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⑤ 가해자의 존엄

  • 기획특집
  • 2024년 겨울호 (통권 94호)
⑤ 가해자의 존엄

얼마 전의 일이었다. 늦은 밤,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아파트 재활용장에 나갔다가 같은 동 602호에 사는 K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간, K는 재킷에 구두를 신고 있었고, 백팩을 멘 차림이었다. 회식이 있었는지 술 냄새가 났고 걸음걸이가 일정치 않았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마치 오래된 연인을 만난 듯 손부터 잡았다(나는 다른 손엔 페트병이 가득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얼굴 한번 보고 싶었다고, 편의점에 가서 딱 맥주 한 캔씩만 하자고, 내 의사와 상관없이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나보다 두 살 위였고, 아내와 아이들끼리도 서로 친분이 있었다. 나는 어어, 하다가 정문 앞 도로를 건너 편의점 비치파라솔에 앉게 되었다. 지갑도 갖고 나오지 않은 터라 그가 맥주를 사 올 때까지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그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바로 백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얼마 전 치른 고등학교 1학년 국어과 모의고사 문제지였다. 그는 강사만 스무 명이 넘는 한 입시학원의 부원장 겸 국어과 강사였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주변 학원과 경쟁이 치열해 일요일에도 따로 강사들과 세미나를 하고 유튜브로 문제 풀이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만큼 월급도 많이 받고 학원에 지분 형식으로 투자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아내가 모르는 그의 또 다른 이력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예전 나와 산책길에서 만났을 때, 사실 자신도 소설가 지망생이었다고, 대학을 졸업하고 2년 동안 소설만 썼는데 아버지가 몸져눕는 바람에 포기하게 되었다고, 그땐 급하게 돈을 벌어야 했거든요, 하면서 수줍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K와 같은 사람을 이전에도 몇 명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들이 별 감흥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 선생, 이 선생은 몰랐겠지만 이것 좀 보세요. 이 선생 소설이 아이들 시험 문제로 나왔어요.”

K가 펼친 모의고사 문제지에는 내가 2년 전 펴낸 소설집의 한 대목이 고스란히 지문으로 나와 있었다. 그 소설은 한 아파트 단지에 찾아온 낯선 남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정이 딱한 남자를 위해, 역시나 사정이 여유롭지 못한 아파트 주민들이 십시일반 도움을 주는 초반부 플롯을 지나, 다시 그들의 환대와 호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적의와 모욕으로 바뀌는지, 그 과정 속에서 주인공인 1인칭 ‘나’의 내면은 또 어떤 색깔로 변하는지, 그 변화에 대해서 고민한 소설이기도 했다. 그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할 텐데, 시험 문제에 나온 것은 소설의 앞뒤를 자른 중간 부분 한 대목뿐이었다.

“이 선생, 이 선생이 이 문제 좀 풀어봐 주시겠어요? 그래도 이웃에 소설가가 사니까 이게 정말 좋네! 내가 이걸 좀 유튜브에 올리려고.”

나는 K의 부탁을 들어줄 마음은 없었지만(실제로 K는 내가 모의고사 문제지를 들여다보는 장면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었다), 괜한 호기심 때문에 문제를 살펴보았다. 문제는 모두 다섯 문제였다. 내 소설의 한 대목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을 고르는 문제와 소설의 감상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을 고르는 문제, 등등. 문제는 모두 객관식이었다. 나는… 세 문제는 정답을 맞혔고, 두 문제는 틀린 답을 냈다. 알쏭달쏭했던 답이 모두 틀린 것이었다.

“으응? 아니, 작가가… 자기 소설 문제를 틀리면 어떻게 해요?”

K가 잔뜩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휴대전화 카메라 앱도 꺼버렸다. 사실 나도 당황했다. 하지만 이런 때 대답하라고 마련된 소설가들의 만고불변의 답변이 있는 법. 나는 일부러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소설일수록 정답은 없으니까요.”

K는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듯한 시선으로 멀거니 나를 바라보았다.

현대소설의 핵심엔 언제나 ‘자아와 세계의 대립’이 있었다. 그것이 전통소설과는 다른 현대 소설만의 고유한 정체성이다. 전통소설이 그리는 세계에는 그 사람이 하는 ‘일’과 그 사람의 ‘운명’이 언제나 일치했지만, 현대소설에선 그것이 매번 ‘불일치’의 양상으로 드러난다. 아니, 단순히 ‘불일치’뿐만 아니라, ‘전복’과 ‘분화’의 양상으로 펼쳐지기도 한다.

나는 예전부터 위대한 현대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가해자’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왔다. 이때 말하는 ‘가해자’란 현대의 규범과 도덕, 법률과 가치에서 벗어난, 그것을 좋든 싫든 위반한 인물을 뜻한다. ‘뫼르소’가 그랬고, ‘개츠비’가 그랬으며, ‘라스콜니코프’와 마담 ‘보바리’가 그랬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그들은 논쟁적인 존재들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왜 살인자를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가 왜 범죄자의 이면을 바라봐야 하는가? 우리가 왜 불륜의 사정을 따져봐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독자들은 제각각의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전통적인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선량한 ‘피해자’들이다. 그들은 ‘가해자’로부터 자신의 가족과 마을을 지키고자 애쓰는 인물들이었으며, 공동체의 규범과 가치를 보호하고자 길을 나선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답은 언제나 하나뿐이었다. 공동체의 규범과 가치를 알면 답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법. 전통소설은 답을 찾는 장르가 아닌, ‘명예’를 익히고 내면화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인가? 나는 지금 그것을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사실 이것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명예’와 ‘존엄’의 차이일 수도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우리의 자아와 끝없는 대립 관계 속에 놓여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또 언제나, ‘가해자’가 될 운명에 놓일지도 모를 일이다. 현대소설은 그 ‘운명’에 대한 시뮬레이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거기에 대한 답은 없다. 모의고사 문제로 나오거나, 풀 수 있는 성질도 아니다. 작가가 자기 소설의 답을 내릴 수 없는 사정도 그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 예전의 작가는 다분히 명예로운 직업이었다. 오직 그 일을 위해서 태어났고, 그 일을 하다가 숨을 거뒀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작가는 어쩌면 명예로부터 추방된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소설을 접을 수 있고, 생계를 위해서라면 다른 길을 모색할 수도 있다. 소설이 삶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작가를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나쁘게 변한 것인가? 나는 그것도 쉽게 말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생계를 위해서 소설을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소설 풀이과정을 유튜브로 찍어 올린다고 해도, 그의 ‘존엄’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법. 그 ‘존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때가 진정 소설과 가장 멀어진 상태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 <제5회 중한일 동아시아문학포럼>을 위해 ‘전통문화와 현대성’을 주제로 2020년에 작성된 원고입니다.

이기호
소설가, 1972년생
장편소설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차남들의 세계사』 『사과는 잘해요』,
소설집 『눈감지 마라』 『누가 봐도 연애소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