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⑥ 내가 쉬지 못하는 것

  • 기획특집
  • 2024년 겨울호 (통권 94호)
⑥ 내가 쉬지 못하는 것

쉬고 싶다. 간절히 바랄 때가 자주 있다. 그러다 금세 의문이 생긴다. 내가 지금 안 쉬고 있나? 오늘의 나, 어제의 나, 일하는 시간보다 일하지 않은 시간이 더 많았는데? 충분히 뒹굴거렸는데? 두 팔을 베개 삼아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잠이 오면 잠을 물리치지 않고 달콤하게 낮잠도 즐겼는데? 강아지를 데리고 바깥에 나가서 온 동네 상가들을 다 기웃대며 멀리멀리 걸어 다녔는데?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과 앉아 있지 않은 시간만으로 일과 쉼을 계산한다면, 나는 누구보다도 많이 쉬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쉬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게 되는 걸까.

언젠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보기로 하였다. 쉼과 관련되어 가장 많이 권유되는 방법이기도 했다. 업무 메일과 채팅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고지서 따위가 전자문서로 도착했지만 살펴보지 않았다. 세탁기를 돌려야 한다거나, 청소기로 방바닥의 머리카락들을 치운다거나, 얼룩진 욕실 거울을 닦는다거나…… 더 이상 미뤄둘 수 없는 집안일들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연 쉬는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의 쉼은 어쩐지 숙제더미를 매트리스처럼 깔고 누운 처지 같았다. 한껏 느슨한 그때에도 해야 할 일들을 해치워야 한다는 속삭임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 속삭임을 애써 외면하는 각오 같은 것이 수반되는 느낌이 영 못마땅했다.

초연결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개인에게 접속의 해지는 해방이 아니라 일의 누적으로 뒤통수에 한껏 고일 뿐이다. 언젠가 해야 할 일을 산더미로 만들기보다는 그때그때 해두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계산이 엄습한다. 효율성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쉼의 순간에도 나에게 틈입하고야 마는 이 계산법은 과연 내 성격이나 생활습관의 문제인 걸까. 이게 과연 개인의 성향 따위에 좌우되는 개별적인 문제일까?

나는 우선 더 적극적으로 누워 있기로 했다. 시간 관리, 혹은 통제에 대한 강박을 내팽개치고서라도 충분히 휴식을 취해보고 싶었다. 업무에 차질이 생긴 것은 당연한 결과였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느낀 고립감이었다. 내가 쉬고 있는 것인지 외딴섬에 갇혀 있는 것인지 점점 알 수 없게 되어갔다. 잘 쉬고 있는 상태에 수반되는 사소한 부작용일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주고 싶었지만, 나는 내가 제대로 쉬지 못한다는 걸 이미 알아버렸다. 나는 몸을 일으켰고 무엇이든 해보았다. 사람도 만났고 운동을 하거나 취미활동 같은 것도 도전해보았다. 질 좋은 쉼을 누리는 것이 열심히 일을 하는 것만큼이나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얼마 가지 않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쉬는 것은 일하는 것과 동일했다. 건성으로 쉬었을 때보다 노력하며 쉬었을 때에 번아웃은 두 배로 찾아왔다. 사이사이 시간에는 OTT 시리즈와 영화를 보았다. 복잡한 사회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영화를 보며 쉬는 것이 한때 나의 여가생활이었는데, 그때에는 그런 유의 영화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내 정신이 영화 속 현실에 피로감을 호소했다. 나는 매년 독서율이 떨어진다는 출판계의 한숨소리를 상기하고 있었다. 독서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해되었다. 성과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회를 비판할 시선을 확보하고, 그 사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주체적 삶만이 우리를 진짜 쉼으로 인도한다고 말해지곤 하지만, 쉼을 먼저 획득하지 못한다면 그걸 사유할 힘도 발휘될 리 없다. 쉴 수 없으므로 사유할 수 없고, 사유할 수 없으므로 쉴 수 없는 무한굴레. 결국 나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영상이나 현실이 완전히 소거된 영상들을 주로 보았는데, 그것은 내게 쉼이라기보다는 중독 혹은 회피에 가까웠다. 중독이나 회피가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 영상들을 통해 쉼을 누린다고 자각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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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쉴지 궁금해졌다. 지인들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어떻게 쉬느냐고. 내가 해왔던 일과 비슷한 대답들이 쏟아졌다. 자는 사람, OTT 영상물을 보는 사람, 집안일에서 해방되기 위해 바깥에 나와 친구와 수다를 떠는 사람, 반대로 집에 틀어박혀 창고의 물건들을 다 꺼내가며 대청소를 하는 사람, 코인 노래방에서 목이 쉴 때까지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사람, 밤새 술 마시는 사람, 마라톤 하는 사람, 텃밭에서 오이와 토마토를 키우는 사람, 목욕 하러 가는 사람, 고스톱 치는 사람, 마사지 받는 사람, 책 읽는 사람, 여행 가는 사람, 쇼핑 하는 사람, 연극 보는 사람, 덕질 하는 사람…… 몸을 가만히 두기도 했지만 혹사시키기도 했다. 멍하니 있기도 했지만 분주했다.

