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아버지 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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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1904~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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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해 인터뷰나 강의 요청이 들어오면 항상 고민하게 됩니다. 세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기억하기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에겐 아버지에 대한 아주 작은 기억들이 남아있습니다. 그 기억들은 어머니나 삼촌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과 겹쳐 더욱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그 시대에 아버지는 멋쟁이셨습니다. 아이보리색 양복을 입으셨고, 앞가르마를 하신 모습, 보우타이를 매셨던 그런 모습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기억 중에 생각하기 싫은 슬픈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1944년 1월 16일 아버지가 북경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저는 영천 화북면 오동 외갓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여섯 살이 되면서 대구시 북성로에 자리를 잡았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삼덕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집 근처엔 대구 형무소가 있었습니다. 큰집을 가려면 반드시 형무소 앞을 지나쳐야만 갈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곳을 지나치다가 포승줄에 묶인 용수를 쓴 죄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정말 저에게는 충격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아! 아버지가 일본 헌병들에게 붙잡혀 가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습니다. 제가 세 살 때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그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경황이 없어 저를 데려가지 못했습니다. 근처에 사시는 조부 뻘 되시는 집안 할아버지가 저를 안고 청량리역에서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 날은 온종일 슬퍼서 우울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에 와서는 어머니에게 그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일찍 철이 들었던지 어머니에게 말씀드리면 마음 아파하실 것 같아서… 하지만 다행히도 어머니는 78세까지 제 옆에 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함께 살면서 어머니가 늘 입버릇처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해 자주 말씀하시면 서운한 마음도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훌륭한 아버지면 무엇 해, 계시지도 않는 분인데…’라고 했고, 학교에서도 선생님과 아이들이 “네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시고, 유명해서 좋겠다”고 하면, 내 마음 한구석에선 나무꾼이라도 내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혼자 속으로 쓸쓸히 웃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시는 삼촌들과 종조부님이 계셔서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특별히 삼촌(원일·원조·원창) 삼 형제분이 번갈아 서울에서 내려오시면 저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마 저를 보면서 아버지가 생각나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여서 그랬는지 삼촌들의 따가운 수염 세례를 받기 싫어서 내려오신다는 소식만 들려도 작은 외갓집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어머니는 “네 아버지는 원체 성품이 반듯하셔서 너의 할머님이 둘째가 들어오면 옷깃이 여며진다고 늘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 아버지의 이미지에 대해 ‘무섭고 강하신 분이겠구나’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었습니다.
또한 “너의 아버지는 깔끔한 성품이라서 바지를 늘 자리 밑에 깔고 주무시는 분”이라고 했고, 옛날에는 흰 칼라를 하고 다니셨는데, 여유분을 가방에 넣고 다니실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형제간에 우애는 경상도에서 으뜸이다”라고 했습니다. 형제분들이 서로 칭찬하면 학문적으로도 오늘은 네(동생)가 장원이라고 격찬하시고, 서로 충고도 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는 동지 같은 우애를 나누셨다고 했습니다.
작은할아버지가 우리집에 같이 계실 때가 있었습니다. 조카들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시면서 “네 아버지 형제들은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재치와 지혜가 뛰어났으며, 효를 우선으로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삼촌들이 번갈아 가며 우리집에 오실 때 일입니다. 하루는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삼촌들이 어머니에게 술과 담배를 권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는 형수라고 생각하지 않고, 누님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형수와 시동생 간의 우애가 각별하셨습니다. 지금은 다 고인이 되셨지만 너무 보고 싶은 얼굴들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만난 아버지 동지이셨던 이정기 선생님은 “네 아버지는 사격의 명수이고, 말을 타고 달릴 때도 백발백중하는 명사수였고, 변장술도 신출귀몰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는 ‘왜 변장술이 필요했을까?’ 의아하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아버지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서 군사 훈련을 받으실 때 하나의 과목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와 절친하게 지내셨던 신석초 선생님을 만났을 때입니다. 선생님이 “네 아버지는 장안에 신사였고, 자존심이 대쪽 같은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를 실제로 들려주셨는데, 하루는 청량리 쪽에서 약속하고 아버지와 친구분들이 모이셨답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석초, 나는 먼저 가겠네”라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왜 먼저 가는가? 우리가 다음 장소로 같이 가려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했더니, “선약이 있어 먼저 가겠네”라더랍니다. 나중에 신석초 선생님이 전철을 타고 가시다가 창밖을 보니 동대문쯤에서 아버지가 걸어가고 있더랍니다. “네 아버지 육사는 차표 한 장이 없으면 그 말도 안 하고 걸어갈 만큼 자존심이 강한 분이다”라고 말씀 해주셨습니다.
2008년 3월 1일부터 제가 이육사문학관에 머물게 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오직 육사의 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금도 여러분들이 나를 반겨주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서 어릴 때 받지 못한 사랑을 아버지를 대신하여 제가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모든 분께 말입니다. 너무나 과분한 사랑과 위로와 격려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아버지의 시신을 거둬주셨던 이병희 선생님을 만났을 때, 제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의 아버지 성품이 어떠셨어요?”라고 했더니, 선생님은 “너무나 따사로운 분이셨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따사로움이 저에게도 느껴지는 것처럼, 여러분들도 행복해졌으면 합니다. 임종 후 마지막 아버지 모습을 말씀해주실 때 “네 아버지는 조국의 해방을 보시지 못해서 그러신지 눈을 감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이병희 선생님이 아버지의 눈을 쓸어내리시면서 “육사! 조국은 우리가 맡을 테니 이제 고이 가십시오”라고 했더니, 눈을 감으면서 코에서 많은 피를 쏟으셨다고 했습니다. 듣는 나도 이야기하시는 선생님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의 참혹한 모습이 나에게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정말 장하고 고귀하신 아버지의 정신을 지금 세대가 얼마나 소중히 생각할까요? 아닙니다. 그것을 바라고 하신 일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조국 광복을 보시지 못하고 가신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아버지가 남겨주신 소중한 유산인 이름이 있습니다. 백일 날 아침 제 이름을 지어주시면서 옥비(沃非). 기름질 옥 자, 아닐 비 자 이름을 제게 주실 때 아버지의 소망을 담으셨습니다. 욕심 없이 남에게 배려할 줄 아는 ‘간디’ 같은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저는 도저히 그런 사람은 못 됩니다. 그런 사람은 아닐지라도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