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그리고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소리를 냅니다. 입이 없는 존재들도 특별한 방식으로 소리를 냅니다.
거품처럼 무성히 끓는 잎들 속에서 새가 소리를 냅니다.
누군가 소리를 듣습니다.
보이지 않는 새는 누군가의 듣기로 인해 존재합니다. 그 새가 깃들어 있는 잎들과 함께, 그 잎들을 매달고 서 있는 나무와 함께.
듣기는 겸손과 타인에 대한 존중, 관심, 애정이 필수로 요구되는 행위 같습니다. ‘믿음은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그리고 ‘우리가 듣기 시작하는 순간 사물들은 스스로 모양을 갖추기 시작할 것’이라는 어떤 책에서 읽은 문장에 동의합니다.
듣기는 믿는다와 동의어가 되기도 합니다(나는 너를 듣는다. = 나는 너를 믿는다).
2차대전 후 우크라이나 수용소에서의 강제노동과 배고픔에 대한 참혹하지만 아름다운 기록인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도 듣기가 시작이었고, 체르노빌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라는 국가적 재난에 속수무책으로 삶을 빼앗긴 이들의 목소리를 담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도 듣기의 귀한 성취물이었습니다. 피에르 부르디외와 22명의 사회학자가 사회적 빈곤과 소외, 박탈감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관찰, 그들의 ‘삶이 왜 그렇게 됐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고자 한 책 『세계의 비참』도 듣기의 성과물이었습니다.
‘시간을 내어주는 것은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공평히 흐르는 시간 속에 삽니다. 시간은 시작도 끝도 없이 흐르지만, 인간에게 허락된 시간은 유한하니, 인간에게 시간은 생명입니다. 듣기는 시간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명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나는 네 앞에 있지만, 네 앞에 없다.
너는 내 앞에 있지만, 내 앞에 없다.
우리는 만남 속에서 자주 그러한 공허감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앞에 있지만, 앞에 없는’ 역설의 상황에 놓이는 것은 우리가 듣기를 상실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는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행복감을 주는 아름다운 행위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가만가만) 어루만지다, (지그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살짝 가) 닿다, (귀 기울여) 듣다…… 듣기는 빠르게 퇴화하고 있는, 달리 표현하자면 잃어버리고 있는 행위 중 하나 같습니다.
‘반백년을 함께 산 부부가 있었답니다. 아내가 돌볼 수 없을 만큼 지병이 악화돼 요양원에 가 있던 남편이 위급한 상태가 되어 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코로나 시절이어서, 남편이 요양원에 있을 때 아내는 거의 찾아가 보지 못했습니다. 중환자실도 마찬가지로 맘껏 찾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밤에 아내는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내는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도착했을 때 응급실 모니터의 심장활동성을 나타내는 선이 수평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끌어안고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습니다. 여보 나 왔어, 나 왔어. 그때 수평으로 흐르던 선이 출렁였습니다.’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남편은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려 기다리고 있었고, 마침내 아내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 순간 그의 심장은 다시 한 번 소생해 뛰었던 것입니다.
듣기는 귀라는 감각 기관뿐 아니라 몸의 모든 감각 기관을 요구하는 행위 같기도 합니다. 인간은 눈으로도, 입으로도, 손으로도 듣습니다. 온몸으로 듣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침묵을 더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다 같이 침묵을 더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들의 침묵, 세월호 참사 피해자의 침묵, 이태원 참사 유가족의 침묵, 타국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외국인 근로자들의 침묵……
듣습니다. 오늘 내가 듣는 것은, 나를 ‘함께’ 존재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