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역 김혜순 시집 『죽음의 자서전』
- 독역 김혜순 시집 『죽음의 자서전』
![]() |
김혜순 시인 이름을 독일에서 자주 듣게 되는 시점이 있었다. 2022년쯤이었는데, 베를린의 시인 친구들이 입을 모아 『죽음의 자서전』이 얼마나 멋진 책인지 이야기하기 시작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전까지는 이상과 고은이 한국 시를 대표하는 ‘오래된’ 이름들이었다면, 당시 최돈미 시인의 탁월한 영어 번역이 베를린에서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며 지형이 바뀌고 있었다. 나는 당시에 보훔루르대학교 한국학과에서 한국 시 번역 수업도 맡고 있었는데, 한국 문화 중 어떤 것이 가장 ‘힙한지’ 제일 잘 아는 한국학과 학생들도 이미 김혜순 시인의 시를 읽고 있었다. 그들이 향유하는 한국 문화, 즉 인디밴드, 아이돌, 드라마와 같은 현상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김혜순 시인의 글도 읽히고 있었다. 한국 문학에 전에 없던 기회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마침 『죽음의 자서전』의 공역자를 찾고 있던 울리아나 볼프에게 연락했다. 그는 독일의 젊은 시인 중에서 가장 세련된 글을 쓰기로 유명한 사람인데, 나는 예전에 시 창작 수업을 들은 인연으로 그와 이어져 있었다. 그렇게 『죽음의 자서전』 공역이 시작되었다.
개인적으로 공역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업 형태이다. 두 개의 언어라는 최대의 세계가 지금 여기, 두 사람의 역자라는 최소 단위에서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이루어진 공역은 역자 개개인의 언어를 포함하는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제3의 언어가 태어나는 과정이다. 번역은 내가 초역을 만들고 울리아나가 영역을 참고해서 코멘트하는 순서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대체로 오랜 회의를 거치면서 제3의 표현·리듬·이미지가 만들어졌다. 물론 약간의 분업이 있기는 했다. 내가 『죽음의 자서전』이라는 텍스트에 층층이 적재된 상징과 함의를 읽어내는 데 집중하는 편이었다면, 울리아나는 천재적인 음악 감독에 가까웠다. ‘이 행에는 a가 많고 o가 없어서 다른 단어를 쓰면 좋겠다’든지, ‘강세 음절이 한 개 부족한 것 같다’처럼 표현되는 울리아나의 순수 음악적 접근은 신선하고 새로웠다. 반대로 울리아나에게 『죽음의 자서전』을 관통하는 문화적·신화적 배경, 그리고 낯선 한국어의 문법적 구조는 계속해서 놀라운 인식이었다.
번역이 특히 어려웠던 지점은 의성어·의태어의 경우, 그리고 주어를 도저히 특정할 수 없는 문장들의 경우로 나눠볼 수 있다. ‘하늘하늘, 흔들흔들, 컹컹, 끈적끈적’과 같은 말을 번역할 때는 손짓발짓과 문자로 담을 수 없는 온갖 효과음을 총동원하며 알맞은 ‘사운드’를 찾아 헤매면서 폭소하기도 하고, 독일어에 의성어·의태어가 너무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한탄하기도 했다. 법률·행정·철학 용어는 그렇게 정확하면서, 정작 ‘하늘하늘’은 없다니. 어울리는 독일어 단어가 아예 없는 경우에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예컨대 이번 번역에서 ‘흔들흔들’을 ‘슈빙슈방(schwing, schwang)’으로 옮겨본 것은 한국어의 리듬이 독일어에서 새로운 혼종을 만들어낸 즐거운 결과물이다. 슈빙슈방은 흔들흔들과 너무도 다른 발음을 가졌지만, 어떤 면에서는 딱 맞아떨어지는 말이었다.
주어를 특정할 수 없는 문장은 여러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었는데, 이 시집 전체의 주어가 ‘죽음’이라는 김혜순 시인의 시학적 자세를 고려하면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독일어는 특히 주어를 특정하지 않고서는 문장 구성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주체의 자리가 죽음으로 텅 비며 낯선 ‘혼들’, 낯선 ‘죽음’들의 목소리를 불러들이는 『죽음의 자서전』의 49편의 시는 몇 인칭으로 보아야 할까. 너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고 그일 수도 있고 우리 모두일 수도 있는 이 자리를 어떻게 옮길 수 있을까. 베를린에서, 그리고 광주에서 나눈 대담에서 김혜순 시인은 이 질문에 『죽음의 자서전』의 주어는 ‘6인칭이나 7인칭’이라고 답해주었다. 그 답변을 처음 들었을 때는 당혹스러웠지만, 또 시원하기도 했다. 시와 번역에 대해 나름 고민한 연구자로서, 그 순간 하나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 느낌이었다. 번역은 자국어의 경계를 확장한다고 벤야민이 이미 말한 바 있다. 이렇게 위대한 작품과 뛰어난 공역자를 만나, 그 말의 의미를 되돌아볼 기회를 얻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독일어 독자들도 낯선 언어를 맛보는 즐거움을 느끼길 기원한다.
※ 독역 『죽음의 자서전』은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을 받아 필자와 울리아나 볼프의 공역으로 독일 피셔(S.Fischer Verlag)출판사에서 2025년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