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초대석
멀고 먼 길, 《시인의 마을》에서 《민들레 시집》까지

- 가수 정태춘 선생과의 대화

  • 대산초대석
  • 2024년 겨울호 (통권 94호)
멀고 먼 길, 《시인의 마을》에서 《민들레 시집》까지

- 가수 정태춘 선생과의 대화

 

오민석
시인, 평론가, 단국대학교 영미인문학과 명예교수, 1958년생
시집 『굿모닝, 에브리원』 『그리운 명륜여인숙』『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평론집 『이 황량한 날의 글쓰기』 『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
문학이론 연구서 『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대중문화 연구서 『나는 딴따라다: 송해 평전』

『밥 딜런, 그의 나라에는 누가 사는가』 등

 

정태춘 
가수, 시인, 싱어송라이터, 문화운동가, 사회운동가, 1954년생
앨범 《시인의 마을》(1978년) 《사랑과 人生과 永遠의 詩》(1980년)
《떠나가는 배/우리는》(1984년) 《북한강에서》(1985년)
《정태춘 박은옥 무진 새노래》(1988년) 《아 대한민국》(1991년)
《92년 장마, 종로에서》(1993년) 《정태춘 박은옥-20년 골든》(1995년)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2002년)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2012년)
《사람들 2019》 《정태춘-3집 LP(Remaster2020)》
저서 노래 시집 『누렁송아지』 『정태춘』 『정태춘 2』, 시집 『노독일처老獨一處』 등

 

 

정태춘
사회성 짙은 ‘한국적 포크’를 추구해 온 대한민국의 가수, 시인, 싱어송라이터, 문화운동가, 사회운동가이다. 서정성과 사회성을 모두 아우르는 노랫말을 직접 쓰고 이를 국악적 특색이 녹아 있는 자연스러운 음률에 실어서 작품을 발표하기 때문에 한국의 대표적인 음유시인으로 불린다. 음악 활동에 그치지 않고 각종 문화운동과 사회운동에 열성적으로 헌신하는 운동가이기도 하다. 1990년대 초에 사전심의 폐지운동을 전개하여 1996년 헌법재판소의 ‘가요 사전심의 위헌 결정’을 이끌어냈다.

 

 

오민석(이하 오) 선생님께서 음반 《시인의 마을》로 데뷔한 때가 1978년도로 기억하는데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선생님의 음악을 특징짓는 세 가지 코드를 굳이 말하라면, 저는 노래, 문학, 정치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정치란 좁은 의미가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사회와 역사적 층위에서의 실천적 개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만, 선생님의 음악은 이 세 가지 꼭짓점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다양한 삼각형들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 보다 구체적으로는 선생님의 음악에서, 문학과 정치가 갖는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정태춘(이하 정)  제가 어려서부터 문학 친화적이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시를 쓰거나 하는 일이 그렇게 낯설거나 힘에 버겁다고 느끼지는 않았으니까요. 문학 중에서도 특히 시를 좋아했고, 현대 시인들의 시집을 나름대로 많이 읽었습니다. 그 끝을 알 수는 없었지만 시를 써서 막연히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종의 문학적 욕심 같은 것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단어들을 골라 배치해서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그런 과정들, 어떤 개념어를 선택하고, 어미를 어떻게 활용하며, 어떤 형용사나 부사를 끌어들여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까, 이런 궁리와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습니다.

오 선생께서 말하는 그런 넓은 의미의 정치와 관련해서 돌이켜보면, 가수로서 제가 초기엔 마치 정치로부터 초연한 것처럼 서정적인 것에 몰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지요. 그것은 초연이 아니라 현실, 즉 삶의 양식, 시스템과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 등을 제가 해석할 줄 몰랐던 데에서 오는 오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말하자면 그런 ‘정치적인’ 것들이 어떻게 내 삶과 연결되고 또 내 삶에 개입되는지 그 연결 고리 같은 것들을 제대로 들여다볼 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 성찰을 하기 시작하면서 제 내면에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고, 사실상 삶의 모든 것이 넓은 의미의 정치와 연결되어 있고, 때로는 정치 자체이며, 그런 것들이 어떻게 우리의 삶과 상상력을 컨트롤하는지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제 음악의 방향도 달라지기 시작했고, 그런 깨우침은 제 인생과 음악의 역사에서 매우 의미 깊은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는 지금도 여전히 정신적 유아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선생님을 흔히 ‘음유시인’이라고들 부르는데요, 선생님 노래의 가사가 갖는 시적 정취 혹은 문학성 넘치는 분위기 같은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시인의 마을>, <서해에서>, <촛불> 등 초창기 노래들에서부터 이미 강하게 부각되어 온 것이지요. 가수로서 노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혹시 문학도로서 시인이나 작가를 꿈꾸고 습작 활동을 오래 하신 적이 있었는지요.

