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실’을 탐색하는 작가, 유디트 샬란스키와의 만남
- ‘상실’을 탐색하는 작가, 유디트 샬란스키와의 만남
편집자 주 ㅣ제23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들은 지난 2월 5일부터 12일까지 독일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이들은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의 주요 명소를 탐방하고 독일의 작가이자 북디자이너 유디트 샬란스키와의 대담을 진행하였다. 대담 전문 및 기행문의 일부를 《대산문화》 봄호에 소개한다.
유디트 샬란스키(Judith Schalansky) 저서 『머나먼 섬들의 지도』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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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디트 샬란스키는 독일의 작가이자 북디자이너로,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는 자신의 첫 책인 『내 사랑 프락투르(Fraktur mon Amour)』(2006)에서부터 직접 책의 디자인을 맡았으며, 이후에 출간된 책들 역시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것들이다. 그의 작품들은 ‘상실’이라는 단어로 함축될 수 있다. 과거에 존재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것, 혹은 존재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한 것들은 그의 문학적 상상력을 추동하는 중요한 제재다.
그는 우리를 베를린주립도서관(Staatsbibliothek zu Berlin)으로 초대했다. 평일 아침 9시 반에 이곳을 방문하는 집필 루틴을 가진 그는, 직접 우리에게 도서관을 구경시켜주며 이 공간이 지닌 민주주의와 자유의 정신을 설명해주기도 하였다.
![]()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들과 유디트 샬란스키 |
작가이자 동시에 북디자이너라는 작가님의 프로필이 흥미롭습니다. 작품 집필과 북디자인은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_저에겐 두 가지가 차이점이 없다고 느껴집니다. 책을 쓴다는 건 그 안의 내용을 쓰는 것뿐만 아니라 책을 디자인하는 것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제가 처음 출간했던 책은 독일을 포함한 유럽의 옛 서체들을 모아 놓은 책인데요. 검은색의 가죽 표지와 핑크색의 안쪽 종이로 된 색 조합은, 이 책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탄성을 내지르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책의 내용과 외형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이러한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하신 지 2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작품 활동을 처음 시작하셨을 때 어떤 작가가 되길 바라셨고, 지금의 모습과 비교해서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_처음에 그렸던 모습과 하고 싶었던 것들을 많이 달성한 것 같습니다. 만들고 싶은 책들을 만들었고,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디자인 또한 부각하고 싶다는 부분도 충족할 수 있었어요. 글을 쓴다는 건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어렵지만, 제가 이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경험이 있음을 생각하면 힘든 작업 속에서도 위안을 얻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프랑크푸르트의 시를 모으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요. 솔직히 말하면 정말 지옥 같네요(웃음).
![]() 유디트 샬란스키가 직접 디자인한 책 『내 사랑 프락투르』의 내지 |
작가님은 “살아있다는 것은 상실을 경험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셨는데요. 상실이 작가님의 문학적 원동력이 된 이유와 그 매력이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_인류학적으로 봤을 때 ‘적는다’는 행위는 애도와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불안이나 슬픔처럼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감정이 있을 때 우리는 쓰고 싶다는 욕구를 갖습니다. 이것은 한 문화권의 시작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가까운 것의 상실을 경험했을 때 사람들은 이를 애도하는 의식을 치르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게 됩니다. 살다 보면 우린 경험한 것보다 경험하지 못한 것이 더 중요하게 다가올 때가 있고, 우연 혹은 운명이라 불리는 것에 의해 삶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저는 글쓰기를 조각하는 것과 비슷하게 보는데요. 다만 조각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돌조각들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그러지 못한 것에 관해 쓰는 것은 슬프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학은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의 가능성을 다룰 때 더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 독일의 통일은 독일 현대사의 중요한 변곡점이면서 여러 상실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유년기에 동독 체제를 겪으시기도 했던 작가님에게 독일 통일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_이 경험으로 얻은 것은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게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기념비가 철거되고, 화폐가 바뀌고,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민주주의가 성립되는 것들을 보며, 그 어린 시절에 제가 역사적 순간의 중심에 있었다는 감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에게는 이러한 변화가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기존에 갖고 있던 확신, 그에 맞춰 살아왔던 삶이 완전히 흔들린 순간이었으니까요. 자유라는 것은 견뎌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자유와 함께 살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자유를 견뎌야 하는지도 배워야 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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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에는 상상의 동물 유니콘이나 역사에 이름과 생애가 잘못 기록된 월면학자 키나우 등, 실재하지 않았던 대상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작가님에게 ‘실재’라는 것은 어떤 개념인가요?
