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단상
공명

  • 글밭단상
  • 2025년 봄호 (통권 95호)
공명

최근에는 시를 쓰는 방식을 조금 바꿔보았다. 기존까지는 집안 모든 세간살이를 끄집어내 어지럽히는 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어질러진 것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식이었다. 몰랐던 사실인데 나는 후자 방식으로 말해야 말이 더 정교하게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걸 진작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미 글을 실어버린 지면들의 작업물도 훨씬 근사한 질감이었으리라. 하지만 본래 P 인간의 창조적 역동성은 마감을 며칠 남겨둔 시점부터 활약인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내 손을 떠난 작업물은 언제나 아쉽다. 이는 욕심일까 겸손일까.

얼마 전 대학문학상 수상자 동기들을 만났다. 그들이 새 기수 수상자들의 시상식에 다녀온 이후였다. 새로운 수상자들의 시상식이 열린다는 건 곧 우리가 호명된 날로부터 1년여가량 지났다는 이야기였다. 수상자 동기인 평론가 이원기가 축사를 맡았다. 그땐 선배 시인이 축사를 해주셨는데, 이제 그 자리에 이원기가 부름을 받다니, 세월이 무색하다는 말이 이런 때에 쓰는 말인가 싶었다. 나는 1년 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내 주변의 많은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이 멈추든 흐르든 계절은 계속해서 흐르듯이 말이다.

이원기의 축사는 기승전결이 깔끔했고, 속에 적당한 유머도 섞여 있었다. 수상자 선배이자 문인으로서(고작 1년 경력이지만) 줄 수 있는 진솔한 조언이 담겨 있었다. 글의 성격을 철저히 유념하면서 동시에 시상식에 함께 자리할 동기들 향한 ‘샤라웃(감사 인사)’도 잊지 않았다는 점에서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연단 위에 오르기에 훌륭한 글이었다.

글의 가장 큰 키워드는 ‘동료’였다. 그는 대산대학문학상이 여타 문단의 등용문들과 달리 우리에게 안겨주는 가장 든든한 것은 큰 상금도, 해외 문학기행도 아닌 ‘동료’라고 말했다.

결말부에서는 번호를 매겨가며 했던 조언 때문에 (우리 사이에서) 빈축을 샀다. “첫째로, 겸손해져야 합니다.” 첫 번부터 무지하게 거만하다고 소설가 강수빈과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진리를 발견해 내고 만 것이다. ‘겸손’이라는 말은 이상하게 입 밖으로 내놓는 순간 무지하게 교만해 보인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이것을 ‘겸손의 딜레마’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러니 아마, 내 손을 떠난 작품들에 관한 아쉬움을 ‘겸손’보다는 ‘욕심’으로 정의하면 좋을 것이다.

원고를 작업할 때, 완성도나 그 과정에 따라 분류해 둔 폴더에 저장한다. 초고(礎稿), 퇴고(推敲), 탈고(脫苦). 등단 전에는 좀처럼 쓸 일이 없던 탈고 폴더를 들어가는 늘어났으므로, 자연스레 그 뜻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탈고 폴더에는 초고 고(稿)자가 아니라 괴로울 고(苦)자를 썼다. 탈고라는 단어에는 ‘원고 쓰기를 마침’의 뜻도 있지만, ‘괴로움에서 벗어남’이라는 다른 뜻도 존재한다. 사전에 동음어를 두고 나란히 놓인 두 뜻풀이를 마주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암시처럼 느껴졌다. 내가 느끼기론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쪽이 훨씬 탈고의 의미로 적확했다.

어째서 글을 쓴다는 건 이토록 즐거우면서도 괴로운 일인지, 무엇이 이것을 지속하게 만드는지 골몰해졌다.

한동안 글이 안 써지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을 닳도록 돌려봤다.

그는 여덟 살 때 주산학원을 마치고 나오던 날 자신이 체험했던 현장을 묘사한다. 맹렬한 기세의 소나기가 퍼붓는다. 처마 밑에 옹기종기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모여 있고, 그 반대편에도 거울을 보듯 똑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비를 피하며 서 있었다고. 그건 그가 수많은 일인칭을 동시에 경험한 최초의 기억이었다.

수상소감을 듣던 사람들은 그 처마 밑의 사람들이 되어, 종아리를 적시는 촉촉한 빗방울의 감각을 느꼈으리라.

그것은 완벽한 공명(共鳴)의 재연이었다. 그가 풀어낸 경이의 순간을 통해 나 역시 또 다른 경이를 경험하고 있었다. 머리털이 쭈뼛 서도록 온몸이 전율하는 그런 순간을. 나에게도 그런 상징적인 울림이 지금처럼 나를 관통하는 순간이 분명히 존재했다. 작가는 어쩌면 그 경이로운 순간을 더 멀리, 더 넓게 전하고자 하는 욕심을 앓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커다랗고 단단한 종을 치려면 두껍고 단단한 당목이 필요하다. 때때로 당목의 무게가 버겁다면 동료들이 그 무게를 기꺼이 나눠 들어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울림이 어딘가에는 닿았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올 때를 기다릴 것이다. 그런 소식을 꽤 자주 만난다면 즐거울 것이다. 아마 삶 곳곳에서 만날 그런 기쁨이야말로 당목을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밧줄이지 않을까 싶다.

 

김서치
시인, 제22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2001년생