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발굴기
달이라는 이름을 얻은 조선 후기 백자 항아리

  • 문화유산발굴기
  • 2024년 겨울호 (통권 94호)
달이라는 이름을 얻은 조선 후기 백자 항아리

달항아리라고 하면 대체로 높이가 40㎝ 이상이며, 몸체 지름과 높이 비율이 약 1:1인 조선 후기 백자 항아리를 의미한다. 백자 달항아리는 크고 둥근 백색의 몸체에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약간 일그러진 듯한 비정형의 원형을 지니고 있다. 최근 백자 달항아리는 무언가를 담았던 그릇이라는 본질보다 ‘달’이라는 형상에 비유되는 예술품이자 감상물로 인식되고 있다.

 

<백자 달항아리>(국보),

조선 후기, 높이 43.8㎝, 몸통지름 44㎝,

개인소장(2014년 국보 동산 앱 사진)

 

<백자 달항아리>(국보),

조선 후기, 높이 44㎝, 몸통지름 42㎝,

개인소장(2014년 국보 동산 앱 사진)

 

<백자 달항아리>(보물),

조선 후기,높이 41㎝,몸통지름 41㎝, 

국립중앙박물관

 

현재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백자 달항아리는 7점에 이른다. 비슷하게 생긴 단순한 형태 백자가 7점이나 국가 지정 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달항아리에 대한 우리 시대의 인식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백자 달항아리는 애초에 감상용 순수 예술품으로 제작되지 않았다. 일상에서 사용하던 그릇이자 공예품인 조선백자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감상과 수집의 대상으로 부상했고, 달항아리 역시 그 무렵에 골동품으로 거래되기 시작했다.

조선백자는 골동품으로 인식되는 경로와 시기가 고려청자와 달랐다. 고려청자는 19세기 말부터 일본인을 비롯한 여러 외국인의 수집 대상이 되었고, 1910년대를 거치면서 고가 골동품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고려청자에 대한 열풍은 도굴(盜掘) 같은 야만적인 행위까지 불러왔고, 그렇게 다시 세상에 나온 고려청자는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다. 반면에 조선백자는 골동상(骨董商)이 마을을 돌며 오래된 것들을 하나씩 수집하는 방식으로 시장에 등장했다. 처음에는 가격도 상대적으로 낮게 형성되었다.

일제강점기 고려청자는 매우 값비싼 골동품이자 희소한 유물이었으므로 돈이 있어도 손에 넣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차츰 조선백자에 대한 관심도 자라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조선백자의 거래 가격이 고려청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점은 기존과 다른 애호층을 골동품 시장으로 이끌었다. 조선백자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은 거부(巨富)가 아닌 주로 교수와 의사 같은 전문 직종의 종사자나 화가 등의 작가들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나 아사카와[淺川] 형제처럼 조선 미술에 애착을 지닌 일본인들의 미학적 접근을 통해 조선백자가 차츰 예술품으로도 인식되어 갔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한 아름이나 되는 크고 둥근 백자 항아리는 상대적으로 희소했고, 다수의 관심을 끌 물건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백자 달항아리 전시 모습  

백자 달항아리가 지닌 은은한 백색의 색감은 실제 둥근 달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런 문양이나 장식이 없는 둥근 백자는 단순한 형태 덕분에 오로지 모양과 색에만 집중하게 하는 매력을 지닌다. 달항아리가 지닌 형태에 의한 예술적 가치를 발견한 대표적인 인물은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와 도천(陶泉) 도상봉(都相鳳, 1902~1977) 같은 화가들이다. 달항아리는 그들의 정물화에 한동안 주인공으로 자리했다.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1916~1984) 같은 미술사가의 평론 또한 달항아리 가치를 대중으로 크게 확대했다. 21세기에 들어서면 달항아리는 국가유산의 공식 명칭이 된다. 2011년부터 국가유산청(舊 문화재청)은 백자대호(白磁大壺) 대신 ‘백자 달항아리(백자 호, 白磁 壺)’라는 이름을 국가 지정 문화유산의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달항아리를 만든 곳, 금사리> 전시

 

  경기도 광주시 금사리 마을 입구

달항아리 모양 표지석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크고 둥근 백자 항아리를 달에 빗대어 애호했던 사람들의 안목이 ‘달항아리’를 만들었고, 후대 비평가들은 달항아리를 조선 시대 백자 문화의 중요한 유물로 평가했다. 그 연장에서 우리 시대 많은 사람이 달항아리를 한국의 대표 문화유산으로 애호하고 있다.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크고 둥근 백자 항아리를 달에 빗대어 애호했던 사람들의 안목이 ‘달항아리’를 만들었고, 후대 비평가들은 달항아리를 조선 시대 백자 문화의 중요한 유물로 평가했다. 그 연장에서 우리 시대 많은 사람이 달항아리를 한국의 대표 문화유산으로 애호하고 있다.

 

박물관을 찾는 많은 사람이 즐겨 감상하는 백자 달항아리지만, 만든 곳이나 쓰임에 대해서는 공유된 바가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오직 감상의 연장에서 달의 이미지와 항아리의 모양만이 연계되는 측면도 있다.

