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사소한 선의가 위대한 용기로 이어지기까지

- 클레어 키건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팀 밀란츠 감독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 원작 대 영화
  • 2025년 봄호 (통권 95호)
사소한 선의가 위대한 용기로 이어지기까지

- 클레어 키건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팀 밀란츠 감독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1980년대 아일랜드의 한 마을에 사는 중년의 빌 펄롱은 더없이 모범적인 서민이다. 사랑하는 다섯 딸과 아내 아일린의 생계를 위해 트럭 뒤편에 석탄을 실어서 종일 마을 곳곳에 배달하는 생활을 이어간다. 특유의 과묵함과 성실함, 타인과 부딪히지 않으려 하는 평화적인 태도 덕분에 그는 그 마을에서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거기에 인품도 선하다고 알려져 있다. 가난한 편부모 가정에서 빈주먹으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이력 덕분일까. 형편이 어려운 이를 볼 때 기어이 나서서 도와주지만,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양심에 따라서 행동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는 집에 돌아올 때마다 석탄 때 가득 묻은 두 손을 씻고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하려는 다정한 가장이기도 하다. 그의 일상은 평온하지만, 그는 가난했던 과거를 불현듯 떠올리면서 종종 일상에 위화감을 느낀다.

그해도 그는 아내 아일린과 크리스마스 준비에 한창이다. 그즈음 그의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든 사건이 생긴다. 그는 우연히 ‘선한 목자 수녀회’가 운영하는 수녀원에 석탄을 배송하러 가게 되었다. 그곳을 둘러싼 소문은 무성하다. 세탁소와 직업학교를 운영하면서 지역 경제에 이바지한다는 측면에서의 평판은 훌륭하지만, ‘타락한 여자’를 감금하고 인권을 유린한다는 소문도 있다. 빌 펄롱은 수녀원에서 그곳에서 나가게 도와달라는 소녀 사라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는 못 본 체하고 집에 돌아오지만, 어릴 적에 자신을 돌봐준 미시즈 윌슨과 네드의 친절을 회상하면서 괴로워한다. 결국 그는 사라를 구출하기로 한다.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동명 영화는 이처럼 사소하지만 아름다운 빌 펄롱의 용기를 그려낸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쓴 아일랜드 문학의 거장 클레어 키건은 2023년에야 국내에 소개되었다. 그녀가 쓴 『맡겨진 소녀』를 각색한 콤 베어리드 감독의 영화 〈말 없는 소녀〉 덕이다. 이 영화는 아일랜드어 영화 중 처음으로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영화상 후보에 올랐고, 그다음 해 국내에도 개봉했다. 『맡겨진 소녀』도 개봉 시기에 함께 출간되었고, 입소문을 타더니 그해 말 소설가 50인이 선정한 올해의 소설 3위에 선정되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인기도 만만찮다. 두 대형 온라인 서점에서 발표한 2024년 올해의 책 1위, 소설가 50인이 선정한 올해의 소설 공동 3위를 차지했다. 이윽고 이 책의 애독자임을 밝힌 배우 킬리언 머피가 주연과 제작을 맡은 동명 영화가 제74회 베를린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한국에서는 2024년 12월에 개봉해 ‘우리 시대의 크리스마스 영화’로 불렸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미덕은 키건의 문체다. 키건은 풍경을 그려낼 때 시적 수사를 통해 일상 너머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암시한다. 죽음의 기운이 노골적으로 서려 있는 도입부의 초겨울 풍경 묘사만 보아도 그런 문체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흐르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Barrow) 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1) 이 이미지는 소설의 모티프가 된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2)의 잔혹함을 암시한다. 끈 같은 안개와 흑맥주 같은 강의 이미지는 세탁기에서 빨래 구정물이 빠지는 이미지와 자연스레 이어지며, 거기서 여성이 죽었다는 암시로 기능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아우슈비츠수용소 인근에 범람하는 오수를 볼 때처럼. 혹독한 날씨를 견디는 마을 주민도 결말에 이르면서 ‘다 한통속인’3) 섬뜩한 방관자로 돌변한다. 이런 풍경 묘사가 하나둘 중첩되며 펄롱을 둘러싼 일상이 감옥처럼 그려진다. 반면 펄롱의 회상 속 윌슨과 네드의 선의는 따스하게 그려진다. 그의 용기가 위대해 보인다면 그것은 섬세하고 간결하되 탄탄하게 구축된 키건의 문장 덕분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영화화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문장 행간에 깃든 뉘앙스를 카메라로 포착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소설의 경우 양심과 소시민적 두려움 사이에서 방황하는 그의 고뇌를 원작만큼이나 세련된 연출로 그려야 하며, 펄롱을 옥죄는 마을의 풍경을 카메라에 제대로 담아내야 원작의 느낌을 그나마 따라잡을 수 있다.

