에서 이문열의 『금시조』에 대한 소개를 전면 기사로 내보내면서 시작되었다.
한국문학에 대한 호기심은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고, 그 후, 이승우·오정희의 소설이 주목을 받으며 강도를 더해 가더니, 2004년 황석영의 소설 『손님』이 높은 판매 부수를 기록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2008년 황석영의 소설 『심청』에 대한 짧은 소개 기사 이후 한국문학에 관한 관심은 희미해져 갔다. 물론 그 이후에도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의 우주로 쏘아올리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계간 ≪포에지(PO&SIE)≫가 1999년 ‘한국시 특집’에 이어, 2012년에 두 번째로 한국시 특집을 300쪽이 넘는 두께로 만들었고, 저명한 서평지 ≪크리티크(Critique)≫는 2018년 1~2월호에서 전권을 ‘한국’ 특집으로 채웠다. 또한 ‘엑상프로방스’에서 한국문학 전문 출판사 ‘드크레센조 출판(DeCrescenzo éditeurs)’이 2012년 발족하였고, 2015년 ‘파리도서전’에서는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대되었다.
이러한 약진의 배경에는 한국경제의 선진국으로의 진입과 ‘한류’의 세계적 성공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외형상의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에 대한 서양 독자들의 관심은 점점 희박해졌다.
2. 또 다른 문의 성공
한데 새로운 관심이 생소한 장소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2011년 미국의 크노프에서 출판되어 10만 부를 넘기는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 맨부커상의 자매상인 ‘맨 아시아’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16년 한강의 『채식주의자』(한국어본, 2007)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강은 일약 세계적 작가로 떠올랐다. 그리고 한강은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소재로 한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이어서 발표하였다. ‘식물 욕망’이라는 감각적 주제가 현대 한국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동하였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2023년 프랑스의 4대 상 중의 하나인 ‘메디치상’ 외국어 부문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올해 한강에게 노벨문학상이 돌아갔다. 짧게 보면 2007~2024년이라는 18년의 여정이었고, 길게 보면 1968~2024년이라는 56년 염원의 결실이었다.
노벨문학상을 곧바로 문학적 평가로 치환하는 건 꽤 까다로운 논쟁을 유발할 수 있다. 다만 한국문학의 경우, 이 상의 획득은 한국문학이 세계 독자에 의해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됨으로써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의 궤도 안에 진입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희망을 준다는 점에 가장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강 작가 수상의 여건을 살피는 일은 향후 한국문학과 세계 독자의 만남과 한국문학의 호환성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3. 세계문학으로 가는 두 길의 양태
앞에서 일별한 추이를 보자면, 두 개의 길이 개척되었다. 하나는 프랑스로부터 퍼져나간 ‘유럽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영미권에서 열린 ‘제국의 길’이다.
먼저 한국의 경제와 ‘한류’가 두 길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 정황이 한국문학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한 기름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것들은 한국문학 그 자체와의 수용과는 무관하였다. 즉 한류에 매료된 대중이 한국문학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서로의 존재 양식은 상이하였고, 그 연관은 외재적이었다. 이에 관한 정밀한 연구는 앞으로 사회적 사실과 문학적 사실 사이의 관련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바탕이 될 것이다.
‘유럽의 길’의 초입에 놓인 것은 “한국문학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그것이 『르 몽드』가 『금시조』에 주목한 이유이다. 그런데 이 물음은 온전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 이후로 서양인에게 수용된 작품들이 한국문학의 네트워크를 통해 이해되지 못하고, 각각 단품으로 향수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한국문학을 한국사의 생 체험 하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문학사와 기타 해설서들이 부재했기 때문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번역에 의존하다 보니, 수용된 문학작품들의 관계에 비균질성이 발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황순원·최인훈·박완서는 배제되었으며, 박경리·서정인·김훈은 실패하였고, 이문열·이청준·이승우·황석영은 성공하였다. 성공한 작가 중 각각의 작가들은 개별적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다 보니, 2007년 르 클레지오가 ‘한불수교 120주년 기념 한불작가 회의’에서 “한국문학은 프랑스문학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우리 자신의 소중한 과거를 상기시켜 주었다”라고 말했듯이, ‘앙가쥬망’(황석영)과 ‘성과 속의 갈등’(이승우) 등 프랑스 문학의 위대한 전통을 되새기게 하는 기능을 하는 데에서 한국문학의 판로가 열렸고, 궁극적으로 최초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주는 데에 실패하였다고 할 수 있다. 2008년 이후 한국문학에 관한 관심이 소멸한 소이(所以)가 이런 사정에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반면 제국의 길은 ‘기획 상품의 길’이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미주에서 성공한 것은 크노프 출판사의 기획이 적중하였다고 판단된다. 구글링을 해보면 크노프 출판사에서는 『엄마를 부탁해』를 선택한 이유를 주제의 보편성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게 보인다. 하지만 필자는 경제 대국이 된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을 찾아서 브랜드로 만들어보겠다는 기획이 작용한 결과라고 판단한다. 만일 주제의 보편성 덕분이었다면, 신경숙 소설의 후속 번역이 완전히 실패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번역가의 기획이 성공한 경우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번역자는 한국어를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스스로 보유한 뛰어난 감수성을 활용하여 원본 소설을 서양인의 취향에 유연히 연결되도록 재기술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문제를 제기한 이후, 불문학자이자 번역가인 조재룡 교수와 영문학자 김욱동 교수에 의해 면밀히 분석된 바가 있다. 동시에 작가는 『채식주의자』를 통해 열린 수용의 통로에 한국 현대사의 큰 사건들을 ‘집단의 폭력과 개인의 희생에 대한 하염없는 연도(連禱)’로 재구성한 작품들을 연이어 주입하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신경숙의 경우와 다르게 한강 문학을 세계 독자의 환대라는 꽃다발 속에 파묻히게 한 까닭이라 생각한다.
4. 앞으로의 전망
‘기획의 길’이 성공하였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선 이 길은 원본과 번역본의 차이를 의도적으로 자극하는 경향이 있다. 이 방법이 좋은 것인지 진지하게 성찰한 필요가 있다. 또한 이 길은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사전에 전제한 상태에서 구축되었다. 앞에서 한강의 두 소설을 ‘집단의 폭력과 개인의 희생에 대한 하염없는 연도(連禱)’로 요약했는데, 이는 모든 대립자들을 공평한 판 위에 놓으면서 서로 싸우게 하는 ‘다성주의(Plurilinguism)’라는 장편소설의 이상과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다. 물론 후자를 이상적 상태로 보는 관점(바흐친적인) 역시 주관적인 견해일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선과 악을 미리 규정한 세계 구성과 선과 악의 차이를 없애는 세계 구성 사이의 미학적 가능성에 대해 앞으로 뜨거운 토론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길 하나도 이미 열려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끝내기로 하자. 바로 ‘창작 수업의 길’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한국계 외국인 작가들이 자신의 문학적 단련(간접적 생 체험의 심화와 언어의 세련화)을 위해 한국문학 번역에 뛰어드는 모험을 가리킨다. 최돈미의 김혜순 번역에서 가장 여실한 물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에 관한 탐구는 궁극적으로 한국문학의 범위와 자국어(한글)와 세계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물음을 독촉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