 

 정  본격적으로 시인이나 작가가 되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제가 시를 써서 시집들을 낸 것은 젊은 시절이 아니라 먼 훗날의 이야기였지요. 젊은 시절에 문학도로서 시인이 되기 위해 습작에 몰두하고 그런 적은 없습니다만, 제게는 문학에 눈이 확 트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만남이 있었지요. 제가 초등학교 때 셋째 형님께서 교사였는데, 저에게 국어 과목 교사용 지도서를 보여주셨어요. 거기에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시들이 꽤 많이 나오더군요. 그때 그 지도서에 실린 시들을 보고 저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고, 마치 문학이라는 아름다운 펀치에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 이후 시인이 되겠다는 결단까지는 아니지만 늘 문학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냈지요. 고등학교 때 성에가 낀 버스 유리창에 시조를 쓰기도 했고. 운율이 있는 정형시들을 특히 좋아했는데, 돌이켜 보면 음악에 가까운 시들을 더 좋아했던 것이지요. 그런데도 백일장 같은 글쓰기 대회에 나가 입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웃음).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래를 만들고 그것에 가사를 붙일 때, 내가 원하는 풍경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음악과 문장을 어떻게 연결해서 상황을 표현하고 스토리텔링을 해나갈 것인가, 어떤 문체나 뉘앙스가 더 좋은가, 이런 것을 선택하고 배열해 나가는 모든 과정이 신비롭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80~1990년대에 와서 리얼리즘 계열의 문학작품을 많이 만나면서, 제 가사도 삶의 현장과 밀착된 표현이 되게 밀어붙여 보자 하는 생각도 들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들의 죽음> 같은 작품이 나온 것이죠. 어린 남매들을 남겨놓고 밥벌이를 나갈 수밖에 없었던 부부가 자물쇠로 밖에서 방문을 잠가 놓은 바람에 안에서 아이들이 사고를 당한 사건을 노래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사들은 일반적인 대중음악의 경향에서 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고, 신선하지만 시장에서 철저히 거부당할 수밖에 없던 것들이었지요. 그렇지만 저는 당시에 대중음악이 할 수 있는 더 큰 목표에 이르고 있다는, 일종의 성취감 같은 것들을 느꼈었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선생님의 노래들이 처음부터 시와―무의식적인 형태이지만―정치의 일정한 결합 위에서 출발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시인의 마을> 같은 데뷔작의 경우에 전체적으로는 매우 아름답고 서정적인 톤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대지 위를 달리는 사나운 말”, “벗들의 말발굽 소리”, “저 높은 곳에 우뚝 걸린 깃발” 같은 왠지 사회적이고도 정치적인 함축을 담고 있는 것 같은 가사들이 어떤 설명도 없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들어가 있거든요?

 

 정  아, 제가 보기에는 그 당시의 작품들에 있는 그런 표현들은 어떤 세련된 정치의식에서 나왔다기보다는, 뭐라 할까요, 일종의 아웃사이더, 주변자적인 의식, 중심권과의 불가피한 거리감, 불화, 이런 것들이 저도 모르게 초기에서부터 드러난 것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정치의식으로서는 너무 협애한 것이었고, 다만 넒은 의미에서 사회의식이라고 볼 수는 있겠지요.

 

격동의 80~90년대를 지나가던 어느 시점엔가 선생님께선 문득 이제 노래를 그만둬야겠다는 결심을 하셨고, 실제로 상당히 오랜 기간 음악에서 손을 떼신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가수가 노래를 그만둔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인데요, 그것이 대충 언제쯤이었고 왜 그런 ―팬들로서는― ‘끔찍한’ 생각을 하시게 되었나요?