_ 예리한 질문이네요. 사실과 허구는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임의로 만든 것입니다. 원시시대에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마법이나 주술 등을 이용했고, 근대의 인간들은 물건을 측량해 거기에 숫자를 붙여놓곤 했죠. 오늘날 우리는 여러 학문 분야에서, 추출한 데이터에 대한 해석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데이터는 이를 해석하는 사람의 기준에 의해 달리 해석되곤 하죠. 문학 역시 세계를 해석하는 기준 중 하나입니다. 특히 문학은 데이터를 해석하는 학문의 영역보다도 ‘실재’라는 감각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그림 형제가 동화를 쓰던 무렵 독일에서는 지나친 벌목으로 많은 숲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선 사라진 숲에 대해 쓰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났고, 그림 형제의 것뿐만 아니라 많은 동화에서 숲이 마법의 장소로 그려지게 됐죠. 그 이야기에는 숲을 향한 인간의 갈망이 투영되었고, 이것이 허구의 영역이라 여겨지는 문학이 세계의 실재성에 접근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머나먼 섬들의 지도』에서 작가님은 55개나 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섬들에 관해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작가님에게 ‘섬’은 어떻게 생각하고 감각되는 대상인지 궁금합니다.
_얼마 전 암룸(Amrum)이라는 섬에 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 배로 2시간이 걸리는 곳이었는데요. 저는 여러 섬들을 갈 때마다, 하나의 섬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게 아니라면 여기까지 먼 과정을 거쳐 운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그런데 암룸이라는 섬에서, 저는 유럽에서 볼 수 없는 금계(Goldfasan)라는 새를 발견했습니다. 유럽에 살지 않는 이 새가 어떻게 여기에 살고 있는지 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는데요. 그래서 섬은 실재와 상상이 서로 뒤섞이면서 드러나는 미스터리한 공간으로 다가옵니다.
가보지 않은 장소에 대해 상상하고 글을 쓸 때, 작가로서 가장 고민되는 지점은 무엇이었나요?
_첫 번째 고민은 난파된 배 같은 것이 아닌 다른 이야기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섬에 관한 이야기는 배가 난파되고 사람들이 조난당하는 것이 많거든요. 그런 이야기 틀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한 것 같습니다. 두 번째 고민은 각 섬의 지도 자료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주로 이 도서관에서 지도를 보관해 놓은 곳을 찾아갔는데요. 책상 위에 지도를 펼쳐 놓으면, 섬이 아주 조그맣게 그려진 채 주변의 모든 것이 파란색 바다인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지도들은 누군가에겐 쓸모없는 인쇄물일 수 있지만, 우리가 이걸 봤을 때 미학적으로 너무 아름답다는 걸 느낄 수 있거든요.
작가님이 꼭 방문해보고 싶은 섬이 있다면 어디일지 묻고 싶습니다.
_없어요! 아, 물론 제가 마음속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며 사진을 찾아보는 섬들이 있기는 합니다. 특히 뉴질랜드의 캠벨(Campbell)이라는 섬에 가보고 싶은데요. 하지만 암룸 섬과 같이, 제가 이미 가본 섬들과 비슷할 거라 확신합니다. 『머나먼 섬들의 지도』를 쓰면서 책 속에 등장하는 섬들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썼었는데요. 그 생각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습니다.
‘상실’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를 보여준 작가님에게, 최근에 상실한 것이 있다면 과연 무엇이 있나요?