쉰다는 것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이 내게 고백해준 쉼에서 내가 찾아낸 공통점은 하나였다. 우선, 단절을 필요로 했다. 도시생활이든, 회사생활이든, 집안일이든, 인터넷이든. 누군가에게 쉼은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도구였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쉼이야말로 삶이었다. 어느 쪽을 자신의 삶으로 여기든, 자신이 원할 때에 단절을 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단절이라 표현했지만, 그것은 여태껏과는 다른 세상과의 연결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쉼은 이동의 다른 말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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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접하는 CF나 SNS 속 쉼의 이미지에서는 행복에 대한 프로파간다의 그림자가 상투적이고 노골적이다. 사회가 제시하는 성공적인 삶에 대한 이미지와 쉼에 대한 이미지는 쉽게 중첩된다.

 

행복은 얻고 싶은 것일 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을 얻을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이다. 긍정 심리학이 종종 행복을 상품으로 기술하면서 경제학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헤디와 웨어링은 다른 사람들보다 일반적으로 더 행복한 사람들이 가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개인의 특성들”을 가리켜 “저량”이라 부르면서 여기에 사회적 배경, 성격, 인맥을 포함시킨다. 행복은 당신이 은행에 더 많은 것을 저축하게 한다. 개개 주체의 행복은 자본 획득과 저축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여러 다양한 형태의 자본(배경, 성격, 네트워크)에 의존한다.1)

 

사라 아메드는 위의 책에서, “행복이 어떻게 사회적 규범을 사회적 선으로 재기술하는 데 이용되는지”에 대해 말한다. 개인적인 감정의 지표로 보이는 행복이 ‘좋은 삶’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어떻게 사회적으로 강력한 지배력을 획득했는지, 그로 인해 무엇을 적극적으로 소외시키고 배제해왔는지, 인종 차별에서부터 정상가족, 소수자 문제까지 파헤친다. 보험, 맥주, 신용카드 광고 등에서는 이런 규범적인 행복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행복한 가족, 보다 나은 사교, 고급 리조트로의 여행. 자본과 소비와 네트워크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해 보이는 이 이미지들이 행복을 전유하는 사회를 여실히 보여준다. 내가 쉼을 누려보려 애써보았으나 잘 되지 않았다는 의문을 품게 된 것도, 이미 전유되어버린 쉼의 이미지 탓은 아닌가. 쉼은 행복보다 조금 더 ‘지금’과 결속돼 있다. 쉼은 행복과 달리, 먼 미래에 우리가 당도할 도착지로 지연당하지 않으려는 속성이 있다. 쉼은 행복보다 즉각적이다. 지금 당장 실천하라는 요구가 추가돼 있다. 번아웃의 다음 단계에 이르러서 다소 조급한 당위로써.

