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를 내려놓지 못할 거라면 옷보다는 근육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는 건 어떨까. 자랑하는 김에 무거운 것도 좀 들어주고……
언젠가 발표한 산문에서 저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앞뒤 맥락까지 전할 수는 없지만, 나는 여전히 옷보다 근육이 유용하다고 믿는다. 근육이 있으면 여러 일이 가능해진다. 집에 돌아오는 애인을 소파에 누워서가 아니라 현관에서 맞이할 수 있다. 전철에서 남은 거리를 재지 않고 일어나 어르신께 자리를 양보할 수 있다. 자기 팔을 들어 올릴 근육이 있어야 텀블러나 기타나 깃발도 들 수 있다. 근육은 자유롭고 정의로운 삶에 필수이며, 근육을 추구하는 시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 물론 근육으로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라도 근육은 필요하다……! 이쯤 되면 전미총기협회(NRA) 회장이 라이플을 치켜들며 할 법한 소리 같은가. 근육이야말로 악의 씨앗이라는 관점에서, 힘에 힘으로 대응하는 그릇된 세계에 동의하지 않기 위해 하나의 식물적 삶을 추구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부좌야말로 단련된 코어 근육을 요구한다. 아예 도망치는 건 어떨까. 중력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한 힘으로 가속하려면 크고 질긴 하체 근육이 필요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게 적응이든 저항이든 해탈이든 탈주든, 근성장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도달했다. 경제 성장이라는 개념의 미심쩍음에 비하면 근성장은 꽤나 믿음직스럽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정신의 근육’이라는 비유를 꺼낼 참이다. 인지든 이해든 공감이든, 모든 정신 작용은 정신의 근육을 토대로 한다. 예컨대, 무엇이 더 윤리적인지 모색하기 위해서는 질문 자체를 발생시키고 유지할 수 있는 근력이 필요하다. 근력 부족으로 성급히 내린 결론은 번번이 기만이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또 다른 상투적 비유에 기댄다면, 균형 잡힌 도서를 충분히 섭취함으로써 정신적 근육을 성장시킬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성장이란 더 적극적이고 의도적인 수행을 요구하기도 한다. 나는 책상에 앉아서 많은 시간을 보내므로 적절한 근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부러 운동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지난 10년간 수영, 크로스핏, 역도 등을 띄엄띄엄 해왔다. 내가 배운 근성장의 원리는 ‘손상-회복’으로 요약할 수 있다. 찢어지고 아무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근육의 양과 질이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때 근육을 찢기 위해 중량, 즉 덤벨이나 바벨 따위의 쇳덩이들이 동원된다. 근육을 아물게 하기 위해서 단백질이나 기타 보조제, 휴식이 필요하다. 다소 도식적이지만 이런 ‘손상-회복’의 원리를 정신적 근육의 성장에 적용한다면, 문학이란 정신에 고의적 과부하를 일으키는 수단일 수 있다. 성장 국면에서 문학의 가능성은 위로가 아니라 손상에 있을지도 모른다. 즉 문학은 바벨이며, 문학 감상은 정신적 쇠질이다.
근육이니 뭐니 잘도 말했으나 내 마음을 ‘찢었던’ 최초의 소설을 돌아보니 아무래도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이다. 일고여덟 살쯤이었고, 집에 있던 갈색 양장의 계몽사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에서 읽었다. 구체적인 줄거리는 희미하고 지금은 수상한 함의가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때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하이디는 알프스를 좋아하는데 왜 도시에 갇혔을까. 그리고 흰 빵. 정체는 모르겠지만 말랑말랑하고 맛있다는 그것. 왜 누군가에게는 흔한 흰 빵이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귀할까. 어린이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내 마음에 상처를 냈다. 아직까지 기억이 나는 걸 보니 ‘하이디는 알프스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았대요’라는 결말에 완전히 만족하진 못했나 보다. 책장을 덮으면서 말끔하게 봉합되지 못한, 그 잉여의 상처가 나를 성장시킨 게 아닐까. 정서적으로든 인지적으로든 나를 손상시킨 작품들로부터 나는 지금의 내가 되지 않았을까. 개운하게 몸을 풀었군. 이런 정도로는 역시 근성장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팔다리가 조금은 후덜거려야 한다. 근성장주의자에게 근육통은 성장의 증표이다. 근성장과 마조히즘의 관계에 대하여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자.
‘손상-회복’이라는 근성장의 비유를 계속 굴리면 몇 가지 질문을 더 할 수 있으며, 그중 일부는 지금까지의 이야기와 모순된다. 손상의 문학과 회복의 문학이 따로 있을까? 좋은 작품이란 그 둘을 동시에 해낼까? 비평이란 손상의 의미를 밝히고 그것을 개인적 층위에서 사회적 층위로 확장시킴으로써 회복을 촉진하는 것일까? 엘리트 운동선수들은 극한의 기능 향상을 위해 고의적으로 신체 수명을 단축시키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작가도 삶의 일부를 포기함으로써 문학성을 높일 수 있을까? 사실 위대한 작품이란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 손상을 남기는 것 아닐까? 애초에 근육은 근육이고 문학은 문학이므로 이런 식의 환원에 큰 의미는 없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비유에 기대본다면, 나는 체육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체육관에 다니다 안면이 쌓여 눈인사를 나누게 된 사람이 몇 있다.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지만, 종종 서로 스쿼트나 프레스 개수를 세준다. 고중량 운동을 수행하다 실패할 것 같으면 어디선가 누군가는 나타나 손을 보탠다. 드물지만 바나나나 에너지바를 주고받는다. 서로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모르지만, 성장을 위해 함께 땀을 흘리고 있다는 감각에서 비롯된 이 과묵한 우정의 세계. 나는 읽고 쓰는 사람들 사이에도 그만큼의 우정은 존재하기를 바란다. 쉽지 않을 때도 있지만 말이다.
※ <2024 젊은작가포럼> ‘문학적 성장’ 세션의 발표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