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학의 순간들
그 빛에 기대어

  • 우리 문학의 순간들
  • 2025년 봄호 (통권 95호)
그 빛에 기대어

‘작가들’로부터 오늘도 집회 참여 안내 메시지가 도착했다. 응원봉 들고 만나요, 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촛불’에서 ‘응원봉’으로. ‘빛의 혁명’의 한가운데에서 시민, 작가의 역할에 관해 돌아보기도 하고 또 내다보기도 하는 요즘이다. 돌아보면 함께한 이들이, 내다보면 함께할 사람들이 있음이 새삼 다행스럽기도 하고 소중하기도 하다. 글은 혼자 쓰지만, 작가는 혼자가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의 윤곽이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다. 어디 작가뿐인가. 작가 대신 ‘사람’을, ‘생물’을 대입해도 그렇다. 또 어디 숨 붙은 것만이 그런가. 죽은 자는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산 자는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 작가의 물음은 생사를 뛰어넘어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로 이어진 만물을, 공동을, 그 일원이 됨이―그걸 깨치는 것이―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우리 문학의 순간들’과 ‘두리반 낭독회에서 출발한 세월호 낭독회’라는 문장이 적힌 청탁서를 보자마자 즉각적으로 ‘공동체의 지속’을 떠올렸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처음으로 문학공동체의 한 사람임을 느꼈던 바(6.9 작가선언)에 관해선 이미 다른 지면을 통해 한 번 정리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 글에서 나는 그 경험이 나를 ‘다른 작가’로 만들었다고 적었다. 그건 그전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좀 더 애쓰기 시작했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이 글은 그때의 기록을 조금 다르게 ‘되풀이’하며 쓰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때 그 공동체는 어떤 실체를 갖추지 않은 채 감각으로, 감정으로, 분위기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내가, 우리가 그 ‘이어짐’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작가와 시민이 그 ‘숨 쉬는 공동체’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 의미에 힘입어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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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9일, 이명박 정부의 국정 기조 전환을 요구하며 시국선언을 했던 188명의 문학인은 선언 이후 한 온라인 카페를 베이스캠프로 삼아 ‘느슨한 공동체’를 꾸리고, 여러 현장에 각자 그리

고 함께 연대했다. 같은 해 겨울 등단한 나는 2010년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됐고, 4대강 사업 반대 투쟁부터 일꾼을 맡았다. 등단은 했으나 원고 청탁은 전혀 없던 불안한 시절이었지만 그 연대 활동 덕분에 여러 작가와 우정을 쌓았고, 그 인연으로 몇몇과 ‘1월 11일’이라는 이름의 동인을 결성했다.

무엇을 할지는 모르겠는데 무언가 해보자던 그 작은 집합이 투기 건설 자본에 의해 강제 철거된 홍대 칼국숫집 ‘두리반’에서 ‘낭독회’를 시작한 건 2010년 겨울이었다. “문학적으로 보이지 않는 공간을 문학으로 같이 채워 봐요”라는 진은영 시인의 진심 어린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지금처럼 낭독회가 활발하지 않던 때. 집기도 빼앗기고 전기도 끊긴 폐허와도 같은 공간에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상상하며 우리는 그 낭독회를 ‘불킨낭독회’라 부르기로 했다(얼굴을 붉히고 불을 켜는 낭독). 그 소리,말의 이어짐으로부터 밝은 꿈을 꾸기로 의기투합한 것이었다.‘홍대 앞 작은 섬, 두리반을 아시나요?’라는 물음과 함께 낭독회 포스터에 “시가 흐를 때, 우리 마음속에 일제히 켜지는 한 줌의 불빛”이라는 문구를 조그맣게 넣은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목소리로 불 켜기.