재미있는 점은, 사라 아메드가 위험하다고 제시한 행복에의 사회적 이미지와 쉼은 이미지로 볼 때에는 사뭇 다른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쉼은 사회적 성공 모델을 따르는 데에만 국한될 수 없다. 오히려 성공에 대한 온갖 이미지로부터 탈주(자본, 네트워크, 자기 계발 등)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쉼에 한해서는, 철저히 자기계발과 자본의 투자를 뒷받침하는 연장선상에서 쉼이 구가되기도 한다. 탈주와 투자. 서로 완전히 다른 방향성을 갖고 있는 이 이미지들이 ‘쉼’이라는 단어 안에서 서로 싸우고 뒤섞여 있는 셈이다.

피로가 사회적인 맥락과 연결되어 이야기되는 반면, 쉼은 개인적인 실천 방식으로 권장되곤 한다. 하지만 쉼이야말로 그 명명에 대한 이데올로기들의 전장이다. 쉼은 무엇과 단절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쉬는 것이 일하는 것 같다는 감각. 쉬는 동안 도태되고 고립되는 것만 같다는 느낌. 그로 인한 피로감은 쉬는 동안 우리가 사회의 어떤 면을 바라보고 또한 등지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봐야 이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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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상은 매 순간 쓰기와 연결된다. 뉴스에서 보는 사건 사고나 음식을 차려 먹고 가족과 대화하는 일에까지. 글쓰기에는 오프 스위치가 없고 나는 글쓰기로부터 빠져나오는 방법을 모른다. 나에겐 글쓰기가 숨쉬기나 다름없다. 한때 나는 내가 쉬지 못하는 이유가 나의 작업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단절 불가능성 때문에 쉴 수 없다고 느꼈다. 쉬고 싶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내가 쉬지 못하는 것, 정말 나의 작업의 특수성 때문일까?

지난봄, 예술고등학교에서 특강을 했을 때에 한 학생이 내게 질문을 했다.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있느냐고. 나는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정말로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고쳐 말했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 다른 갈등들이 있었을 뿐이었다고. 학생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덧붙였다.

그만두고 싶어질 때,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정말로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은 건지,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게 만드는 다른 요인들이 있는 건지를요. 틀에 맞춰야만 하는 합평이 지긋지긋하다거나, 경쟁하듯 글을 써야 하는 현실에 지쳤다거나, 글쓰기의 보람도 여러 환경들의 지배 아래에 있으니까요.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무엇에 지친 걸까. 글을 쓰는 삶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나를 지치게 한 진짜 이유는 과연 내가 믿던 그 이유였을까.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기 위한 304낭독회의 일꾼 경험을 시작으로 하여, 촛불 집회, 문단 내 성폭력, 성평등 문화정책, 미투 운동, 여성·인종·장애·퀴어를 주제로 하는 문학주간 행사와 대학 특강, 밀레니엄 세대, 동물권, 채식주의, 여성 역사 소설 - 이야기되는 여성, 이야기하는 여성, 그리고 쉼까지. 여태 나를 호명해서 내가 공적 자리에 나가 발제를 하거나 토론을 했던 주제들이다.

돌이켜보면, 이런 담론들은 유행처럼 소비되다시피 했다. 그 과정에서, 그 담론의 기세를 타고 문단 체제에 자리를 잡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가 남을 뿐이라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안까지도 자신의 먹이로 흡수해버리는 소비주의와 성과주의의 먹성에 진저리를 치면서. 질문이 발생하면 급박하게 해답이 쏟아졌고, 심지어 어떤 순간에는 답변을 강제당했고, 이후에 또다른 질문들이 빚처럼 쌓였다. 동료 작가들을 만나면, 우스갯소리로 『어린왕자』에 나오는 가로등지기가 된 것 같다고 나는 말하곤 했다. 행성이 점점 빨리 돌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너무 어지러워요.

