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트루드 스타인 소설 『세 인생』
- 거트루드 스타인 소설 『세 인생』
![]() |
미국의 여성작가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874.2~ 1946.7)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독일계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여성을 차별하지 않는 진보적 가풍 아래 성장했다. 20세기 초에는 파리로 이주하여 경제적 여유와 예술적 재능을 바탕으로 미술작품을 모으면서 자신의 살롱을 연다. 이 살롱은 피카소, 헤밍웨이와 같은 유수의 화가, 문인들과 교유(交遊)하는 공간이었으며 그녀는 마치 그들의 대모(代母)와 같았다. 이런 환경이 그녀의 문학적 터전이었다.
1909년 스타인은 미국 문학사에서 하나의 특별한 걸작으로 평가받게 되는 『세 인생(Three Lives)』을 자비(自費) 발간한다. 이 작품은 주제는 물론 체제와 표현형식도 실험적이다. 장편소설(novel) 분량이면서도 전통적인 장편과 다르게 두 개의 독립적인 단편(short story)과 하나의 중편(novella)으로 구성되는 이 작품에서 첫 소설 「착한 애나(The Good Anna)」와 마지막 소설 「온순한 리나(The Gentle Lena)」는 단편이고, 중간의 「멜런사(Melanctha)」는 중편이다. 표현 형식에 있어서는 「착한 애나」와 「멜런사」의 소설 첫머리에 스토리 끝 무렵의 중요한 사건을 먼저 배치한 다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스토리를 전개한 후 다시 처음의 사건으로 회귀하는 방식을 선보였다. 또 같거나 유사한 표현을 지나칠 정도로 여러 번 반복했다. 「착한 애나」와 「온순한 리나」는 사건 중심의 서사(敍事)가 비교적 단순하나, 「멜런사」에서는 사건 전개보다는 대화를 통한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끈질기게 추적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작가는, 세 소설보다 먼저, 작품 맨 처음에 쥘 라포르그의 “그러므로 나는 불행하다, 그리고 그건 내 잘못도 인생의 잘못도 아니다”라는 시구(詩句)를 내건다. 이 구절이 암시하듯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불행’ 주변에서 서성거린다. 애나와 리나는 독일 출신으로 스무 살 안팎 처녀일 때 미국으로 이주해 온 하녀 신분이고, 「멜런사」 주인공 멜런사는 이주민도 하녀도 아니지만, 가부장제 아래 여성이자 유색인으로 역시 가난한 비주류다. 그러나 세 편의 소설은 장소적 배경만 공유할 뿐 등장인물이나 사건 전개에서 아무 연관성이 없다. 시간적 배경은 모두 19세기 말 혹은 20세기 초로 추정되지만, 세 편의 등장인물이 같은 시점에 살았다는 암시는 없다. 그만큼 그들에게 장소와 시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한 사람의 화가가 그려 나란히 걸어놓은 세 여자의 초상화처럼 운명적으로 ‘불행의 울타리’에 갇혀 있다.
미국 사회의 확실한 백인 주류층인 거트루드 스타인이, 자신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와 극단적 대척점에 있는 이주민, 여성, 유색인을 주인공으로 소환하여 그들의 삶을 그리는 것은 과감한 문학적 도전이었다. 그녀는 여성이라는 점 말고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사회적 소수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주류사회에서 배제된 그들의 가난과 노동, 죽음을 공감과 연민, 그리고 소명감과 책임감의 시선으로 응시한다. 이 시선은 그녀의 성 정체성과 (이후 표면화되는) 동성애 정체성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른다.
애나와 리나의 마지막 순간을 곁에서 지켜주는 사람은 그들 못지않게 고단한 인생을 살면서도 늘 희망과 긍정의 마음을 놓지 않는 여인들이다. 애나의 임종을 유일하게 지킨 드레턴 부인과 「온순한 리나」에서 시종일관 따뜻한 마음으로 리나와 소통한 독일인 여자 요리사야말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다. 이런 모습은 슬프기 짝이 없지만, 사회적 약자가 또 다른 사회적 약자와 외롭게 소통하고 서로 보듬어야 하는 이 세상의 세태는 지금 21세기가 되어도 별로 달라지지 않고 있다. 세상의 수많은 어려운 사람들이 힘든 삶을 버텨내는 것은 아직도 이처럼 익명의 착한 사람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그나마 멜런사 주변에는 그런 사람조차 없었다).
※ 『세 인생』은 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필자의 번역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 190번으로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