이후 불킨낭독회는 많은 문화 예술인과 시민들의 참여에 힘입어 수개월간 계속됐다. 매월 낭독회에는 천사들의 도시, 집, 태양, 밥, 노래, 친구 같은 말들이 부제로 붙여졌는데 그 자체가 우리의 주장이기도 했다. 문학은 어떻게 천사가, 집이, 태양이, 밥이, 노래가 되고 친구가 되는가. 어째서 문학은 그 모든 것이 돼야 하는가. 자연스레 불킨낭독회는 그런 물음과 대답의 장이 되었고, 2011년 6월 22일 ‘드디어 불킨낭독회’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두리반의 투쟁 승리를 축하하며 마무리됐다.

이후 연대인들은 곧바로 ‘제2의 두리반’으로 불리던, 명동 3구역 ‘카페 마리’에 결합해 ‘말이낭독회지’를 진행했다. 그 뒤 한진중공업 김진숙을 위한 낭독 플래시몹(2011년), 강정 해군기지 반대 투쟁 낭독회, 재능교육 농성장 낭독회(2012년) 등으로 ‘낭독 연대’는 이어졌다.

그리고 2014년 9월 20일.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기 위해 매달 한 번씩 낭독회를 열어 304번을 채우기로 결의한 ‘304낭독회’가 시작되었다. 작가와 시민이 자발적인 일꾼으로, 낭독자로, 참여자로 들고나며 304낭독회는 약속대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304번까지 이제 180개월이 남았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출간한 304낭독회 2014~2023 선집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의 말을 이어갑니다』(온다프레스, 2023)의 말미에 실린 대담 <읽고 쓰기에 대한 힘을 믿는다는 것>에서 평론가 양경언은 낭독회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304낭독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이뿐이랴. 304낭독회에 참가한 많은 이가 그와 같은 생각에 골몰했고, 또 골몰하고 있을 것이다.

그 여파로 2016년 연대인들은 ‘현장 잡지’라는 이름의 낭독회를 통해 젠트리피케이션에 맞서는 공간들과 연대했다. 도시재생사업 이후 투기 자본이 들이닥친 서촌 ‘본가궁중족발’도 그중 하나였다. 두리반 때처럼, 카페 마리 때처럼, 궁중족발이 쫓겨나면 모두가 쫓겨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모였다. 낭독회는 5개월간 진행됐고, 건물주가 중장비를 동원해 강제집행을 집행한 달, 마지막 현장 잡지는 새로운 곳에 터를 잡고 장사 중이던 두리반에서 꾸려졌다. 2018년 6월 28일이었다. 그때 낭독회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또박또박 박혀 있었다.

‘다시, 두리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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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두리반에서, 다시 맹골수도에서, 다시 이태원에서… 비극적인 ‘다시의 자리’에서 울려 퍼졌던, 울려 퍼지고 있는 문학의 음성을 되풀이하여 생각해 본다.

이제 동네 책방, 카페, 도서관 등 다양한 공간에서 낭독회가 자주 열린다. ‘낭독’이 자연스레 독서 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그 ‘낭독(회)의 역사’가 사람의 말이 필요한 곳에서 발생했다는 것 그리고 문학(목소리)의 힘을 믿고 사람의 말을 잇고자 한, 이으려고 하는 작가와 시민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거듭 새겨볼 만한 것이다.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문학에는 필연적으로 체온이 깃들어 있으며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전했다. 매번 어떤 문학은, 어떤 문학 하는 자는, 어떤 문학공동체는 야만적인 역사의 어둠 속에도 한 줄기 빛을 켜고자 애써왔다. 그 빛에 빚지며 어떻게 살 것인가 질문하고, 어떻게 죽지 않게 해야 하는가 대답하려 노력해 왔다. 과거형이 아니다. 어떤 문학은 문학의 체온을, 사람의 의미를 재발견하기 위해 지금도 소리 내고 있다. 목소리와 목소리로 이어지는 사람의 말, 그때 켜지는 공동(체)의 빛, 그것이 오늘날 내가 우리 문학에 되풀이하여 기대어 서고자 하는 이유일 것이다.

김현
시인, 소설가, 1980년생
시집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김현 시선』 『호시절』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낮의 해변에서 혼자』 『장송행진곡』,
소설집 『고스트 듀엣』, 산문집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 『다정하기 싫어서 다정하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