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산(지금은 창원에 편입되었지만)에서 중학교를 다녔고, 그 당시에는 일 년에도 꽤 여러 번 시에서 주관하는 백일장이 열렸던 것 같다. 학교에서는 백일장에 나갈 학생을 선별했는데, 보통은 학급위원이거나, 성적이 상위권인 학생들이었다(이 기준이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 시에서 주관하는 백일장에서 장원을 밥 먹듯이 받던 친구는 나중에 과학고에 진학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는 학생 중에는 나도 섞여 있었다. 백일장에 나가는 걸 즐기지는 않았다. 즐기지 않았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사실은 고역이었다. 글을 쓰는 것 자체도 어려웠거니와, 정해진 시간 내에 정해진 주제에 맞추어 무언가를 써내는 건 내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나가기 싫다는 말을 못했다. 그때의 나는 그런 애였다.
그러다가, 그게 몇 번째 백일장이었지? 주제가 ‘봄비’였던 백일장. 나는 ‘봄비’에 대해서도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나는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쓰기로 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떠올렸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아홉 살 때 할머니는 뇌출혈로 쓰러졌고,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결국은 집으로 모셔왔다. 그 바람에 나는 동생과 방을 함께 써야 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 이듬해 3월에 집에서 돌아가셨다. 장례식을 마치고(그때는 그 모든 걸 집에서 했다. 할머니가 머물던 방에서 장례를 치렀다), 우리 가족과 친척들은 커다란 버스를 타고 선산이 있는 경주로 갔다. 나는 그 글에 이런 내용을 썼다. 할머니를 묻고, 선산을 내려가기 전에 그 근처에 핀 진달래를 꺾어서 할머니 무덤 앞에 두었다고. 많이 울었고,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었다고. 그러니까, 내 방을 차지한 할머니에게 불만을 품었다는 사실에 대해, 할머니가 우리집에 있는 동안 진심으로 할머니를 사랑할 수 없었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촉촉하게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게 할머니가 나를 용서하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그제야 나는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고.
나는 그 글로 장원(은 당연히 아니고), 차상, 차하도 아닌 가작을 받았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시상식에 참석했다. 거기, 자리에 앉아서 입상자의 글을 묶은 책에 실린 내 이름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한 번 정도 더 백일장을 나간 후, 나는 선생님께 더 이상 백일장에 나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글쓰기에는 특별한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선생님은 별 고민도 없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
최근에 나는 종종 그 글을 떠올리곤 했다. 아니다, 그 글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열 살 때 할머니의 죽음을 겪었던 나, 그리고 그로부터 오 년 후, 그 죽음을 다룬 글 속의 나를 떠올린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건 좀 이상한데 지금(‘봄비’라는 글을 쓰고 나서 이십오 년도 훌쩍 지난 지금)의 나는 그 둘을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이런 일-실제로 있었던 일과 글로 쓴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어안이 벙벙하다.
이를테면 투병 중인 할머니에게 방을 내준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사실 때문에 일종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그랬던 것 같다). 할머니의 무덤 앞에서 펑펑 울었고, 진달래꽃을 둔 것도 사실이다. 비가 왔던 건? 그것도 사실인 것 같은데, 다만 우리가 산에서 내려올 때 갑자기 내린 건 아니었고, 그날 하루 종일 비가 아주 조금씩 오다 말다 했었다(이건 부모님이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신다). 무엇보다 나는 그날 내리던 비가 할머니가 나를 용서하는 의미를 품고 있다고 느끼지는 않았다(그랬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그저 글을 그럴듯하게 만들려고 만들어낸 약간의 속임수에 불과했다(그랬던 것 같다).
그 후로 한동안 할머니가 머물던 방은 비어있었다. 어머니는 그 방을 써도 좋다고 했지만 나는 그 방에 혼자 들어가는 게 무서웠다. 할머니의 귀신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귀신이 된) 할머니가 나를 (당연히) 해치지는 않겠지만, 꾸짖거나 화를 낼 수는 있다고 여겼다. 만약 그날, 선산을 내려오던 날, 할머니가 나를 완전히 용서했다고 믿었다면 그런 식으로 무서움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오후, 나는 그 방에서 까무룩 잠에 들었다가 깨어났다. 오후의 해가 사그라들기 직전이었다. 나는 약간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가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할머니의 귀신을 두려워한 건 멍청한 짓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을 한 게 후회가 되었다. 정말로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봄비’를 썼다. 그 글에서 나는 내가 할머니에게 용서를 빌었고, 곧바로 용서를 받았다고 썼다. 그건 속임수, 거짓말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순수하고 강렬한 바람이기도 했다. 할머니(귀신)를 두려워한 적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죽은 할머니를 완벽하게 사랑했었다면 좋았으리라는 바람. 그리고, 놀랍게도 그 글을 쓰고 나서 어쩌면 그 바람이 조금은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진짜로 있었던 일과 글로 쓴 것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진 그런 방식으로.
(약간의 비약임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어쩌면 이게 바로 소설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일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이 (아주 직접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재구성할 수 있고, 그게 때때로는 쓰는 사람(그리고 운이 좋다면 읽는 사람까지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때때로 어떤 속임수, 기만, 농간은 피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봄비’를 쓰고 나서 무려 이십오 년도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비로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중 1세션 '문학적 첫만남'. (무대 왼쪽부터) 강동호 평론가, 김복희 시인, 김화진 소설가, 손보미 소설가 |
※ ‘문학적 첫만남’ 세션의 발표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