물론 영화는 원작에 미치지 못한다. 감독은 빌 펄롱의 심리를 내레이션이나 대사로 직접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저 카메라로 그의 행보를 묵묵하게 따라갈 뿐이다. 이때 문장의 공백을 메운 것은 빌 펄롱의 고뇌를 체화한 킬리언 머피의 연기다. 그래서일까. 영화가 그의 연기에 의존한다는 의심도 종종 생긴다. 빌 펄롱의 서사를 윤리적 딜레마 중심으로 깔끔히 정리하면서 원작의 정치성이 표백된다는 단점도 크다. 원작 속 빌 펄롱은 기독교 신자 미시즈 윌슨 아래에서 자라난 덕에 기독교 정신을 체화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사라를 구하러 가기 직전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을까?”4)라고 자문하는 순간 이를 알 수 있다. 반면 영화에서는 가톨릭이 국교인 아일랜드에서 기독교 신자만 지닐 수 있는 소수자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소설 속 마을의 풍경을 카메라에 최대한 담으려 애쓴다. 영화는 까마귀가 즐비한 마을 곳곳을 몽타주하더니 빌 펄롱의 사무실에 이르러서 시작된다. 이때 카메라는 빌 펄롱의 뒷모습을 제외한 나머지 대상의 초점을 흩뜨리는 쉘로우 포커스(shallow focus) 기법으로 빌 펄롱과 그를 둘러싼 일상 사이의 거리감을 그려낸다. 영화 전반에 쓰인 이 기법은 빌 펄롱이 사라를 마을로 데려올 때와 엔딩에서 강력한 감정적 파동을 일으킨다. 원작에서는 사라를 혐오하는 주민의 행동을 섬세히 포착한다. 영화는 주민은 물론 마을 전체를 흐릿하게 찍는 쪽을 선택한다. 이때 빌 펄롱과 사라만 카메라에 선명히 포착되고, 편견 어린 마을 주민의 시선이 희미해진다. 그 순간 카메라가 둘을 지키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펄롱이 사라를 구한 뒤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보람을 느끼지만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임을 느끼고,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다. 또한 자신이 용기 내지 않음으로(필자 확인 필요)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5) 양심의 가책을 덜어내고 해방감에 사로잡힌다. 영화는 사라와 빌에게 다가올 세상을 복도 너머의 흐릿한 거실로 그려낸다. 미래를 미지의 영역으로 남기는 대신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긴 이 결말은 원작의 결말만큼 강렬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그럼에도 감독이 고민한 흔적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공교롭게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언론시사회는 12월 4일이었다. 전날 밤에 우리는 비상계엄령으로 일상의 붕괴와 마주할 뻔했다. 영화 행사가 대부분 취소된 와중 〈이처럼 사소한 것들〉 언론시사회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다행이었다. 이 작품은 일상 속의 혐오가 만연할수록 빛날 크리스마스 영화다. 일상을 배반하고 한 인간을 구하는 양심적인 선택의 기원은 무엇일까. 아마 마음 깊숙한 곳에 싹튼 타인의 사소한 선의와 친절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빌 펄롱의 긴 고뇌를 보았다. 자극으로 범벅된 음모론과 가짜뉴스, 확증편향의 시대에 우리를 만든 사소한 선의를 되돌아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터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시선일 테지만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주변에 숨어 있던 빌 펄롱을 하나둘씩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1)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홍한별 역, 다산책방, 2023, 11쪽

2) 막달레나 세탁소로 불리는 아일랜드의 가톨릭 수녀회가 미혼모나 매춘부와 고아 소녀 등을 ‘남자를 더럽게 한다’라는 명목으로 세탁소에 가두어 인권을 유린한 사건을 지칭한다. 73년 가까이 자행된 이 사건은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피터 뮬란의 영화 〈막달레나 시스터즈〉(2004)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3)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홍한별 역, 다산책방, 2023, 113쪽

4) 같은 책, 119쪽 5) 같은 책, 120~121쪽

김경수
영화평론가, 《씨네21》 객원기자, 1995년생
저서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