 

지난 10월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만난 정태춘 선생(왼쪽)과 오민석 문학평론가

 

 정  노래 자체를 그만두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노래는 부르되 작사 작곡을 더 이상 안 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대중이 원했으면 계속 노래를 만들었을 거예요. 따지고 보면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나를 버린 거죠. 운동진영이 무너지고, 자본주의는 더욱 강화되고, 한때 민주주의, 민족주의, 제3세계,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이런 이름들을 단 변혁의 도도한 흐름이 있었고 그 안에서 연대감을 느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것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완전히 홀로 된 느낌 같은 것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스템에 투항하며 세속적 욕망에 어울리는 자리들을 차지하며 떠나갔고, 일부는 이제 거대 담을 버리고 미시 담론으로 돌아가야 하며 사회 변혁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들을 했는데, 다들 각기 자기 노선들로 빠져나갈 때 나는 그 어디에도 합류하거나 함께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볼 때 세상은 국가자본주의에서 세계자본주의로, 군부독재에서 자본독재로 넘어가면서 좋아지기는커녕 더 큰 문제들이 양산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여기저기로 다 빠져나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계속 더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제 말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게다가 그 이후에 낸 세 앨범, 《92년 장마, 종로에서》(1993), 《정동진/건너간다》(1998),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2002)는 대중의 호응을 전혀 끌어내지 못했고 완전히 실패했지요. 음반은 제작비 자체가 워낙 많이 드는 데다가 한번 만들면 적어도 1년여의 세월을 꼬박 매달려야 하므로, 시장에서 호응을 얻지 못하면 그 자체 그대로 심각한 문제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 상태를 계속 견디며 연속해서 세 장의 음반을 낸다는 것도 알고 보면 대단한 일이었어요.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의 실패 이후, 즉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이제 음반을 그만 내자고 생각했지요. 새로운 음반을 내면서 내가 나름 더 많은 음악적 성취를 한다고 생각하더라도 사람들이 내 음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내가 음악을 접어야지, 나도 더 할 필요가 없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서울에 있던 작업실을 지방 어느 강변의 펜션으로 옮겼고 저는 저대로 칩거의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때야말로 그 아름다운 강변에서 남은 생을 ‘소진’하자, 그런 생각을 했고, 그게 어찌 보면 큰 ‘복’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나이에 어울리는 어떤 호젓함이 선물처럼 왔으니까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 무렵 제 고향 평택에서 미군 기지 문제로 싸움이 있어났고, 여러모로 몰라라 할 수도 없어서 나름 문화 예술인들과 연합해 한 3년을 싸웠습니다. 결국은 제가 오랏줄까지 차고 끌려가고, 결국 그 싸움에서도 패배하고 말았지요. 그때부터 다시 길고 긴 칩거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우연히 사진과 가죽공예, 그리고 붓글의 세계를 만나게 되었고, 노래를 안 만들어도 다른 유형의 창작품을 만드니까 그런대로 버틸 만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다시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나요?

 

 정  사진과 가죽공예를 취미 삼아 하고 붓글에 빠져 있을 무렵 저는 노래가 아니라 시를 쓰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쓴 시들이 두 권의 시집으로 출판되었지요. 그 시들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노래에 담지 못한 울분과 좌절과 절망과 슬픔이 그 시들에 그대로 들어가 있었지요.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지내던 2012년에 느닷없이 앨범을 하나 내게 되었어요. 사실은, 오랫동안 박은옥 씨가 자기를 위한 노래를 만들어줄 수는 없느냐고 창작을 다그쳤는데 내가 ‘내 속내를 다시 노래로 드러내기 싫다’고 말을 안 들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곡을 쓰게 됐어요. 2011년의 단 두어 달…… 그것들이 새 앨범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2012)가 됐지요. 그런데 제작 과정에서 이 음반이 애초의 취지대로 박은옥 씨를 위한 음반으로 가질 않고 내 노래가 더욱 많이 나오는 음반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녹음하는 과정에서 박은옥 씨가 ‘이건 당신이 잘 맞으니 당신이 부르세요’ 하고 자꾸 양보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애초에 박은옥 씨의 음반을 만들려던 계획은 수포가 되고 제 노래가 더 많이 실린 ‘정태춘·박은옥 제11집’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가령 이 음반의 <눈먼 사내의 화원> 같은 노래는 나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찬 노래이고, 애초에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제 속내를 들킨 노래였지요.

 

제 생각엔 선생님께서 깊이 좌절하셔서 노래를 만들지 않겠다고 하시니까 선생님이 노래를 만드시도록 박은옥 선생님께서 구상하셨던 일종의 전략(?) 같은데요?

 

 정  아, 그런가요(웃음).

 

이제 조금 세부적인 질문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각자 따로 활동하시던 정태춘, 박은옥 선생님께서 제4집 《떠나가는 배/우리는)》(1984)부터 지금까지 줄곧 하나의 팀으로 활동하고 계시는데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문 현상인 것 같습니다. 부부 가수가 함께 음반을 내고 함께 공연한다는 것이 당연한 일은 아니니까요. 게다가 각기 따로 활동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최고의 기량을 가진 두 분께서 말입니다. 어떤 계기로 정태춘 따로 박은옥 따로가 아니라 한 덩어리인 ‘정태춘·박은옥’이 되셨나요?

