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시를 쓰는 방식을 조금 바꿔보았다. 기존까지는 집안 모든 세간살이를 끄집어내 어지럽히는 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어질러진 것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식이었다. 몰랐던 사실인데 나는 후자 방식으로 말해야 말이 더 정교하게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걸 진작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미 글을 실어버린 지면들의 작업물도 훨씬 근사한 질감이었으리라. 하지만 본래 P 인간의 창조적 역동성은 마감을 며칠 남겨둔 시점부터 활약인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내 손을 떠난 작업물은 언제나 아쉽다. 이는 욕심일까 겸손일까.
얼마 전 대학문학상 수상자 동기들을 만났다. 그들이 새 기수 수상자들의 시상식에 다녀온 이후였다. 새로운 수상자들의 시상식이 열린다는 건 곧 우리가 호명된 날로부터 1년여가량 지났다는 이야기였다. 수상자 동기인 평론가 이원기가 축사를 맡았다. 그땐 선배 시인이 축사를 해주셨는데, 이제 그 자리에 이원기가 부름을 받다니, 세월이 무색하다는 말이 이런 때에 쓰는 말인가 싶었다. 나는 1년 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내 주변의 많은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이 멈추든 흐르든 계절은 계속해서 흐르듯이 말이다.
이원기의 축사는 기승전결이 깔끔했고, 속에 적당한 유머도 섞여 있었다. 수상자 선배이자 문인으로서(고작 1년 경력이지만) 줄 수 있는 진솔한 조언이 담겨 있었다. 글의 성격을 철저히 유념하면서 동시에 시상식에 함께 자리할 동기들 향한 ‘샤라웃(감사 인사)’도 잊지 않았다는 점에서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연단 위에 오르기에 훌륭한 글이었다.
글의 가장 큰 키워드는 ‘동료’였다. 그는 대산대학문학상이 여타 문단의 등용문들과 달리 우리에게 안겨주는 가장 든든한 것은 큰 상금도, 해외 문학기행도 아닌 ‘동료’라고 말했다.
결말부에서는 번호를 매겨가며 했던 조언 때문에 (우리 사이에서) 빈축을 샀다. “첫째로, 겸손해져야 합니다.” 첫 번부터 무지하게 거만하다고 소설가 강수빈과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진리를 발견해 내고 만 것이다. ‘겸손’이라는 말은 이상하게 입 밖으로 내놓는 순간 무지하게 교만해 보인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이것을 ‘겸손의 딜레마’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러니 아마, 내 손을 떠난 작품들에 관한 아쉬움을 ‘겸손’보다는 ‘욕심’으로 정의하면 좋을 것이다.
원고를 작업할 때, 완성도나 그 과정에 따라 분류해 둔 폴더에 저장한다. 초고(礎稿), 퇴고(推敲), 탈고(脫苦). 등단 전에는 좀처럼 쓸 일이 없던 탈고 폴더를 들어가는 늘어났으므로, 자연스레 그 뜻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탈고 폴더에는 초고 고(稿)자가 아니라 괴로울 고(苦)자를 썼다. 탈고라는 단어에는 ‘원고 쓰기를 마침’의 뜻도 있지만, ‘괴로움에서 벗어남’이라는 다른 뜻도 존재한다. 사전에 동음어를 두고 나란히 놓인 두 뜻풀이를 마주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암시처럼 느껴졌다. 내가 느끼기론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쪽이 훨씬 탈고의 의미로 적확했다.
어째서 글을 쓴다는 건 이토록 즐거우면서도 괴로운 일인지, 무엇이 이것을 지속하게 만드는지 골몰해졌다.
한동안 글이 안 써지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을 닳도록 돌려봤다.
그는 여덟 살 때 주산학원을 마치고 나오던 날 자신이 체험했던 현장을 묘사한다. 맹렬한 기세의 소나기가 퍼붓는다. 처마 밑에 옹기종기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모여 있고, 그 반대편에도 거울을 보듯 똑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비를 피하며 서 있었다고. 그건 그가 수많은 일인칭을 동시에 경험한 최초의 기억이었다.
수상소감을 듣던 사람들은 그 처마 밑의 사람들이 되어, 종아리를 적시는 촉촉한 빗방울의 감각을 느꼈으리라.
그것은 완벽한 공명(共鳴)의 재연이었다. 그가 풀어낸 경이의 순간을 통해 나 역시 또 다른 경이를 경험하고 있었다. 머리털이 쭈뼛 서도록 온몸이 전율하는 그런 순간을. 나에게도 그런 상징적인 울림이 지금처럼 나를 관통하는 순간이 분명히 존재했다. 작가는 어쩌면 그 경이로운 순간을 더 멀리, 더 넓게 전하고자 하는 욕심을 앓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커다랗고 단단한 종을 치려면 두껍고 단단한 당목이 필요하다. 때때로 당목의 무게가 버겁다면 동료들이 그 무게를 기꺼이 나눠 들어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울림이 어딘가에는 닿았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올 때를 기다릴 것이다. 그런 소식을 꽤 자주 만난다면 즐거울 것이다. 아마 삶 곳곳에서 만날 그런 기쁨이야말로 당목을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밧줄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