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문학
시련 속에 핀 문학, 안정에서 거둔 성취 그리고 문예관의 자유

  • 이 계절의 문학
  • 2025년 봄호 (통권 95호)
시련 속에 핀 문학, 안정에서 거둔 성취 그리고 문예관의 자유

“인간의 지혜 속에 숨은 신비로운 광맥을 파내려면 불행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대문호 알렉상드르 뒤마는 그의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에서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말했다. 누명을 쓰고 14년 동안 외딴섬 감옥에 갇혀 절치부심한 끝에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 당테스를 잘 설명하는 말이다.

혹독한 시련과 불행 속에서 운명을 개척할 때 뛰어난 능력을 꽃피우는 일은 개인에게만 벌어지지 않는다. 한국 문학 역시 일제 강제 점령과 해방 후 혼란스러운 정국, 한국전쟁, 군사정권 등 여러 불행 속에서 성장해 왔다.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는 소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한반도의 역사적 비극과 이로 인한 아픔을 그려내 호평받았다.

이 계절에 또 한 번 역사적인 비극이 벌어지고 있다. 헌정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체포, 구속됐으며, 이에 반발한 몇몇 대통령 지지자가 법원에서 폭력을 행사했다. 이 사건을 훗날 역사가 어떻게 평가할지 오늘을 사는 사람으로서 알 수는 없으나 불행한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씁쓸한 일이나 이 또한 여러 창작자에게 영감을 주어 다양한 창작의 원천이 될 것이고, 작가들의 지혜 속에 숨은 신비로운 광맥을 파낼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불행이 문학에 오로지 영감을 불어넣는 긍정적인 효과만을 불러올 리는 만무하다. 사회적 불안정이 문화 전반에 끼치는 악영향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으며 문학 역시 예외가 아니다.

특히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 문학과 작가들이 역사적·사회적 비극에 매몰되는 일이다.

일본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의 셰익스피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2000년 아사히신문이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지난 1천 년 동안 최고의 문인’으로 꼽힌 국민 작가다. 그런 소세키는 일본이 한창 제국주의 야욕을 드러내던 1900년대와 1910년대에 그의 모든 저술을 남겼음에도 그가 천착한 주제는 사회나 역사, 국가가 아닌 개인이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마음』은 한 개인의 이기심을 조명함으로써 인간이 근원적으로 타인과 단절돼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개인의 문제에 골몰하는 문학이 널리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소세키가 속한 사회가 일본 역사상 전성기로 평가받을 만큼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지금도 버블 붕괴 직전인 1980년대와 더불어 1868년 메이지 유신부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전을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여긴다. 물질적·사회적 풍요와 안정이 인간 존재를 고민하고 사유하는 문학적 성취를 꽃피울 토양이 됐던 셈이다.

절대적인 사회적 불행 속에서는 이런 성취를 기대하기 어렵다. 사회가 비탄에 잠겨 있는데 문학인이 개인 존재에 몰두하는 글을 썼다간 “분위기 파악 못 한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춘원 이광수가 쓴 한국의 첫 근대 장편소설 『무정』은 소세키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17년에야 세상에 나왔다. 『무정』은 중반부까지는 연애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별안간 계몽주의를 설파한다. 이광수는 『무정』에 일제의 강제 점령을 직접 비판하진 않았지만,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암울한 조국 현실과 무관한 연애 이야기로만 소설을 채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후로도 한반도에는 역사적인 비극이 끊이지 않았고, 사회 참여를 위해 문인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진 시기도 있었다. 1968년에는 이를 보다 못한 논객 이어령 선생이 ‘누가 그 조종(弔鐘)을 울리는가- 오늘의 한국 문화를 위협하는 것’이라는 글을 발표해 문학이 반드시 사회 참여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시각을 비판했다. 김수영 시인과의 ‘순수·참여 논쟁’ 서막을 올린 글이다.

사회가 안정되면서 한국 문학은 최근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고 사회적 사건과 직접 관련 없는 개인의 정서나 인간 존재를 탐구한 작품들도 많은 사랑을 받게 됐다. 한국 문화가 세계 주류로 떠오르면서 외국에서 한국 문학 작품이 주목받는 일도 늘었다. 다소 늦은 감은 있으나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까지 배출하면서 한국 문학이 전성기의 문을 열었다는 기대감이 높아지는 요즘이다.

이런 들뜬 분위기에 벌어진 계엄과 탄핵이라는 사회적 불행이 자칫 다양한 문학적 상상력과 표현을 가로막을까 염려스럽다. 이미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정치인뿐 아니라 예인에게도 정치적 선택을 강요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떤 가수는 SNS에 반려동물 생일을 축하한다는 글을 올렸다가 “이 시국에 뭐 하냐?”는 말을 들었고, 심지어 몇몇 배우나 가수는 이번 사태에 입장을 내지 않고 침묵한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

문학과 사회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사회상을 반영한 문학 작품이 출현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며, 이 과정에서 전에 없던 성취를 선보이기도 한다. 다만 사회가 불행을 겪고 있으니, 문학인도 응당 어떤 글을 내놓아야 하고 어떤 정치적 선택을 내려야 한다고 강요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런 우려가 기우에 그치기를 바라면서, 앞서 언급한 1968년 이어령 선생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줄인다.

“지금 우리는 일시적인 사회의 효용성을 추구하려다가, 영원한 문예의 상속권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팔아넘기는 어리석음을 경계하여야 한다. 문화를 정치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문화인 자신의 문예관이 부당한 정치 권력으로부터 받는 그 문화의 위협보다도 몇 배나 더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황재하
연합뉴스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