_1년 반 전에 저와 제 가족이 살던 집을 잃은 일이 있었습니다. 원래 살던 집은 아틀리에를 겸하는 공간이 있었고 집의 층고도 높았습니다. 창밖으로는 새소리가 들려오고 여우 가족이 뛰어노는 모습도 볼 수 있는, 굉장히 아름답고 마법같은 공간이었어요. 그런데 새로 집주인이 된 사람들이 세입자인 저희를 갑자기 쫓아냈습니다. 지금 제 가족은 이곳 도서관과 가까운 집에서 살고 있는데요. 햇빛이 잘 들지 않아서 조금 어두운 집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새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집에 살 때는 새소리가 들리는 것이 너무 당연했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게 되어 슬픕니다.
작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님의 인터뷰에서 최근 읽고 있는 책으로 작가님의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이 소개되었습니다. 혹시 이 사실을 알고 계신지, 한강 작가님과 따로 인연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_사실 작년 3월 스웨덴에서 한강 작가를 만났습니다. 저도 한강 작가의 책을 이미 읽어본 상태였는데, 그때 한강 작가께서 『머나먼 섬들의 지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조만간 저의 새로운 책이 나온다고 하자 그 책도 읽어보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을 읽으실 거라는 걸 예상했습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뻐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어지는 질문인데요. 두 작가님 모두 죽음과 소멸을 통해 생명과 세계를 감각하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지점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_저와 한강 작가를 연결하는 지점은 두 사람 모두 시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시를 한 번도 출간한 적이 없지만 청소년 때 시에 굉장히 빠져 있었거든요. 시를 쓸 때 우리는 어떤 지점에 딱 들어맞는 단어를 찾고자 노력합니다. 저와 한강 작가의 글이 “시적이다”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두 사람 다 언어의 힘, 오직 하나의 단어만이 줄 수 있는 힘에 집착하는 태도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제 개인적인 경험은, 어떤 한 단어에 꽂힌 바람에 그 단어를 책에 어떻게든 끼워 넣으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반대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작가님이 최근 읽고 있는 책은 무엇인가요?
_지금 새로운 책을 집필 중이라, 다른 책을 읽을 시간이 많지는 않습니다. 실은, 제가 지금 이렇게 힘들게 글을 쓰는데 다른 사람의 책을 읽으면 약간 질투심이 날 때도 있더라고요. 다만 오늘 오전에 읽은 책은 매기 넬슨(Maggie Nelson)의 『블루엣(Bluets)』이라는 에세이였습니다. 작가가 이 책에서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그리고 ‘파랑’이라는 색채를 어떻게 에세이에 녹여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거든요. 제가 꾸준히 읽고 있는 에세이 작가들이 있는데요. 애니 딜러드(Annie Dillard), 엘리엇 와인버거(Eliot Weinberger)의 책을 반복적으로 읽고 있는데, 두 작가 모두 굉장히 많은 연구를 거치면서 글을 쓰고, 그들의 글을 읽다 보면 마음에 꽂히는 느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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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질문을 들을 때마다 그는 진지한 눈빛을 띠고 고민에 빠졌다. 단순히 질문에 대답하기 위함이 아닌,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는 ‘답’에 가까워지기 위한 신중한 모습이었다. 그의 말대로 문학이 애도와 연결된다면, 글뿐만 아니라 말 역시 사라졌거나 언젠간 사라질 그 모든 것에 나름의 존중을 갖춰야 할 것이다. 말은 발화된 순간 사라지고, 적어 남긴 글 역시 영원히 이 세상에 남을 순 없다. 그러니 말과 글은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과 책임이 아닐까. 그리고 문학은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자신의 길을 확정해 나가는 용기를 지녀야 하는 것 아닐까. 그의 대답 못지않은 깊은 침묵은 이러한 사유를 전달하는 듯했다.
“글쓰기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다. 어디를 얼마만큼 제한할지는 스스로 정해야만 한다.” 그가 우리에게 해준 말이다. ‘상실’이라는 가장 두려운 순리를 자신의 상상력으로 걸머진 그의 힘을, 우리는 각자의 가능성에 따라 받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