정해진 대로 배워서 익히는 전통이나 유물이 아니라, 문화유산으로서 백자 달항아리 본질에 접근하자면, 대개 질그릇으로 만드는 둥글고 커다란 항아리를 백자로 제작했던 조선 후기의 현상도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백자는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다. 조선백자는 실용(實用)이라는 가치를 바탕으로 화려하고 복잡한 장식보다는 단정하고 견고한 모양새를 갖추었다. 특히 항아리는 사발과 접시 같은 반상기와 함께 가장 많이 만들어진 그릇이었다.

백자 항아리는 국가 제사에도 쓰였고, 무덤에 부장하는 명기(明器)에도 빠지지 않았다. 백성들은 필요한 물과 술을 비롯하여 각종 식음료를 담던 용기로 백자 항아리를 애용했다. 백자 항아리는 다양한 용도로 장기간 사용된 그릇이므로, 시기별로 모양새도 조금씩 달라졌다.

둥근 항아리는 조선 전기에도 많았지만, 달항아리로 불리는 커다랗고 둥근 항아리는 주로 조선 숙종(肅宗, 재위 1674~1720)과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시대에 경기도 광주(廣州)에 자리한 관요(官窯)에서 만들어졌다. 관요는 이름처럼 나라에서 운영한 가마로 왕실과 궁궐의 여러 관청에 필요한 백자를 만들었던 곳이다.

관요는 땔감을 따라 광주 지역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백자를 제작했다. 최근 발굴 성과를 살펴보면, 17세기 말 궁평리(宮坪里)를 비롯하여 18세기 전반 관음리(觀音里)나 금사리(金沙里) 지역 여러 관요 가마터에서 달항아리 파편들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금사리는 달항아리 고향으로 알려진 동네로 마을 입구 표지석도 달항아리 모양이다.

 

달항아리 성형 모습[접동법(接胴法)]

 

1637년 무렵 명나라 사람 송응성(宋應星, 1587~1648)이 지은

『천공개물(天工開物)』에 등장하는 항아리 만드는 모습

 

 17세기 말 조선 정부는 당시 상당수 일반 사대부가 이미 관요 백자를 사용했던 현실을 반영해 관요 백자를 일반에게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후 관요는 공식적으로 왕실과 관청은 물론 일반에 판매할 그릇도 만들게 되었다. 달항아리는 바로 이러한 시기에 제작되었다. 당시 관요에서는 간혹 일반적인 둥근 백자 항아리를 크게 제작해달라는 요구를 받았고, 사기장들은 그에 부합하는 큼지막한 항아리를 백자로 제작했던 것이다.

숙종과 영조 시절 조선은 경제와 문화 전반에 걸쳐 발전을 거듭했다. 왕실과 사대부는 물론이고 서민들 역시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사회 풍조의 연장에서 보통은 질그릇으로 만들던 큼지막한 항아리를 백자로 만들어 낸 것이다. 당시 관요에서는 둥근 항아리와 함께 일부 병과 접시도 커다랗게 만들어졌다.

달항아리 같은 큰 그릇은 발이나 접시처럼 물레 위에서 한 번에 빚어내기 어렵다. 항아리는 성형 과정에 그릇의 아랫부분이 윗부분을 지탱하는데, 그릇의 크기가 클수록 형태를 만들 때 점토 자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찌그러지기 쉽다. 그 때문에 조선 시대 사기장들은 동체를 절반씩 따로 만든 다음에 점토가 굳으면 위아래를 이어 올리는 방법으로 큼지막한 항아리를 만들었다. 달항아리만의 특징으로 알고 있는 동체 접합 방식[접동법(接胴法)]은 사실 조선 전기부터 이미 쓰였으며, 이웃 나라 중국에서도 사용한 제작 기법이다.

달항아리의 용도와 관련해서는 일부 유물에 남아있는 명문이 주목된다. 대표적으로 개인이 소장한 백자 항아리 저부에 표시된 ‘연령군겻쥬방’이란 내용은 이 항아리가 숙종 아들이자 영조 이복동생인 연령군(延齡君, 1699~1719) 집 주방에서 쓰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항아리들은 이리저리 옮겨가며 사용하기에 크고 무겁기 때문에 아마도 주방 한 곁을 차지했을 것이다.

백자 달항아리가 궁궐이나 종친 저택에서 쓰인 ‘그릇’이었다는 점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실제 최근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서울 시내 조선 후기 민가 건물지에서도 달항아리의 파편들이 일부 출토되고 있다. 왕실 이외 사람들도 이러한 항아리를 일상에서 활용했음을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백자 항아리>, 조선 후기, 높이 37.2㎝, 개인소장

(2006년 서울옥션 100회 경매 도록)

 

 개인 소장 <백자 항아리>의 명문 세부

(2006년 서울옥션 100회 경매 도록)

 

요즘 우리는 백자 달항아리라는 문화유산과 자주 접하고 있다. 달항아리가 우리 문화와 전통에 대해 특정한 환상을 심어주는 단순한 감상물로만 남지 않고 우리 문화유산을 더욱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줄 단초(端初)가 되길 기대하는 바람에서 달항아리의 제작 배경과 용도에 대해 잠시 짚어보았다.

박정민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부교수, 1977년생
저서 『동아시아의 도자문화 백자』(공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