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글판
오늘은 볕이 좋다 아직 네가 거기 있는 기분

유희경, 「대화」

  • 광화문글판
  • 2024년 겨울호 (통권 94호)
오늘은 볕이 좋다 아직 네가 거기 있는 기분

유희경, 「대화」

 

대화


유희경

네가 두고 간 커피잔을 씻는다
그런데도
아직 네가 여기 있네
책장에 기대서서
책을 꺼내 읽고 있네
그 책은 안 되는데
안 되는 이유가 뭘까
손이 다 젖도록 나는
생각해본다
그 책은 옛일에서 왔고
누가 두고 간 것일 수도 있다
얼마나 옛일일까
두고 간 사람은 누구일까
그렇다 해서
네가 읽으면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젖은 커피잔을 엎어두고
젖은 손을 닦으려 하는데
엎어둔 건 커피잔이 아니었고
곤란하게도
젖은 내 손이었다
커피잔 대신 손을 엎어두었다고
곤란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젖은 내 손은 옛일과 무관하고
네가 꺼내 읽을 것도 아니다
성립하지 않는 변명처럼
오늘은 볕이 좋다 아직
네가 여기 있는 기분
너는 책에 푹 빠져 있고
손은 금방 마를 것이며
네가 두고 간 커피잔은
어디 있을까 나는
체념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광화문글판 선정회의
1991년부터 같은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광화문글판 겨울편 문안이 선정되었다. 7명의 선정위원(곽효환 시인, 김행숙 시인, 요조 수필가, 이승우 소설가, 장재선 문화일보 부국장, 이정화 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 장진모 교보생명 전무)이 접수된 문안(총 518편)을 대상으로 토론과 투표를 진행하였고 이후 교보생명 브랜드통신원의 선호도 조사와 내부 논의를 종합하여 유희경의 시 「대화」를 최종 문안으로 선정하였다. 이번 문안은 연말을 맞이하는 시민들이 곁에 있는 사람을 되돌아보며 볕과 같은 따뜻함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광화문글판 겨울편은 12월 2일부터 광화문과 강남 교보타워 등 전국 7개 사옥에서 볼 수 있다.

 

유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