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식당
내가 간판 없는 식당의 내부를 줄곧 쳐다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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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년 겨울호 (통권 94호)
내가 간판 없는 식당의 내부를 줄곧 쳐다볼 때

검정 스쿠터 오른편에 있는 건물이 할머니집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흰색 창문이 되었지만 미닫이로 만든 나무문이 있었다. 487번지는 번화해진 연남동에서 옛 모습을 간직한 거의 유일한 길이다.

 

나는 열 살이었다. 내게 그 집 떡볶이를 사준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1인분 300원, 야끼만두 2개를 더하면 400원인 그 가격은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다. 늦봄, 몸보다 넉넉했던 반팔 티셔츠, 어둑한 낮, 유독 한적했던 그 길을 나는 안다. 가진 돈이 있음에도 들어가길 주저하던 어린 내가 있다. 몇 달 전, 이 집 즉석 떡볶이는 처음 먹은 맛, 처음 먹은 음식, 처음치고는 너무 맛있는 맛이었다. 줄곧 그 맛이 궁금했지만 혼날 것이 두려워 부모님을 보챌 수 없었고, 결정적으로 내게는 돈이 없었다. 게다가 혼자서는 감히 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 집은 이상하게도 내 또래 꼬마들이 드나들지 않았다. 교복 입은 형들만이 가득해서 혼자 가려는 생각을 감히 하면 안 됐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나는 소심했고 괜한 걱정이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돈을 모았고 내내 곱씹던 그 맛을 확인하고 싶어 끝끝내 몇 안 되는 용기를 내었지만, 결국 그 집 앞에서 쭈뼛대고 있다. 할머니와 여러 번 눈이 마주쳤으나 모른 척, 애먼 길바닥을 발로 찼다. 빨개진 얼굴이 들킬까, 괜한 곳을 쳐다도 보았지만 소용없는 짓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연남동 487번지에서 태어나 줄곧 그 동네서 자랐다. 487번지 초입에는 홍제천이 있고 그 천 건너에 모래내와 가좌역이 있었다. 초입부터 길게 그어진 두 길 중 큰길을 따라 걸으면 경성고등학교로 가는 주택가가 있고 나머지 작은 길은 그 큰길의 샛길 정도였다. 폭이 좁은 촘촘한 길이었는데 이 동네 상점들 모두 이곳에 모여 있을 정도로 번잡하고 활달한 길에 주택들이 더해진 복잡한 길이었다. 즉석 떡볶이집은 487번지 작은 길에서 가장 끝 쪽에 있었다. 파마머리 할머니. 어떤 날은 하얗고, 또 어떤 날은 검은 머리칼 할머니가 있다. 어린 나보다 큰 하지만 어째서인지 손만은 작아 보이던 할머니 오른손에 쥐어진 두툼하고 넓적한 사각 평판 주걱이 보인다.

나무 의자는 두꺼운 합판에 가로는 길고 세로로 좁아 불편한 의자였지만 어린 내 체형에 알맞았다. 당시에도 오래된 목재의 빛은 바랬지만 사람들이 자주 그리고 오래 머물렀을 의자 중앙에서는 반듯한 윤기가 흐르는 묘한 의자였다. 반쯤 열린 나무 미닫이문이 연한 바람에도 큰 소리를 내면 무심히 문짝을 툭툭 치던 할머니 왼손도 보인다. 문 앞 테이블은 4인석이나 지금은 손님이 없는 시간. 혼자냐, 돈은 있냐, 할머니는 묻지 않고 집게손가락을 하나 펼쳐보이시고는 본디 흰색이었으나 이제는 연한 노란빛 사각 통을 들고 문 없는 어둑한 창고로 들어간다. 창고는 떡볶이집이 있는 1층과 단절된 2층집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 있고 그곳에서 장독 여는 소리를 듣는다. 곧 고무 사각 통에는 검붉은 장이 가득 담기고 은색 평판 주걱에 여분의 장을 묻힌 채 할머니는 온다.