“스피치가 그것만으로 충분한 영향력이 있다는 가정, 말과 행동에 동일한 힘이 있다는 가정, 나의 생각을 공들여서 적어 나가는 일이 매우 정의롭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거나 혹은 이상적이라는 가정”2)은 스피치가 “미덕 과시”와 “자기 홍보”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지나 스피치 자체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일종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이르렀다. 문학평론가 박혜진은 2015년부터 이어져 온 문학계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참여자로 있을 때는 정말 곤혹스러움이 컸고 일종의 패배감 같은 것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확실하게 해결되지 않는 불확실한 부분들이 있고, 그것이 바로 비평의 차원일 텐데, 그런 비평적 가치와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공포스러운 상황이더라고요. 논쟁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보다는 논쟁이 너무 위험해졌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3)

공포, 미덕 과시, 자기 홍보, 새로운 세계와 접속하고 싶다는 열망, 쉼에 대한 간절한 욕구, 이런 것들이 뒤범벅된 채 작가들은 글을 써나간다.

여기까지 적고 나는 몹시 지친 상태가 되어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강아지와 함께 바깥을 거닐면서 두통 때문에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다시 책상에 앉아 이 글을 마무리해야 한다. 쉼에 대한 해답을 찾느라 정작 쉬지 못하는 나. 모든 문제에 너무 빨리 대답을 해왔다는 께름칙함에 둘러싸인 나.

우리가 하나의 질문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 나눠본 적이 있는가? 나는 모르겠다. 질문과 대답과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지는 이 속도전이야말로 정작 대답의 내용에는 무관심하다고 나는 느낀다. 설령 현명한 대답이 도출된다 한들 다른 질문으로 재빨리 옮겨가 버리고 마는, 또 하나의 폭력을 쓰디쓰게 목격하면서.

항상 글을 쓰면서도 나는 누군가와 대화에 푹 빠져드는 상상을 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나에게 노동의 괴로움이자 대화의 기쁨이다. 나는 내 글쓰기에서 이야기를 충분히 하고 싶어 한다. 들어주는 사람이 누구든 간에. 들어주는 사람이 있든 없든 간에. 나는 글쓰기의 바깥에서도 오래오래 대화를 나누고 싶다. 쉼에 대해서도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보태고 싶다. 반론을 제기하고 합을 맞춰가면서 쉼의 가치와 모양새를 공유하고 싶다. 일상의 틈새에서 내가 여태 누려온 쉼과 우리 모두의 쉼이 어떻게 다른지, 왜 다른지, 꼭 같아야만 하는지를 이야기해보고 싶다. 먼 미래에 내가 노년에 이르렀을 때에, 지금 생각하는 쉼과 그때에 생각하게 될 쉼이 또 어떻게 다를지를 이야기해보고 싶다. 몸소 실천해보았고 그게 삶을 어떻게 지탱시켜주었는지를 섬세하게 회고하며 대화해보고 싶다. 지금의 대화와 먼 미래의 대화를 연결짓고 싶다. 꼭 쉼에 대해서가 아니어도 좋다. 우리가 함께 골몰하는 사회적 담론들을 소혹성에서처럼 점등하고 소등하는 식으로는 하고 싶지가 않다. 평생동안 오래오래 수정하고 보완해서 신체에 새겨지게 하고 싶다. 지금으로써는 이게 내가 갈구하는 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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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라 아메드, 『행복의 약속』, 성정혜, 이경란 옮김, 후마니타스, 2021년, 26~27쪽.
2) 지아톨렌티노, 『트릭미러』, 노지양 옮김, 생각의힘, 2021년, 41쪽.
3) 박혜진, 「대화, ‘지금-여기’의 비평을 향해」, 『문학과 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 문학과지성사, 2023년, 97쪽.

 

 

※ ‘문학적 쉼’ 세션의 발표원고입니다.

임솔아
시인, 소설가, 1987년생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겟패킹』, 장편소설 『최선의 삶』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중편소설 『짐승처럼』,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