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나는 출가하였다
- 그리고 나는 출가하였다
처음 본 순간부터 내 마음을 절대로 떠나지 않는 이미지가 있다. 바로 부처님 열반상이다.
2001년 11월 16일, 부처님 열반지 쿠시나가르에 도착한 지 사흘째를 맞이했다. 13일 밤늦게 고라크푸르역에 도착한 나는 웨이팅룸에서 배낭을 베고 누워 있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버스를 타고 쿠시나가르에 왔고, 허름한 게스트 하우스에서 이틀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앓았다. 사흘째가 되어서야 기운을 차리고 열반당에 갈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입장권을 끊고 들어서면 폐허의 승원 터가 넓은 가슴으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미 많은 순례객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니르바나 템플이라고 불리는 작은 사원에 들어가기 위한 줄이었다. 니르바나 템플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열반당이라고도 부른다.
폐허의 승원 안쪽에 하얀색 건물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그 사원이 바로 니르바나 템플이었다. 사원 주위에 살라 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살라 나무 낙엽을 줍고 있었다.
사원을 들어서는 순간 나는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누워 있는 불상이 마치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짜 육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라지기르에서 날란다를 지나 파트나·바이샬리·파와를 거치는 힘겨운 여정 속에서 지친 부처님의 육신이 여기 와 누워 계시는 것 같았다. 나는 고작 하룻밤 웨이팅룸에서 잠을 잔 후 이틀을 게스트 하우스에서 내리 쉬었는데, 팔순 노구를 이끌고도 부처님은 거의 매일 노숙이셨다. 그렇게 지친 육신이 맨땅 바닥에 네 겹으로 깐 얇은 가사를 담요 삼아 누워 계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애잔해졌다.
내 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신(神)이 아니라 인간이셨구나. 10년 전에 우리 집 방 안에서 누우신 채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내게 부처님은 그렇게 육친의 정으로 다가오면서, 내가 추앙해야 하는 분이 아니라 내가 닮아가야 할 분이고, 저 멀리 우러러보이는 곳에 계시는 거룩한 분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다정한 분으로 다가왔다.
단체로 온 사람들이 줄을 지어서 열반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합장한 채 일행을 바꾸어가며 계속해서 부처님 열반상을 돌았다. 티베트 사람들이 와서 부처님께 가사를 공양했다. 누워 계시는 부처님께 가사를 덮어드리는 것이었다. 가사를 덮어드리고는 모두 무릎을 꿇고 짧게 기도하고 나갔다. 이어서 흰옷을 입은 스리랑카 사람들이 들어오자 사원을 지키는 관리자들이 이전의 가사를 내리고 새로운 가사를 덮어드렸다.
부처님은 북쪽을 향해 머리를 두고 옆으로 편안히 누워 계셨다. 오른손은 살짝 얼굴을 받치고 계셨고, 오른손 바로 앞에 네팔의 국화 랄리구라스 몇 송이가 화려한 색깔로 놓여 있었다. 발은 경전에 나온 대로 평발이었으며, 발바닥에는 법륜이 그려져 있었고, 두 다리 인대 사이에 연꽃이 살포시 자리를 잡았다.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이후 부처님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리석은 중생들과 뛰어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다. 나는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 담긴 『대반열반경』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부처님께서 대장장이 춘다가 공양한 음식을 드시는 장면이었다.
춘다가 차린 음식 중에 ‘스카라 맛다와’라는 귀한 요리가 있었다. 스카라 맛다와를 본 부처님은 다른 사람에게는 그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시고, 당신 혼자서 그 음식을 드신다. 그날의 스카라 맛다와에는 악마가 몰래 독을 집어넣었는데, 부처님은 이를 알아차리고 그 음식을 당신이 모두 소화하셨다. 부처님은 악마의 독을 젖으로 만들 수도 있었으나, 독을 독으로 받아들이신 것이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붓다를 반열반으로 이끈 음식을 공양한 춘다의 공덕은 붓다를 깨달음으로 이끈 공양을 올린 수자타의 공덕과 같다고 하셨다.
나는 육신을 정리하시는 부처님을 오래 생각했다. 오래 생각해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당신께서 육신을 정리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완성됨을 알았다.
수십 바퀴를 돌다가 나는 부처님 발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때 한국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흑흑, 부처님께서 돌아가셨어!” 그것이었다. 아무리 위대한 성자도 육신의 생명이 다하면 세상을 떠난다는 진실을 말씀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신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나는 그때 신으로서의 부처님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처님 열반상은 내게 스승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육친’의 모습으로 다가왔으니, 부처님을 ‘아버지’로 모시기 위해서는 출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상당한 세월을 흘려보내야 했지만, 그때 보았던 부처님 열반상 이미지를 가슴에 품고 나는 출가하였고, 출가 이후에는 그 이미지를 매일 보듬고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