이곳은 간판이 없어 ‘할머니집’으로 불렸다. 한가할 때나 2인분의 경우에는 할머니가 직접 끓여 손님에게 가져다주었고, 인원이 많은 경우에는 직접 끓여 먹을 수 있게 화구 위에 재료가 담긴 양수 냄비를 올려주고는 했다. 나는 손잡이가 직각으로 길게 올라온 검정 편수 냄비에 할머니가 직접 끓여줄 떡볶이를 기다린다. 노란 양은 주전자에 담긴 육수인지 맹물인지 알 수 없는 물을 냄비에 따른 후, 두툼한 양배추를 한 주먹 올리고 반으로 잘린 밀떡 열 개가량을 냄비 주위에 무심히 흩뿌린다. 물론 삼각으로 썰린 어묵도 몇 개 넣어준다. 양배추 위에 쫄면, 그 위에 주걱으로 퍼 올린 양념장이 투박하게 더해지고, 미원과 설탕이 수북하게 쏟아진다. 화구 밸브를 열고 성냥을 부딪고 화구의 불이 켜진다. 온전하게도 따뜻한, 불과 그 빛이 나를 노곤하게 했더랬다. 냄비 물이 끓을 때까지 할머니의 주걱은 느긋하고, 끓기 시작한 물은 처음엔 붉다 국물이 졸아들며 점차 검붉게 변한다. 이때 만두를 넣는다. 만두는 부드러워진다. 나는 여러 번이나 침을 삼키고 냄새를 맡고 화구 위에 솟아나는 불과 끓어오르는 떡볶이 국물의 점성과 색감을 본다. 온기 가득한 허기짐이었다.

양배추는 도톰하고 부드럽다. 국물은 숟가락으로 열댓 번 떠먹으면 없어질 정도 양으로 쫄면을 빨리 먹지 않으면 그마저 금세 사라지고 마는 수준이다. 만두는 생각처럼 부드럽지 않지만, 국물을 완벽히 머금은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상대적 식감은 황홀하다. 특히 쫄면에 밴 양념장이 탁월하다. 작게 썰린 떡볶이는 씹기에 적당하고 경질 냄비에 담긴 모든 재료는 공평하게 뜨겁다. 즉석 떡볶이와 꼬마김밥, 못난이만두와 야끼만두, 삶은 계란만 파는 가게이니 분식집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수준이었다. 그마저도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야끼만두 하나만 남겨두셨으니 말 그대로 즉석 떡볶이 전문이었던 셈이다. 아쉽게도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문을 닫으셨다. 할머니 말년에 소일거리로 유지하던 것인데, 학교 주위에 번잡하게 널려있던 몇 곳 분식집에서 음식을 싸게 판다는 볼멘소리를 하며 할머니를 찾아와 따지는 일이 잦았다는 말을 한참 지나서야 들을 수 있었다. 그 집 양념에는 춘장과 고추장의 완벽한 비율에 더해 장독에서 숙성시키던 할머니만의 비법이 있었는데 이제 없다. 오래된 일이다.

나는 이제 연남동에 살지 않지만, 일터는 아직 그곳에 있다. 번화해지면서 내가 알던 거의 모든 곳이 사라졌다. 그마저 있던 것들은 위태롭고 내가 알던 것들은 스스로 변했거나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었다. 가까운 친구들은 높은 집값을 못 이겨 고향을 떠났고, 그보다 먼저 내가 즐겨 먹던 미리내 라볶이집과 연남동 순댓국집과 이품만두가 사라졌거나 월세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곳으로 떠났다. 반면, 나의 487번지는 그와 다르게 소외된 샛길로 있다. 안장 없이 방치된 자전거처럼 어쩌자고 그 자리에 있다. 나는 더 이상 떡볶이 맛집을 찾는 수고를 하지 않지만, 이따금씩 가까운 즉석 떡볶이집을 찾아 야끼만두와 꼬마김밥을 추가하고 라면 대신에 쫄면을 넣어 먹곤 한다. 삶은 계란을 으깨어 농도 짙은 국물에 노른자를 적셔 먹는 것도 잊지 않고, 여전히 남은 국물에 밥을 비벼 먹진 않는다. 적당한 맛의 떡볶이를 먹으며 그 시절 떡볶이는 이렇게 먹었었지, 하며 내가 아는 즉석 떡볶이를 생각할 뿐이다.

내가 400원을 들고 혼자 할머니집을 찾아갔던 그날, 채 다 먹지 못한 떡볶이가 아쉬워서 나는 여러 번이나 그 집을 돌아보았다. 그 돌아봄과 지금 돌아봄이 어째서 애틋한지 부재를 경험한 사람들은 안다. 그보다 좋고 더 맛있다 한들 꼭 그 맛이어야 하는 음식이 있다. 애틋한 맛은 아린 맛, 쉽게 삼켜지지 않는 맛인데 그런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밥에서 밥으로 넘어가는 맛이 나는 좋다. 추억이 아니라면 모를 맛이다.

오병량
시인, 1981년생
시집 『고백은 어째서 편지의 형식입니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