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태양의 제국>은 영국의 SF소설가 J. G. 발라드가 쓴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소설가 자신의 유년기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이다. 그는 1930년 상하이에서 태어나, 청소년기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당시의 상하이는 동북아 최대의 국제도시로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가 극에 달한 광기의 실험실이었다. 19세기 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대영제국의 주도하에 시작된 그 실험은 20세기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일본에 점령됨으로써 끝이 났다.
환상적인 꿈, 혹은 기이한 악몽과도 같던 실험의 최후 장면은 전쟁 포로 수용소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린 소설가는 바로 그 공간에 매혹되었다. 소설 『태양의 제국』은 비참한 수용소 생활에 대한 이야기지만 수용소의 참상에 대한 고발이라기보다는 정반대로 그 끔찍한 공간이 가진 독특한 매력에 대한 찬사에 가깝다. 비윤리적으로 들릴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용감하게 털어놓은 이 소설은 아이러니하게도 컬트 작가였던 발라드를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었다.
J. G. 발라드는 초기부터 비현실적인 공간 혹은 사물들과 그 물리적 대상에 속수무책으로 빨려드는 인간들의 심리를 즐겨 그려왔다. 『물에 잠긴 세계』의 주인공은 지구온난화의 결과로 불타오르는 적도 지역으로 향하는 결정을 하고, 『크래시』의 주인공은 자동차 사고를 통해 성적으로 흥분을 하는 한편, 『하이라이즈』의 인물들은 하이퍼 모던한 초고층 건물에서 미쳐간다. 이런 소설 세계 덕택에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헛소리하는 정신병자라는 평을 얻었지만 소수의 마니아들에게는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런데 그가 그려내는 기묘한 세계의 근저에는 미친 실험실 상하이에서의 유년 시절이 자리 잡고 있다. 세월이 흘러도 그는 그때 그 시절에 대한 대책없는 매혹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듯하다. 아니, 반대로 그는 자신의 패티시를 이용해 모더니티가 이룩한 물질세계를 향한 인간 정신의 비이성적인 패티시를 가감 없이 묘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인간들을 해하거나 파멸시킬 수 있는 대상들이라고 해도, 혹은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 인간들은 수용소와 핵폭탄에, 자신들이 만들어낸 살인병기들에 매혹되고 만다고 그는 말한다.
물론 발라드는 죽었고, 이건 모조리 과거에 대한 이야기다.
2차대전 후 인류는 실험이 실패한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주선을 타고 달까지 날아가봤지만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실패로 끝나버린 실험의 추억 속에서, 끝내 닿지 못한 미래에 대한 가정(假定)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J. G. 발라드가 소설들에서 그려보였던 인상적인 미래의 공간들은 위에 적었다시피 그의 과거 기억에서 온 것이다. 그의 기억 속 상하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실험은 중단되었다. 미래는 실패로 끝났다.
2차대전과 함께 유토피아적 비전은 중단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현재라는 이름의 실패 속에서, 혹은 관광지화된 과거 속에서, 아니면 가상적인 인터넷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더 이상 현실도, 역사도, 미래도 없다. 잘 다듬어진 통계수치와, 안락한 맞춤 정보가 있다. 인플레이션과 함께 폭등하는 자산 그래프와, 오직 나를 위한 수천수만 개의 유튜브 동영상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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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029년의 근미래를 다룬 오시이 마모루의 SF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는 실제 홍콩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홍콩에 직접 가봤을 때 꽤 놀랐다. 초반 주인공이 맨몸으로 공중낙하했던 가파른 산등성이와 그 너머로 신기루처럼 펼쳐진 빽빽한 마천루 도시를 극장 밖에서 맨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화면 속 미래도시의 이미지가 현실에 버젓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물론 그 현실이 97년 홍콩 반환과 함께 끝장났다고 해도). 그러다가 문득 윌리엄 깁슨이 했다던가 하는 유명한 말이 떠올랐다. “미래는 이미 여기에 존재한다.” 솔직히 당연한 얘기였다. 왜냐하면 미래란 과거와 현재를 이어 닿는 곳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난데없는 미래가 마법같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미래는 언제나 과거로부터 오고, 지금 여기의 현실을 관통하여 펼쳐진다. 따라서 우리의 과거가 얼마나 파멸적이었든, 현재가 어찌나 추악하든, 미래란 여전히 우리의 곁에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진실을, 문학은 언제나 넌지시 우리에게 전해준다. 문학은 언제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가느다란 끈을 찾아내고야 만다. 발라드가 과거에 집착했던 것도 시대착오적 상념이 아니라 지금은 모두가 외면하게 된 가능성으로서의 과거를 어떻게든 되살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즉, 발라드의 유산은 여전히 살아있으며, 미래는 존재한다.
요즘의 세계는 나빴던 과거 따위 모두 잊고, 소박하고 행복하게 살자고 속삭이며 사람들을 통계와 핸드폰 화면 속으로 밀어 넣는데 바쁘다. 하지만 실패한 과거라고 해서 고장난 장난감처럼 쓰레기통에 버릴 수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불가능한 일이다. 기억이 모두 지워진 인간이 여전히 인간일까? 역사를 모두 삭제해버린 세계가 가능할까? 내 생각에 우리는 과거를 처단하거나 성형하는 대신에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이 더 나은 미래가 가능하다. 휘황찬란하진 않겠지만 꽤 괜찮은 미래가. 그 미래의 인간들은 실패의 낙인 대신에 근사한 흉터를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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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적 미래’ 세션의 발표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