 

 정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우리는 각기 솔로 가수로서 공동 앨범을 발표해왔지만, 듀엣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둘이 함께 낸 공동 앨범 중에서 듀엣곡은 <사랑하는 이에게> 한 곡밖에 없습니다. <봉숭아>나 <윙윙윙>에서도 제가 약간의 화음을 넣었을 뿐이지요. 그리고 박은옥 씨는 지금도 공동 앨범에 자신의 곡이 서너 곡 들어가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해합니다. 노래 욕심이 많은 가수들에 비하면 박은옥 씨는 노래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편입니다. 행사에 섭외가 들어와도 대부분 둘이 함께 출연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저 혼자 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공연장에서도 박은옥 씨가 관객들께 가끔 그렇게 말하지요. “우리는 듀엣이 아닙니다. 함께 노래하고 공동 음반을 내는 솔로 가수들입니다”라고 말이지요.

 

대중 가수로서 선생님의 사회 참여적인 태도들이 다소 예외적인 현상이라서인지, 일부에선 선생님을 세칭 ‘저항 가수’로만 기억해서 그것 때문에 선생님을 더 좋아하거나 혹은 더 멀리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선생님의 노래들은 정치적인 주제만이 아니라 사랑, 추억, 실존적 고뇌, 일상, 도시 풍경, 자연의 아름다움 등 다양한 소재들을 건드리고 있고 다른 가수들과 비교해도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습니다. 물론 하나하나 다 귀한 작품들이고 그래서 다 소중하겠지만, 이 다양한 삶의 영역을 건드리는 노래 중에서 선생님께서 개인적으로 특히 더 깊은 애정을 가지고 계신 노래 혹은 노래의 방향 같은 것이 있으신가요? 가령 <5·18> 같은 노래와 <정동진 3> 같은 노래들, 그리고 그 중간 어디쯤 있을 <92년 장마, 종로에서> 같은 작품들 사이에서 선생님은 대체로 어느 길로 더 가시고 계시고 어느 길이 가기에 더 좋으십니까?

 

 정  내가 좋아하는 제 노래는 <저들에 불을 놓아> 같은 노래예요. 물론 <정동진>, <북한강에서> 이런 것들도 좋아합니다만, 저는 어쨌든 ‘좋은 노래’라는 것들은 섬세한 관찰에 토대할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부터 세계, 나아가 문명 전체를 내다보는 큰 상상력을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음반을 낼 때마다 아슬아슬합니다. 한번 실패하면 다시 일어나기가 굉장히 힘들거든요. 그래서 음반을 낼 때마다 이게 마지막 음반이라 생각하고 달려듭니다.

 

지난 9월 28일(2024) 전북대 삼성문화회관에서 있었던 콘서트에서 선생님께서는 이미 녹음이 끝난 상태이고 내년(2025)에 출시될 새 앨범의 노래 중 네 곡을 관객들에게 처음으로 선보이셨습니다. 그 큰 공연장이 만석이었는데요, 그것이 현 단계 정태춘·박은옥의 강력한 존재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새 노래들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문학적 성취가 돋보였는데요, 선생님 노래들이 이렇게 갈수록 문학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정  지금까지 내가 한 가사 작업은 처음부터 문학이었어요. 다만 지금까지는 그것을 정면에 과감하게 내세우지 못했거나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번 새 음반에서는 그런 작업을 더욱 적극적으로 해본 것이지요.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언제고 제대로 해야 하니까요. 지금까지 세상이 변하고 대중의 성향도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제 무대를 찾아주시는 관객분들께는 정말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분들을 생각하면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수 혼자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헌신적으로 도와주시는 스태프 등 관계자들의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다들 두루두루 고맙습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년에 나올 새 음반 《민들레 시집》도 많은 사랑을 받기를 기원합니다. 내내 건강하셔서 선생님을 사랑하는 관객들과 오래 함께 해주세요.

 

 정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민석
시인, 평론가, 단국대학교 영미인문학과 명예교수, 1958년생
시집 『굿모닝, 에브리원』 『그리운 명륜여인숙』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평론집 『이 황량한 날의 글쓰기』 『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
문학이론 연구서 『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대중문화 연구서 『나는 딴따라다: 송해 평전』
『밥 딜런, 그의 나라에는 누가 사는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