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서리뷰
번역자의 책상 위

- 일역 장석 시선집 『너는 사람의 길을 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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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봄호 (통권 95호)
번역자의 책상 위

- 일역 장석 시선집 『너는 사람의 길을 가지 말아라』

 

장석 시인이 오랜 침묵을 거쳐 지난 4년간 출판한 네 권 시집에서 61편을 골라서 묶은 것이 이 일본어 번역 시집이다. 역자는 도다 이쿠코[戶田郁子] 씨. 약력에 의하면 한국에서 오래 거주하면서 한국과 관련된 책을 일본에서 출판한 작가·번역가·편집자다. 역자 후기에서 시집의 번역은 이번이 처음이며, 장석 시인과 오래전부터 개인적인 교분을 쌓아온 관계라고 밝혔다.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현재 한국 시단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장석 시인의 시세계를 일본 독자에게 알리고자 두툼한 번역시집을 출판한 역자와 출판사, 지원기관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격조 있는 언어로 자연과 교감하며 삶의 본질에 다가서고자 하는 장석의 시 세계는 본디 정치적 메시지와 거리를 두는 일본 현대시의 풍토와 접점이 많다. 그런 맥락에서 김지하·신경림 시인과는 결이 다른 한국 현대시가 일본어로 소개되는 의미는 각별하다. 이는 실제로 일본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인 요츠모토 야스히로[四元康祐]가 번역 시집의 말미에 쓴 해설을 통해서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그의 해설에는 ‘자연’, ‘형이상학’, ‘우주’, ‘인류’ 같은 단어가 주제어로 등장하거니와, 이는 장석의 시가 내재하는 보편성의 발성이 번역을 통해서도 온전히 전달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장석 시인과 거의 동년배인 요츠모토가 이 번역 시집 곳곳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어휘를 접하고 나서 일본 현대시에서 ‘사랑’이 거의 사어가 되어가고 있는 ‘이상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토로한 것도 무척 흥미롭다. 덧붙이자면 그는 세계 시 축제 행사에서 만난 24개국 출신 시인의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해설하기도 했다.

성실하고 정직한 번역 시집이다. 200쪽이 넘는 분량에다, 장석 시인의 네 권의 시집에서 상당히 많은 편수의 시를 골라내어 번역했다. 거기에다 일본 국내외에 걸쳐 왕성하게 활동하며 일본 현대시의 새로운 조류를 개척하고 있는 요츠모토 야스히로의 진지한 해설까지 덧붙였다. 실제 번역에 있어서도 의역 또는 현지화(자국화) 번역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원시를 최대한 존중하려는 태도를 관철한 것은 인상적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번역하는 것이야말로 번역자가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실제 번역의 현장에서 번역자로서 윤리의식이나 열정만으로 좋은 번역이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시와 같은 짧은 운문 형식은 단 하나의 단어만으로도 텍스트의 치명적인 훼손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언어의 운용 능력이나 문학적 교양 같은 요소도 필요하다.

이 번역 시집은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미흡한 면이 다소 눈에 들어왔다. 전반적으로 번역어의 선택이 다소 거칠어서 독자의 미독(味讀)을 방해할 수도 있겠다고 여겨졌다. 한국어가 일본어로 변형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불가피한 간극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었다.

원시의 의미를 수렴해서 언어라고 하는 불완전한 그릇에 옮겨 담는 일은 고통스럽고 지난한 작업이다. 그럼에도 번역자들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열정과 지혜로 난관을 헤쳐 나갔다. 대부분 나라에서 번역 시집은 자국어 시집보다 더 안 읽힌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기적’과도 같이 한국 근현대시의 존재감을 일본 독자들에게 각인시켜 준 두 권의 역시집이 있다. 『조선시집』(김소운 역, 1941)과 『한국현대시선』(이바라기 노리코 역, 1990)이 그것이거니와, 현재까지도 판을 바꿔가며 서점에서 팔리고 있다. 적어도 이 두 권의 번역 시집의 존재를 알고 있거나 읽어본 일본인 문학 독자는 상당수 존재한다. 그럼 이 두 권의 번역 시집이 ‘성공’한 요인은 무엇일까. 이 시집들이 권위나 명성의 후광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끈 측면은 있다. 전자는 전통과 권위의 상징인 이와나미[岩波]문고 세계문학시리즈의 한 권이고, 후자는 일본의 현대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십만 부 단위의 판매부수를 기록한 ‘대표 시인’의 첫 번역 시집이다. 그러나 이런 문학 외적인 사항은 부수적 요인에 지나지 않는다.

핵심은 이 두 시집의 번역자들이 능수능란하게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의 장인이었고, 아울러 어떤 시가 당대의 일본인들에게 ‘먹히는지’, 어떻게 번역하면 아름답고 시가다운 일본어 시가 탄생하는지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는 데에 있다. 김소운은 김소월 등의 근대시를 일본의 전통 운율에 맞춰 꿰맨 자국 하나 없이 완전무결한 일본어 시로 환골탈태시켰다. 그는 이 과정에서 쉽게 일본어로 변환되지 않는 ‘이질적’ 요소들을 소거해 버리거나 일본어 시의 전통에 익숙한 표현으로 변조했다. 아울러 한국의 현대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시의 몇 행을 생략하거나 역자 자신의 표현을 원시에 덧붙이는 번역 양태를 보인 것은 이바라기 노리코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시 번역에서 드러나는 일종의 ‘원전 길들이기’는 효과적인 전달을 목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여겨지지만, 자주 논란거리가 되는 ‘번역자의 월권’에 해당하는 사례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상징 시인의 시를 일본 전통 시가의 고풍스러운 어휘와 운율 속에 녹여낸 우에다 빈[上田敏]의 『해조음(海潮音)』(1905)은 일본에서 ‘명역(名譯)’으로 추앙된다. 이후 외국 시가에 대한 과감한 현지화 번역은 일본에서 100년 이상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비록 그러한 번역 방식이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한들 결과적으로는 외국어 시가의 번역이 번역자의 공적이자 일본어의 영광으로 회수된다는 문제점은 해소되지 않는다.

외국의 문학작품을 읽는 대다수 독자는 자신의 모국어를 통해 이국의 시인, 작가들과 직결되는 경험을 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이 읽고 있는 것이 번역자의 손을 거쳐 탄생한 출판물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다지 자각적이지 않다. 따라서 번역자의 전달 방식이나 번역 역량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번역자의 책상 위가 궁금한 사람은 운 좋게 생존해 있는 원작자이거나 일부 연구자에 한정된다. 어떤 방식으로 옮겨졌는지는 원작과 번역본이 함께 놓여있는 번역의 현장을 들여다봐야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상 위에서 능숙한 번역도, 우직한 번역도 산출되고, 선한 의지의 번역도 정치적 의도를 담은 번역도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언어들이 존재하는 한 번역들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 번역의 혜택을 향유하면서도 가끔은 번역자의 책상 위를 궁금해하는 것도 지혜로운 독서로 이어지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 일역 『너는 사람의 길을 가지 말아라』는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을 받아 도다 이쿠코의 번역으로 일본 쿠온에서 2024년 출간되었다.

윤상인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전 교수, 1955년생
저서 『나쓰메 소세키와 세기말』 『문학과 근대와 일본』, 역서 『그후』 『봄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